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별곡」과 오쿠노 호소미치의 비교 고찰
강경하*전남대
<要旨>本稿は、韓国と日本の代表的な紀行文学作品である「関東別曲」とおくのほそ道を中心に、韓日紀行文学の比較研究を試みたものである。「関東別曲」は松江鄭澈が江原道の観察使として赴任し、関東地方を遊覧しながらその景色と感興を詠んだ朝鮮時代の紀行歌辞である。おくのほそ道は松尾芭蕉が弟子曾良と日本の東北地方への旅の感想を書いた俳諧紀行文である。結論からいうと、「関東別曲」の旅は、自然の中で暮す士大夫が自然を通して王を偲ぶ旅である。それに対しておくのほそ道に描かれている旅は、俳諧修行の旅、また先人とその詩心を偲ぶ旅である。また、歴史的な地域をみまわる目とそれの文学的形象化には、松江からは遊覧的性格を、芭蕉からは鎮魂的性格を見ることができる。このようなことは、牧民官としての旅をしている松江と、専業詩人としての旅をしている芭蕉の立場の違いはあるにしても、両国の詩歌の在り方․詩人の在り方について示唆することが大いにあると言えよう。 키워드 : 송강 정철, 마쓰오 바쇼, 관동별곡, 오쿠노 호소미치, 기행문학
1. 들어가기
「関東別曲」은 송강 정철(松江鄭澈 1536~1593)이 지은 기행가사로, 송강이 45세 되던 1580년(선조13) 정월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 받아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뛰어난 경치와 그에 따른 감흥을 표현한 기행문이다. おくのほそ道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3대 기행문 중 마지막 기행문으로, 46세 되던 1689년(겐로쿠元禄2)에 제자 소라와 함께 에도(江戸)를 출발하여 동북지방을 돌아서 오가키(大垣)까지 도보로 여행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송강이 「관동별곡」의 여행을 떠난 당시 조선조는 대다수의 사림관료들이 표면적으로는 정권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행세하였다. 당시의 조정은 계속되는 사화(士禍)의 와중에 있었다. 송강은 이러한 때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유배생활과 은둔생활을 반복하다가 1580년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원주로 부임한다. 그래서 비교적 당쟁을 멀리 할 수 있었던 이 시기에 그의 시적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된다. 「관동별곡」은 송강이 항상 말로만 들어오던 금강산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의 아름다운 절승지를 여행하면서 읊은 기행가사이다. 한편, 바쇼가 오쿠노 호소미치의 여행을 떠난 당시는 에도 바쿠후(1603~1868)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겐로쿠 문화가 도시를 중심으로 꽃을 피우고 있던 때였다. 당시의 도시 상인, 즉 조닌(町人)들은 현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중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바쇼는 은둔 생활을 접고 변방으로 여행길에 나선다. 1689년 동북지방의 우타마쿠라를 탐방하여 자연을 동경하고 자신의 새로운 하이카이풍을 지방에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에도에서 오가키까지 6,000여 리를 도보로 여행한 것을 하이분(俳文)으로 기록한 것이 오쿠노 호소미치이다. 「관동별곡」과 오쿠노 호소미치는 각각 한일 두 나라의 대표적인 기행문학이라는 점, 송강과 바쇼 두 작자 모두 그들의 생애에서 사상과 경륜이 무르익은 40대에 씌어졌다는 점, 또한 두 나라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명소(名所)로 불리워지는 곳을 여행했다는 점, 운문의 요소를 띄고 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본고는 이러한 공통점을 바탕으로 하여 「관동별곡」과 오쿠노 호소미치의 여행체험이 한국과 일본에서 어떻게 문학화되는지, 그 특성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양국의 기행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여행의 동기
1) 목민관 시인으로서의 여행
조선 시대의 기행가사는 관료들이 자기가 부임한 곳의 뛰어난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기행가사는 관료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한 것으로, 우선 그들은 그러한 자리를 마련해 준 임금의 성은(聖恩)에 감사하며 공적인 임무 중에 틈을 내어 자기가 부임한 곳곳을 둘러보고 아울러 자신의 감흥과 선정에 대한 포부를 가사로 읊은 것이다. 「관동별곡」의 소재가 된 송강의 관동지방 여행 역시 강원도의 관찰사로 원주에 임명되어 그 곳에 부임한 후, 그 지역을 유람한 것이다. 송강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송강은 당상(堂上)까지 오른 정치인으로 당쟁에 스스로 능동적으로 개입하였고, 서인(西人)의 실세가 되자 조정에 나갔다가 낙향 혹은 유배당하기를 6進 6退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송강은 때로는 낙향해서, 혹은 유배당했을 때 자연과 벗하여 작품활동을 한 시가문학의 대가이다. 그런 가운데 지방관으로 나가 그곳의 풍경을 본 송강의 「관동별곡」 역시 관료생활과 관계 있는 것으로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살피고 노래한 것이다.
