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조중변계조약 관련 자료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막연히 "북괴 김일성이 625참전 댓가로 중공에게 백두산 절반을 떼어 주었다"라는 말을
들었었고..시간이 흘러 나중에 "조중변계조약"이란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 던것과는
반대로 당시 협상을 하던 주은래는 한민족, 북한에 아주 호의적이었고 (관련된 주은래의 어록도 있지요. 선조들을
대신해서 한민족에게 사과한다..라는 요지의) 그래서 조중변계조약은 오히려 백두산이 통쨰로 중국에 넘어 갈뻔
했지만 중국과 북한이 반반씩 나누어 갖게 되었고..또한 압록강,두만강 내 수 많은 섬들이 상당수가 북한 측에
귀속되었다..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아직은 의문입니다.)
그런데 눈에 번쩍 띄던 문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협상하던 김일성이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 즉 환인-집안 지역
요구했고 그래서 깜짝 놀란 주은래가 북한에 유리하게 양보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작년인가 신문에서 또 보게 되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1/07/2011010701166.html
Why] [유석재의 타임머신] '대륙 정벌' 못다한 꿈 깃든 섬 이제와서 중국에 바치겠다니
기사 중간에 보면
1962년 북한 김일성과 중국 주은래(周恩來)가 조·중 국경조약을 체결할 때의 일이다. 강 가운데 있는 섬들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중 김일성이 불쑥 이런 말을 던지고 나섰다고 한다. "그 섬들 다 드리겠소!"
주은래가 빤히 바라보자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 하나만 내 주시오." "뭘 말이오?" "집안(集安)만 우리한테 넘겨주면 됩니다." 압록강에 맞닿은 집안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 있는 고구려 옛 수도 국내성이다. 깜짝 놀란 주은래는 부랴부랴 섬들을 다 줘 버렸다는 얘기다.
라는 글이 나옵니다. 물론 글쓴이의 상상의 산물이지만 분명히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랬기에 저 역시 저 기사가
나오기 훨씬 전에 저런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북한과 중국이 국경조약을 맺을 때, 한민족에게 호의적이었던 주은래를 설득하여..조금만 더 집요(?)하게 요청하여
환인-집안, 아니 국내성,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 있는 집안만이라도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던 국민학교 시절부터 광개토대왕비, 장군총은 우리 땅이 아닌 중국 만주땅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역사적인 사료를 찾다보면 안타깝게도 이 지역은 조선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이들의 언행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땅이 아니기에, 고구려에 대한 연구와 발굴도 할 수 없이 남의 나라 영토의 우리 문화재가
되버렸고..중국의 영토역사관에 근거한 동북공정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참 이슈가 되는 "간도"보다도..아니 간도를 포기하더라도..비록 그 지역이 훨씬 작더라도...
우리의 정서적 조상이자 자부심이 깃든 고구려의 발상지였던 이 지역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쓰다보면 늘 안타까운 마음에 항상 "가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 참 씁쓸하네요.
첫댓글 주은래와 김성주와의 이야기는 어차피 밀실에서 나눈 비밀조약이기에 말할 건덕지가 있을라나 모르겠지만,
님 글 중 마지막 두번째 단락 중에 있는,
`이 지역은 조선의 영역이 아니라..라고 생각했던 조선시대 많은 이들의 언행을 보게 됩니다.`
를 읽는 순간,
솔직히,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격분을 느꼈습니다.
조선 시기 유사 중 누가 우리 영역이 아니라고 했나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심지어 낙랑군을 흐르는 열수를 한반도 한강이라 비정한 구암 한백겸.순암 안정복,여암 신경준, 다산 정약용 등 조차도 단군조선.기자조선.고구려의 영역이 서쪽으로 고죽국 즉 지금의 란하 서쪽까지였었다고 했으며,
투표하고 왔는데..님 댓글을 이제 봅니다. 전체적인 글의 취지를 봤을 때 누굴 격분시킬 문장도, 또 그럴 의도도 없어서 그대로 두겠습니다.인생사 살다보면 남과 다른 의견 많이 보게되고 님의 표현대로 '격분'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화내야할때도 있는것이고 그걸 조절할줄도 알아야겠지요. 좋은글 많이 올려주시길. 잘 읽었습니다.
제가 너무 `격분`하였나요?
격분한 것은 사실이고요, 님 충고처럼 심호흡하고 조절하면서 댓글 단 것입니다.
어쨋든 이건과 관련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조선 시대 유사들 거의가 아니고 모두,
지금의 요동은 으례 평안도 북쪽 땅으로 여겼으며,
병자란 이전은 지금의 대릉하 상.중.하류와 남부 지역이 평안도.서해도에 속했습니다.
<명사/지리지>에,
요동도사사 치소인 정요중위 요양현에서 북경까지 1700 리였고,
교치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청 시기의 요양주에서 북경까지는 1350 리였으며,
압록강 의주에서는 1990 리, 한양에서는 3100 였습니다.
과연 명청시기 요양과 의주 위치가 지금의 요양.신의주였을까?
글의 요지하고는 전혀 무관한..그냥 한 문장의 말꼬리잡기 같았었는데..하고싶은 말이 있어 조금 더 리플달아봅니다.
