예수 그리고 바라빠
[월간 꿈 CUM] 복음의 길 _ 제주 이시돌 피정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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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 이시돌 ‘은총의 동산’ 십자가의 길 제1처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마르 15,6-13)
‘은총의 동산’에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한 곳에는 세 개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라빠,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병사입니다. 군중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구를 석방하고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히 우리는 나자렛 예수님을 풀어 달라고 했겠지요. 그래서 더 의아한 것은 도대체 왜 사람들이 예수님 말고 바라빠를 선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명의 ‘범죄자’는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우선 비슷한 이름을 가졌습니다. ‘바라빠’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불리었습니다. 심지어 마태오 복음에서는 바라빠를 ‘예수’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둘 다 로마 식민지 땅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또한 둘 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했고, 나름의 방식으로 혁명적이었으며 현재의 상태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 둘을 구별하는 한 가지는 그 변화를 추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바라빠는 폭력까지 사용할 각오였고 실제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반면에 나자렛 예수님은 단호히 폭력 사용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뜻하는 바를 이루려 하셨습니다.
2000년 전 사람들은 바라빠를 선택하고, 폭력을 선택했으며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달성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힘과 권위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힘과 강요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바라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 역사 안에서 선의로 복음을 전파하는 와중에 물리적, 언어적, 정신적 강요를 사용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예수님이 아닌 바라빠를 선택하고 그 정신을 전파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내 고향 아일랜드에서도 고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숨진 애국자들을 추모하고 기리고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그들의 희생을 기리면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까지 긍정한다면 예수님이 아닌 바라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바라빠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삶과 태도를 되돌아보면 좋을 것입니다.
글 _ 이어돈 신부 (Michael Riorda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제주교구 금악본당 주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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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