강호(江湖)애 병(病)이 깁퍼 듁님(竹林)의 누엇더니 関東 八百里애 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罔極)하다
「관동별곡」의 서사부분으로, 출발의 동기와 벌써 설레는 심정, 그리고 임금에 대한 성은(聖恩)에 대한 고마움을 밝히고 있다. ‘강호(江湖)에 병(病)이 깊어서 죽림(竹林)에 누워 있던’ 송강은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자 망극한 성은(聖恩)에 감사하며 임지로 부임한다. 여기에 그의 여행 동기와 생활이념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향리에 내려가 처사로서의 삶을 누리다가도 관인의 길로 나서게 해 주는 임금의 성은에 감사하는 자세는, 사회현실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수 없는 유가 사대부로서의 이념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고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송강 정철(松江鄭澈)마쓰오 바쇼(松尾芭蕉)․1536년 서울에서 4남 3녀 중 막내. 명문 거족 ․10세(1545년) 을사사화로 아버지 유배. 10년간 전라도 창평에서 생활 ․27세(1562년) 문과에 합격. 창평의 자연환경과 여러 성리학자들에게 작가적 소질을 키움. 당대의 문장가와 유학자인 양응정, 임억령, 김인후, 송순, 기대 승에게 사사. ․37세(1572년) 服을 벗고 다시 환로에 나감. 직책이 자주 바뀜. 유교, 老子의 道家사상, ․43세(1578년) 조정으로 돌아와 동인의 거두로 다시 물러남 ․45세(1580년) 1580년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관동별곡」, 「훈민가」 지음. 다시 창평으로 내려감 1580년 12월 전라도 관찰사 임명. 1581년 9월 승정원 도승지 겸 예문 관 대제학, 12월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1582년 3월 예조참판, 6월 형조 판서, 8월에 예조판서 ․49세(1584년) 8월 대사헌 제수 ․50세(1585년)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척 을 받고 물러나 경기도 고양에서 창평 으로 내려옴 ․58세(1593년) 강화에서 생을 마침 <작품> 松江集 7책과松江歌辞 1책, 시조 80여수, 한시 758수․1664년 伊賀上野에서 2남 4녀 중 셋째. 하급무사 집안으로 농업에 종사 ․23세(1666년) 의지했던 良忠의 죽음으 로 고향에서 하이카이 열중 ․29세(1672년) 貝おほひ를 고향의 天満宮에 봉납(貞門風에서 談林風으로 전환하는 과도기) 上方의 하이진의 영향을 받고, 기타무라기긴으로부터 하이카이 비법서인 우모레기(埋木) 전수 받음. ․37세(1680년) 宗匠立札을 내걸고 하이카이 宗匠列에 서게 됨. 전국 각지에서 교류의 소리 높아짐. 荘子의 ‘무위자연사상'으로 俳意, 作意를 제일로 삼음 ․38세(1681년) 종장(宗匠)생활을 접고, 후카가와(深川)에 은둔, 門人 리카(李下)가 바쇼암이라 이름짓고, 俳戸를 芭蕉라고 함. ․41세(1684년) 野ざらし紀行의 여행 ․44세(1687년) 笈の小文의 여행 ․45세(1689년) おくのほそ道의 여행 ․51세(1694년) 오사카에서 임종 <작품> 홋쿠(発句) 1,000여수, 렌쿠(連句), 하이분(俳文) 등 다수의 작품
2) 전업 시인으로서의 여행
오쿠노 호소미치는 고대로부터 일본의 변방, 동북지방을 여행한 것을 기록한 하이분(俳文)이다. 바쇼에게 있어서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고된 수행의 길이기도 했다. 바쇼의 여행은 정치성이나 어떤 사회적인 성격도 띄지 않고, 오직 여행을 위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현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었는데, 위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쇼는 이전 시대에 시대의 흐름과는 역방향으로 은둔생활을 시작하였고, 나아가서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의 여행도 절정기에 이르게 된다.
