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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겸손
사진출처=adiscerningcatholic.tumblr.com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교 영성 훈련의 전부를 담고 있는 것은 ‘겸손’뿐이라고 했다(「설교집」, 351,3,4). 과연 겸손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기초요 고갱이이다. 아니, 그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적 겸손은 의외로, 실천은 차치하고라도, 이해하는 일 자체가 그리 쉽지 않다.
겸손과 가난
복음의 겸손(humilitas)은 무엇보다 굴욕의 가난한 처지(humiliatio)와 직결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추고 작아지는 것이라기보다, 더 낮추고 작아질 여지조차 없이 가난해진 상태다.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가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 이유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루카 1,48)이다.
여기서 ‘비천함’으로 번역된 그리스 원어는 ‘타페이노시스’(tapeinosis)로, ‘작음, 보잘것없음’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작고 가난해서 ‘별 볼 일 없는’ 상태야말로 겸손의 복음적 의미를 가장 적절히 대변한다. 복음의 견지에서 겸손은 너무 훌륭한 나머지 겸덕까지 구비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거니와 “바랄 만한 모습도 없”는(이사 53,2) 헐벗은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고아와 떠돌이 외국인, 그리고 과부로 대표되는 “주님의 가난한 이들”(anawim)의 처지야말로 겸손이다. 나아가 ‘죄인’의 상태는 복음적 겸손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윤리 차원에서 훌륭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이들보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늘 ‘편애’하신다는 것이 성경 전통의 가르침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던지신 도발적인 말씀도 이 맥락에 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3,31). 영어 단어로 보자면 겸손만을 뜻하는 ‘humility’보다 비천함도 동시에 뜻하는 ‘humbleness’가 복음적 겸손의 더 적절한 번역어가 될 것이다.
겸손과 진리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에 따르면 “겸손은 진리”다(「대화」, 71). 진리는 진실이요 진실은 ‘정직’과 직통함을 감안하면, 성녀는 겸손을 “정직한 자기 인식”과 같은 것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복음적 겸손은 겸양지덕도 자기 비하(이른바 ‘셀프 디스’)도 아니다. 참된 겸손은 스스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격의 진정성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실천”(“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은 무엇보다 이런 정직함과 진정성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이 맥락에서 겸손은 남 앞에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아니라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로 드러난다. 근원적으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꿰뚫어 보시고(1사무 16,3 참조), “사람 속을 꿰찔러 …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 내시는(히브 4,12) 하느님의 시선, 그 작렬하는 빛의 현존을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옮긴이 주; 주님을 바라다 볼 수 없는 두려움, 곧 얼굴을 가리고 그 분의 음성에 벌벌 떠는 죄인)
하느님 자비에 내맡길 때
성인들일수록 스스로를 “가장 큰 죄인”이라 고백한 것은 ‘겸덕’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직했기 때문이다. 제 삶이 하느님 현존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의 부끄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도망가지 않는 용기. 사실은 이게 겸손이다. 이 자리에서 조금만 버틸 줄 알면, 하느님 용서와 자비를 액면 그대로 경험하고 자신의 허약함과도 비로소 화해하게 된다. 여기는 사람의 진리가 ‘실천’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진면목도 가장 환하게 드러나는 자리다.(옮긴이 주; 주님을 바라다 볼 수 있는 두려움, 곧 얼굴을 가리고 그 분의 음성에 엎드릴 수 있는 죄인, 자비를 비는 죄인)
엄청난 수행이나 노력으로 이 진리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우리 편에서의 모든 노력이 근원적으로 무망(無望)한 시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하느님 자비에 모든 것을 탁 내맡겨 버릴 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영적 수준에서도 성공이 아니라 실패, 강함이 아니라 허약함, 빛이 아니라 그늘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안팎의 고통과 시련을 통해 자기 힘으로는 도대체 얼마나 ‘안 되는지’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자리에서만 겸손이 탄생한다.
영적 여정 전반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겸손이야말로 세우고 쌓는 것이 아니라 허물어지고 비워지는 것(스스로 허물고 비우는 것이 아니다!)과 관련된다. “유혹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 말씀이나, “굴욕이 없으면 겸손도 없다.”(Sine humiliatione, nulla humilitas)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 말씀은 이 맥락에서가 아니면 결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겸손은 힘들지 않다. 그저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따름이다. 노력 유무와 관계없이, 하느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은 조만간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겸손, 하느님과 만나는 ‘존재의 근저’
복음서의 겸손은 윤리적 처신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겸손의 여정을 끝까지 걷는 제자는 마침내 제가 ‘아무것도 아님’, 심지어 ‘없음’을(1코린 1,28 참조)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는 지점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전부’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9,22; 15,28 참조).
뤼스브룩 복자는 <계곡>이란 제목의 단상에서, 겸손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이 자리를 계곡이라 부르며 말한다. “의로운 이는 자기 가난의 심연에 거하며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관상한다. 자기에게 어떤 진보나 보존의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음을 보고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치 놀란다. 그리하여 겸손의 계곡은 깊어진다.” 그러나 이 자리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관상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늘의 높음과 자기의 비참을 (동시에) 관상하면서 계곡은 더욱 깊어진다.”
이 자리에 엎어져 잠잠히 기다릴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을 건드리시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다. … 겸손의 나락으로 침몰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 안으로 침몰 (옮긴이 주; 몰락 그리고 침묵 그리고 의탁,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내 뒤를 따르라")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심연의 근저이시기 때문이다. 겸손은, 너무 어려워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을 얻어다 준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데려다준다.”
이연학 요나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수도자.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한다. -- 가톨릭일꾼에서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