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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랑의 아픔에 관한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보니 타일러의 <It’s a heartache>이다. 삽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듯이 아픈 가슴을 긁는 남성적 허스키 보이스와 사랑의 상실감을 바이브레이션으로 노래한다. 그런데, 사랑은 아픈 것이고 바보들의 장난이라는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오히려 사랑의 낭만과 그리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노래가 가진 마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다. 신을 사랑한 인간은 많은 재물을 바치거나 동류 인간, 또는 자기 생명을 바쳐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고대의 인신제사는 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극단적인 자기 고백 방식이었다. 자기를 죽여서라도 어떤 대상에 몰입하고 그에게 귀속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성을 깨트리고 역으로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종교가 등장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신을 사랑하여 자기를 바치는 종교에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자기를 희생시킨 역설의 종교로 2천 년 전 로마 식민지 팔레스타인에 등장했다.
그런데 인간을 사랑한 신(神), 예수는 인간에게 버림받는다. 인간을 사랑한 죄로 인간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랐던 수많은 군중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쳤다. 심지어 그의 가장 가까운 심복들인 열두 제자들마저 돌아섰다. 인간을 사랑한 대가였다.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한 말을 성서는 단 몇 마디만 기록해 놓았지만, 보니 타일러의 노래 가사처럼 "It’s a heartache"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마음이 아프다’보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 ‘사랑이 이런 건가?’라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가장 믿었던 정치인이 변절을 하고, 이 나라가 공산화되는 걸 막기 위해 윤석열을 지지했는데 나라가 망가지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벌지만 이게 사람 사는 건지 모르겠고, 구원받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데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강매당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살찔까봐 걱정되는, 모순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게 인간세상이다.
인간의 존재를 불안하게 만들고 삶의 안정성을 깨뜨리는 걸 ‘악(惡)’이라 한다. 이 악에 대한 종교적 표상을 사탄, 마귀(마구니)라고 한다. 악한 일이 일어나고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에 대한 종교의 해석이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무속적인 종교일수록 악령과 대적하라고 가르친다. 이 악령은 가끔 빨갱이가 되기도 하고, 특정 지역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동성애자, 혹은 진보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야당 대표가 되기도 한다. 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에 악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들이 계급투쟁을 통해서 착취구조를 전복시키면 악이 사라지고 공산사회의 이상이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모두 옳다. 아니, 옳지 아니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문제는 어느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모든 현상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20세기의 심리학은 새로운 차원에서 인간의 문제를 조명한, 종교적 기능을 가진 학문이다. 문화인류학과 사회심리학, 신화학, 문학 같은 장르의 학문은 인간을 이해하는 좋은 것들이다.
휴가 중에 읽은 어니스트 베커의 책 <악에서 벗어나기>는 내가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난 탁월한 책이다. 그는 엘리아데 이후로 내가 만난 가장 탁월한 사람이다. 그는 인간 사회에 만연한 악의 문제를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의 죽음을 인식하는 동물이다. 그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영원을 향한 갈망을 갖게 되고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말한다. 한 나라의 국가 체계, 이데올로기, 영웅 서사, 문화 현상 같은 것들이 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서 온 것이라는 논증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쾌감만큼이나 행복하다.
재미있는 만화책을 책상 밑에 감추어 두고 엄마 몰래 읽는 쾌감처럼 그의 책은 인간에 대한 이해, 정치적 부조리, 종교 현상, 전쟁 등과 같은 이 세계의 악에 대한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사람을 만나고 미술 전시회를 가고 책을 읽는 것으로 휴가를 보내는 내게 이번 휴가는 이 책으로 행복이 플러스됐다. 세상이 왜 이래? 정치가 썩었어! 교회가 이래도 되는 거야? 라는 불만으로 고통받는 지성인들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탁월한 명저다.
인간을 사랑하는 게 가장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한 신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성경이나 신학 서적이 아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랑은 아프다.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아프다. 그래도 사랑해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면 사랑하자. 예수님처럼.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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