해와 달은 영원한 가객이고 오고 가는 해 또한 나그네이다. 사공이되어 배 위에서 평생을 보내거나 마부가 되어 말 머리를 붙잡은 채 노경을 맞이하는 사람은, 그날 그날이 여행이기에 여행을 거처로 삼는다. 옛 선인들 중에도 많은 풍류인들이 여행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느 해부터인가, 나도 조각 구름을 몰아가는 바람결에 이끌려 방랑하고픈 생각이 끊이지 않아 저 먼 변방의 해변을 정처없이 거닐다가, 지난 가을 스미다 강가에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오래된 거미줄을 걷어 내고 일단은 정착했다. 그러나 이윽고 한 해도 저물고 새해를 맞아 입춘의 안개가 피어오를 즈음이 되니, 봄 안개가 자욱할 시라카와 관문을 넘어 저 아득한 동북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고픈 바람으로 마치 소조로 신에 들린 듯 마음이 뒤숭숭하던 차에 도조신이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드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밑줄은 필자)
月は百代の過客にして、行かふ年も又旅人となり。舟の上に生涯をうべ、馬の口とらえて老をむかふる物は、日々旅を栖とす。古人も多く旅に死せるあり。予もいづれの年よりか、片雲の風にさそはれて、漂泊の思ひやまず、海浜にさすらへ、去年の秋江上の破屋に蜘の古巣をはらひて、やゝ年も暮、春立る霞の空に白川の関こえんと、そゞろ神の物につきて心をくるはせ、道祖神のまねきにあひて、取もの手につかず。 (밑줄은 필자)
위의 인용문은 오쿠노 호소미치의 서문으로, 미지의 땅에 대한 불안감이 나타나 있다. 그렇긴 해도 ‘만약 살아 돌아온다면’이라는 문구를 덧붙임으로써 그러한 심정을 문맥사이에 감돌게 하고 있다. 바쇼는 노자라시 기행野ざらし紀行(1684)의 여행에 나설 때에도 <들판의 해골로/ 뒹구리라 다짐코 떠나 가자니/ 바람은 살을 에이는도다>라고 읊었다. 이는 자신이 여행에 쓰러져 들판에 뒹구는 해골이 되는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릴 만큼 여행에 대한 자신의 단단한 각오를 하이쿠로 읊은 것인데, 이와 같은 여행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여행을 거처로 삼는다(旅を栖とす)’이다. 여행을 거처로 삼는다는 것은 바쇼의 여행관이며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여행을 위한 여행을 떠나는 정처없는 방랑객, 나그네의 자세로 인생의 무상함 속에 여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유람의 기행과 진혼의 기행
1) 유람의 기행
「관동별곡」에는 역사와 함께 문화적 전통의 일면을 형상화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다. 관동팔경을 둘러보는 여행이 시작되는 처음 부분에 해당하는 궁예의 대궐터를 읊은 대목과 여행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대목에서 술회되는 신라 ‘사선(四仙)’에 대한 회고의 장면을 들 수 있다. 이는 역사적 면모를 시적 제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관동별곡」에 형상화된 역사성은 산수형용(山水形容)을 통한 자연 경관의 묘사에 의해 표현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표피적 양상에 불과하다. 「관동별곡」은 공간을 이동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소재로 하여, 향토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분위기의 전래 고사 및 일화 등 여정에서 접한 소재를 형상화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궁왕(弓王) 대궐(大闕)터희 오작(烏鵲)이 지지괴니 쳔고흥망(千古興亡)을 아다 몰다. 회양(淮陽) 녜 일홈이 마초아 시고 급댱유(汲長孺) 풍(風彩)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