위의 글을 보시다시피 저는 "모두"라고 말한적없습니다. 그냥 "많은 이들의 언행" 라고 이야기 했을 뿐. 실제 사서를 보면 조선시대에 자의든타의든 압록강을 그냥 국경 처럼 생각해서 그 이북을 조선땅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님 한테 반문해봅니다. 님이나 저나 결국 후세의 사람이고..그 당시 모든 조선시대 전국민의 모든 생각을 알수없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지 않은담에야.그냥 님이 언급한 사람들은 조선 중후기의 몇몇(?)의 학자들 문인들의 기록을 근거로 말한 것일 뿐.
그 사람들 조차도 단군 고조선, 고구려와는 무관한 수천년 뒤의 사람들 일뿐입니다. 그리고 님도 그들의 생각,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의견을 펼친것이지요. 결국 그때 그사람들이든, 그사람들이 했던 그런 문장,기록들을 근거로 님이 영역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다 우겨봐야..결국 다 추론입니다. 이유는 단군기자조선,고구려 시대의 기록과 그당시 지도가 없으니까요. 그냥 비정하는 것뿐이지요.최소 영류왕때의 봉역도라도 남아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당신이 확신하는 만큼 님 의견이 옳은 건지,아닌지, 저는 그시대에 없었고,저도 공부가 짧아서 잘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건 님도 그시대에 있지 않았고
고조선,고구려 그당시 지도나 역사서가 없기때문에 역시 님도 백프로 맞다고 할순없다고..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수천년 지난 21세기에, 몇세기전 조선후기의 몇몇 어록,기록을 토대로 이렇다 저렇다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거 밖엔. 다시 말하건데 잡담같은 제글의 요지는 이게 아니며 저는 그냥 공부하는 입장에서..아직도 많이 부족해서..잘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그시대의 기록이 없고, 그시대에 살지 않았으니 그당시 모든사람들이 전부 일일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없습니다. 그리고 그시대에 살지 않았던 님도..후학으로써 공부하고,조선후기의 어록,자료를 찾아 그냥 추정하는 것이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등은 浿水가 압록강(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서북쪽 경계가 동쪽으로 후퇴하여 지금의 요하를 조.청 경계로 인식하였고 압록강이라 불리웠슴)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병자호란 이후 1863 년까지 227 년 동안 지금의 북경에 다녀 온 사신단 횟수 227 회, 삼사 총수 약 1177 명, 수행원까지 포합하여 대략 최소 1 만 명에서 최대 5 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요동을 거쳐 북경을 다녀왔는데,
이 중 유명한 3 대 연행기인 노가재, 연암,담헌의 연행기들을 읽어 보십시요.
과연 조선 시기 공식적으로 약 5 만명 가까운 이들이 지금의 요동을 요동이라고나 생각했는지
1656 년 인평대군의 <연도기행>은 한양에서 북경까지,
1790 년 서호수의 <연행기>는 심양에서 열하까지 매일의 여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두 기록을 검토해 보면 현 한국사학계의 지명 비정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또 그 잘못 된 시초가 어디부터인지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조선시기 사대부들은 현 한국사학계의 전문 역사학 교수들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영남 남인계인 오운 <동사찬요>를 시작으로 소론계인 미수 허목,약천 남구만,이세구,
이계 홍양호,수산 이종휘,정원용 등이나 박주종,신채호,정인보로 이어지는 역사 지리 관련 주장들만 살펴 보십시요.
그들이 말하는 요동이 어딘지를.
제가 아는대로 적겠습니다...요즘은 정치, 역사 관련 자료 검색하기가 짜증이 나더라구요...
조중변계조약은 백두산 정계비 해석을 근본으로 깔고 협상테이블에 북한과 중공이 앉았던 겁니다..
님이 말한 집안 얘기는 추측컨데..
제가 알기론 조중변계조약이 협상테이블에 앉았던 시기와 체결되었던 시기는 60년대초반이고..문화대혁명은 60년대중반으로 알고 있습니다...즉, 모택동의 권력 누수현상이 있었던 시기에 그걸 이용하여 집안 얘기를 꺼낸것이겠죠..김일성은 확고히 권력을 잡았던 시기이니...김일성이 그걸 이용하였다고 봐야죠.
주은래가 조선의용군의 좌권을 아주 많이 존경했다는 기록이 있다는걸로 압니다..
그래서 그런가..정치, 역사적인 면에서 주은래는 조선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죠..
그와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처음엔 중공이 백두산의 많은 부분을 요구하자..
김일성측이 ..그럼 북한을 상징하는 문양에서 백두산을 뺴야겠군요..이런씩으로 회담을 장기화 하려하자..주은래측에서 양보하여서..백두산의 54% 인가 .55%를 얻게 되었고.후에 이걸로 주은래는 반역자, 나라 팔아먹은 놈이란 곤욕을 치뤘다는 얘기가 전해지곤하죠.
조중변계조약에 대해서 얘기를 할려면 자세하게 했으면 하는데..
중공이 일정부분을 차지한걸.. 중공이 1.4후퇴때 개입한 걸 갚기 위해서 팔아먹었다고 하는데..
항일투쟁기간 중에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분들은 항일투쟁에 국민당 보단 적극적인 공산당의 팔로군에 가담했고..팔로군이 일본군에 쫒길때. 모택동, 팽덕회의 생명을 구했고..그래서 그런가 중공군의 개입때 팽덕회는 총사령관이었고..이 당시 중공군의 개입은 모택동의 모든걸 걸해야 했던 위험부담이 있었는데도 감행했죠..물론 정치, 국제관계도 중요하지만 모택동 개인적인 측면도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근데 제가 무슨말을 하려했던 거죠..
아..좌우지간 조중변계조약은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해석도 있고 간도협약에 대해서도 관련해서 봐야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