송강은 이처럼 그 옛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에 이르러 지난날의 역사의 흥망을 되새긴다. ‘회양(淮陽)’의 지명이 ‘급장유(汲長孺)고사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자신의 의지를 형상화한 대목이다. ‘烏鵲이 지지괴’는 궁왕 대궐터와 ‘千古興亡’의 감회에서 출발하여 ‘급장유 풍채’에 스스로를 비유함으로써 善政을 기약하는 데 이르는 정서의 연계과정이 자연스럽다. 특히 ‘아다 몰다’ 의 질문에 이어 ‘마초아 시고’, ‘고텨 아니 볼 게이고’라는 함축적 표현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역사의 흔적인 ‘철원’이라는 지명이 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은 문면에 잠재되어 있는 역사의 소재가 시인의 정서에 형상화되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회양(淮陽)의 지명과 관련하여 급장유(汲長孺) 고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의 목민관으로서의 의지를 형상화하는 데 필요한 소재적 차원의 의의를 지닌다.
금난굴(金幱窟) 도라드러 총석뎡(叢石亭) 올라니 옥누(白玉楼)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공슈(工倕)의 성녕인가 귀부(鬼斧)로 다가 구야 뉵면(六面)은 므어슬 샹(象)톳턴고
고셩(高城)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三日浦) 자가니 단셔(丹書) 완연(宛然)되 션(四仙)은 어 가니 이 사흘 머믄 후(後)의 어가 머믈고 션유담(仙遊潭) 영낭호(永郎湖) 거긔나 가 잇가 청간정(清澗亭) 만경(万景台) 몃 고 안돗던고
금난굴(金幱窟)․총석뎡(叢石亭)․삼일포(三日浦)․단셔(丹書)․사션 (四仙)․션유담(仙遊潭)․영낭호(永郎湖) 등이 환기하는 이미지는, 곧 四仙으로 대표되는 신라 화랑(花郎)에 대한 회구다. 그러한 지명에 대한 것은 지봉유설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 때의 四仙은 곧, 花郎, 南郎, 永郎, 安詳이다. 이들이 함께 高城에서 놀다가 사흘이 되도록 돌아가지 않았던 까닭에 그곳의 이름을 삼일포라고 하게 되었다. 南郎은 아마도 丹書에 이른바 ‘南石行’이라고 한 그 南石이 아닌가 싶다. 이들을 일러 ‘仙’이라고 한 것은 대개 그 당시 郎徒들을 国仙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神仙은 아니다.
위의 기록의 내용처럼 금난굴(金幱窟)․총석뎡(叢石亭)․삼일포(三日浦)․션유담(仙遊潭)․영낭호(永郎湖) 등은 신라 화랑들의 유희의 장소였다. 이른바 선풍성지(仙風聖地)로 일컬어진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지명에 대한 송강의 관심은 ‘丹書 完然되 四仙은 어가니/ 이 흘 머믄 後의 어가 머믈고/ 션유담(仙遊潭) 영낭호(永郎湖) 거긔나 가 잇가/ 쳥간정(清澗亭) 만경(万景台) 몃 고 안돗던고’ 등의 표현을 통해 간절한 회구적 성격으로 드러나 있다. 그 간절한 회구의 정은 특히 仙風, 즉 花郎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명사어휘들을 나열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어가니’, ‘어가 머믈고’, ‘거긔나 가 잇가’, ‘몃 고 안돗던고’ 등의 자조적 물음의 표현들을 통해 연상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2) 진혼의 기행
오쿠노 호소미치의 여행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사원(寺院)이나 신사(神社)가 눈에 띄게 많은데, 그것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관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쿠노 호소미치에는 역사 속의 패자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부근의 정원을 관리했던 무장 사토 모토하루의 유적지는 왼쪽의 산을 따라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 이름이 이이즈카 촌 사바노라고 듣고, 물어 물어 가는 사이에 마루야마라고 하는 산에 이르렀다. 이것이 사토 저택의 유적지이다. 사람들이 마루야마의 산기슭에 성의 정문 오테몬大手門의 유적이 있다고 하길래, 그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돌아보면 이런 저런 고사를 떠올리고 회구의 눈물을 흘렸다.
佐藤庄司が旧跡は、左の山際一里斗半に有。飯塚の里鯖野と聞て尋々行に、丸山と云に尋あたる。是、庄司が旧跡也。麓に大手の跡など、人の教ゆるにまかせて、泪を落とし、
동북 지방의 와카의 명소인 시노부 마을의 모지즈리의 돌을 지나 세노우에라는 숙박역에서 바쇼는 요시츠네의 충정을 지킨 사토 모토하루의 유적지를 찾는다. 요리토모가 히라이즈미의 후지와라 야스히라를 공격했을 때 요리모토 군사와 싸우다 전사한 사토 모토하루, 비운의 영웅 요시츠네와 그의 부하로 충절을 지킨 사토 모토하루를 생각하면서 바쇼는 회구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 옛날 비운의 영웅 요시츠네가 진정 뛰어나고 정의로웠던 그의 무사들과 함께 이 다카다치 안에 굳게 버티고 장엄하게 싸웠거늘, 그 공명도 생각하면 한순간의 꿈으로 사라지고, 지금 그 유적지는 그저 무성한 풀밭으로 변해 있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여전하고/성터에는 봄이 와 풀빛이 푸르도다’ 라는 두보의 시를 떠올려 읊조리면서 삿갓을 깔고 앉아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회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름 풀이여 무사들이 공명을 꿈꾸던 자취
하얀 병꽃은 노장 가네후사의 백발이런가
偖も義臣すぐつて此城にこもり、功名一時の叢となる。国破れて山河あり、城春にして草春にし草青みたりと、笠打敷て、時のうつるまで泪を落し侍りぬ。 夏 草 や 兵 ど も が 夢 の 跡 卯 の 花 に 兼 房 み ゆ る 白 毛 か な 会 良
히라이즈미는 일찍이 요시츠네와 후지와라씨 일족(一族)의 공명, 영화(栄華)를 꿈꾸던 곳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여름 풀만이 무심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한 장면이었던 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역사적 전통의 일면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쇼의 여행의 목적 중에 일부가 우타마쿠라 탐방이듯 그 일환으로 역사의 유적지, 특히 역사상 패자의 땅을 밟고서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오백 년 세월의 흐름 가운데 인생 무상의 모습, 그리고 자연의 상징으로서 여름 풀만이 자라고 시들고, 시들고 자라는 자연의 순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히라이즈미라는 공간 안에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을 멈추어,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요시츠네와 후지와라씨에 대한 자취를 더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도큐의 집을 나와 50리쯤 가면 히와다 숙박역이 있고, 그 변두리에 아사카 산이 있다. 길 바로 근처이다. 이 주변에는 늪이 많다. 줄풀을 베는 시기도 가까우므로 어떤 풀을 줄풀이라고 하는가 싶어 이 지방 사람들에게 묻고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줄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 늪 주변을 찾아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묻기도 하면서 ‘줄풀’, ‘줄풀’ 하고 찾아 헤매는 사이에 어느새 해는 저물어서 산 능선에 걸려 있었다. 하는 수없이 니혼마츠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구로츠카 바위굴을 잠깐 보고, 후쿠시마에 가서 묵었다.
等窮が宅を出て、五里斗、桧皮の宿を離れて、あさか山有。路より近し。此あたり沼多し。かつみ刈比も、やゝ近うなれば、いづれの草を花がつみとは云ぞと、人々に尋侍れども、更知人なし。沼を尋、人にとひ、かつみかつみと尋ありきて、日は山の端にかゝりぬ。二本松より右にきれて、黒塚の岩屋一見し、福島に宿る。
이것은 우타마쿠라(歌枕)인 아사카산(浅香山) 부근의 늪지를 찾아가 ‘줄풀’을 찾는 장면이다. ‘줄풀을 베는 시기도 가까우므로’ 라는 문구는 그 옛날 사네가타(実方)가 무츠(陸奥)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해서 단오날 처마밑에 창포를 꽂게 했던 때를 연상시킨다. 그 지방에는 창포가 없어서 그 대신에 ‘줄풀’이라는 水草를 잘라 꽂게 했다는 사네가타에 관한 에피소드를 상기시키고 있다. ‘늪 주변을 찾아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고 줄풀, 줄풀’ 하고 외치고 다니는 것은 사네가타(実方)의 풍류의 심정을 기리고자 하는 것으로, 바쇼는 문장 표현 안에서 사네가타를 추모하는 마음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4. 戀君의 정과 先人 연모의 정
1) 戀君의 정
「관동별곡」의 특징은 당대의 보편적 이념 내지 윤리를 앞세워 그것을 설파하는데 시인의 주된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유람을 통해 느끼는 흥취와 그것을 가능케 한 현실적 여건을 적절히 결합하여 이를 유가 사대부적 풍류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충군애민의 이념과 개성적 풍류의 흥취를 조화시켜 이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시인의 주된 관심사가 놓여 있다.
니화(梨花) 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낙산(落山) 동반(東畔)으로 의상(義相台)예 올라 안자 일츌(日出)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니 샹운(祥雲)이 집피 동 뉵뇽(六竜)이 바퇴 동 바다 날 제 만국(万国)이 일위더니 텬듕(天中)의 티니 호발(毫髪)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 구롬 근처의 머믈셰라 시션(詩仙)은 어 가고 타(咳唾)만 나맛니 텬디간(天地間) 쟝(壮) 긔별 셔히도 셔이고
의상대의 일출 광경을 노래한 대목이다. 일출의 장관은 참신한 비유를 통해 환기되는 이미지가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장관을 흥에 겨워 ‘텬듕의 티니 호발을 혜리로다’라고 노래하면서도 ‘아마도 녈 구롬 근처의 머믈셰라’라는 이백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台)의 시구를 인용해 순간적으로 해처럼 밝은 임금의 덕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덕을 혹 누가 가리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송강이 지향하는 가치의 양면성, 즉 자연경관을 감상하더라도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쇼양강(昭陽江) 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말고 고신거국(孤臣去国)에 발(白髪)도 하도 할샤 동(東州) 밤 계오 새와 북관뎡(北寛亭)의 올나니 삼각산(三角山) 뎨일봉(第一峰)이 마면 뵈리로다
진쥬관(真珠館) 듁서루(竹西楼) 오십쳔(五十川) 린 믈이 태백산(太白山) 그림재 동(東海)로 다마가니 하리 한강(漢江)의 목멱(木覓)의 다히고져
봉(峰)마다 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디 마나 뎌 긔운 흐터내야 인걸(人傑)을 고쟈
듀야(昼夜)의 흘녀 내여 창(滄海)예 니어시니 풍운(風雲)을 언제 어더 삼일우(三日雨) 디련다 음애(陰崖)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라
쥬렴(珠簾)을 고텨 것고 옥계 (玉階) 다시 쓸며 계명셩(啓明星) 돗도록 곳초 안자 라보니 년화(白蓮花) 가지 뉘라셔 보내신고
연군의 정과 애민의 뜻을 노래한 부분들이다. 송강에게 있어서는 관동지방의 자연경관이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그 자체만의 정서를 노래하는 데 머무르지는 않는다. 산수유람을 한다는 것은 일상적 삶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있다는 것일 뿐, 오히려 산수유람을 계기로 일상에서 추구하는 사대부적 이념을 더욱 간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송강은 그것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연군 혹은 애민의 정을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과 비유를 통하여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昭陽江 린 물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三角山 第一峯이 마면 뵈리로다’, ‘하리 漢江의 木覓의 다히고져’, ‘뎌 긔운 흐터내야 人傑을 들고쟈’, ‘風雲을 언제 어더 三日雨 디려다 / 陰崖예 이온 풀을 다 살와 내여라’, ‘白蓮花 가지 뉘라셔 보내신고’ 등에서 보이는 우의적 표현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어떤 추상적 논리나 설명을 앞세우기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서술 태도를 지향함으로써 연군의 정을 은근하게 표출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관동별곡」에서 표방되고 있는 이러한 유가 사대부로서의 이념은 송강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 즉 그의 생활 이념과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송강에게 있어서 忠, 戀君이라는 이념은 그의 개성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사회윤리가 작용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先人 연모의 정
바쇼는 오쿠노 호소미치의 여행을 ‘그동안 들어보긴 했어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명소와 유적지를 찾아 돌아보고’라고 말했다. 바쇼가 이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고향 이가(伊賀)의 門人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노인(能因)․사이교(西行) 등 표박시인(漂泊詩人)들의 자취와 그들의 시심(詩心)과의 해후를 기원하는 우타마쿠라 순례(歌枕巡礼)의 여행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특히 오쿠노 호소미치의 여행이 사이교의 500주기를 염두에 두고 떠난 것과 특히 사이교를 연모하는 마음이 각별하다는 것은 사이교의 와카 및 詩情을 오쿠노 호소미치 본문에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이교 법사가 <길섶에 맑은 물/ 흐르는 버드나무/ 그 그늘 아래/ 잠시 동안이지만/ 머물러 쉬었어라>라고 읊었던 버드나무는 아시노 마을에 있는데, 지금도 논두렁에 남아 있다. 전부터 이 고을의 영주인 고호 아무개 씨가 이 버드나무를 보이고 싶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시길래, 어디쯤 있을까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이 버드나무 그늘에 찾아왔어라
논배미 하나 모 심고 떠나가는 버드나무로다.
又、清水ながるゝの柳は、葦野の里にありて、田の畔にのこる。此所の郡守、戸部某の此柳みせばや など、折々にの給ひ聞え給ふを、いづくのほどにやと思ひしを、今日此柳のかげにこそ立より侍つれ。 田 一 枚 植 て 立 去 る 柳 か な
유교 야나기(遊行柳)라 불리는 이 버드나무는 사이교가 12세기 말 당시는 험난한 변방이었던 아시노(葦野)에 수행 중에 들렀던 곳이다. 사이교가 이 버드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고서 와카를 읊었다고 하는 전설을 가진 나무로서, 바쇼는 여기에서 사이교의 詩心과 만난다. 긴 시간을 보내온 버드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생각을 읊은 것이 <논배미 하나/ 모심고 떠나가는/ 버드나무로다>의 구로, 바쇼는 사이교와 관련이 있는 곳을 방문한 것에 대한 시적 감동을 하이쿠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숙박역 옆 한쪽에 큰 밤나무 그늘을 의지해 조그만 움막을 짓고 속세를 피해 은둔해 사는 승려가 있었다. 그 옛날 사이교 법사가 <깊은 산 속의/ 바위틈에 떨어지는/ 물을 담았네/한 알 한 알 떨어지는/ 상수리를 줍듯이>라고 읊었던 깊은 산 속의 생활도 이러한 것이었던가 하고, 그 광경이 한적하게 여겨져서 가지고 있던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세상사람이 찾지 않는 꽃이여 처마 밑 밤꽃
此宿の傍に大きなる栗の木陰をたのみて、世をいとふ僧有。橡ひろう、太山もかくやと閒に覚えられて、ものに書付侍る。其詞、栗といふ文字は、西の木と書て、西方浮土に便ありと、行基菩薩の、一生、杖にも柱にも此木を用給ふとかや。
世 の 人 の 見 付 ぬ 花 や 軒 の 栗
사이교가 머물렀던 곳은 아니지만, 은둔해 사는 승려의 모습을 보고 사이교가 읊었던 와카의 그 詩心을 헤아리고 있다. 적막하고 한적한 곳에 움막을 짓고 사는 승려를 보면서 그 옛날 사이교의 ‘깊은 산 속’의 생활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바쇼가 흠모해 마지 않던 사이교의 은둔 생활도 이러했을까 짐작하면서 그 때의 情景을 상상한다. 그 情景을 <세상사람이/ 찾지 않는 꽃이여/ 처마 밑 밤꽃> 이라는 하이쿠로 읊고 있다.
다음 날 하늘이 맑게 개이고 아침 해가 찬란하게 떠오를 무렵, 기사가타로 배를 띄웠다. 우선 노인도能因島에 배를 대고, 오래 전 노인법사가 3년간 은거했다고 전해지는 유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나서 맞은 편 기슭에서 내리자, 거기에는 사이교 법사가 <기사카타의/ 활짝 핀 벚꽃은/ 파도에 묻히고/ 그 위를 저어가는/ 고기잡이배>라고 읊었던 벚나무 노목이 우뚝 서서 법사의 자취를 지금까지 남기고 있다.
기사가타여 비에 젖은 자귀꽃 서시를 보네
其朝天能晴て、朝日花やかにさし出る程に、象潟に舟をうかぶ。先、能人嶋に舟をよせて、三年幽居の跡をとぶらひ、むかふの岸に舟をあがれば、花の上こぐとよまれし桜の老木、西行法師の記念をのこす。
象 潟 や 雨 に 西 施 が ね ふ の 花
위의 인용문은 부분적이지만 오쿠노 호소미치에서 사이교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바쇼는 <기사가타여/ 비에 젖은 자귀꽃/ 서시를 보내>라고 읊고 기사가타의 강 입구 주변에서 비에 젖어 핀 자귀꽃에 기사가타의 풍경의 정감을 집중시키고 있다. 기사가타를 보면서 사이교가 <기사카타의/ 활짝 핀 벚꽃은/ 파도에 묻히고/ 그 위를 저어가는/ 고기잡이 배>라고 읊었던 것에 반해 바쇼는 위의 하이쿠를 읊은 것이다. 그것은 옛 와카의 詩情, 사이교의 詩情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기사가타의 풍광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쇼의 이러한 마음은 사이교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이전시대에 읊어졌던 와카와 현지의 풍토와의 상관관계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가가 지방과 에치젠 지방의 경계에 있는 요시자키 만의 내해를 배로 건너 시오코시 소나무를 찾았다.
밤이 새도록 폭풍에게 파도를 치게 하더니 달빛 드리운 채 물 머금고 선 시오코시 소나무 사이교
와카 시인 사이교는 이 와카 한 수로 숱하게 많은 이 곳의 경치를 다 그려내고 있다. 만약 여기에 한 마디라도 덧붙이는 이가 있다면, 장자가 말하는 ‘무용의 손가락’, 즉 다섯 개의 손가락에 손가락 하나를 덧붙이는 것과 같을 만큼 쓸데없는 짓이리라.
越前の境、吉崎の入江を舟に棹して、汐越の松を尋ぬ。 終 宵 嵐 に 波 を は こ ば せ て 月 を た れ た る 汐 越 の 松 此一首にて数景尽きたり。もし、一辨を加るものは、無用の指を立るがごとし。
바쇼는 와카의 명소인 시오코시 소나무를 방문한다. 바쇼에게 있어서는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존재는 사이교였다. 누구보다도 사이교의 영향을 깊게 받고, 누구보다도 사이교의 와카를 인용하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이교에 대해 언급한 것도 바쇼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사이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와카 한 수를 그대로 빌려 표현함으로써 묘사의 절정을 이룬다. 밀려오는 파도가 그 시오코시 소나무 가지 끝에까지 걸려서 물방울로 떨어지고, 그 물방울이 달빛에 빛나 마치 나뭇가지에 달빛이 물방울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바쇼는 와카에서 아름다운 풍경의 묘사는 이 이상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의 표현이란 실로 ‘無用의 손가락’과 같다고 한다. 사이교와 관계있는 우타마쿠라(歌枕)로서 삽입되었지만 전해져 온 사이교의 와카 한 수로 그 정경에 대한 모든 감상이 끝난다. 자기의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고 사이교가 읊은 와카로 시오코시 소나무의 주변의 정경을 충분히 다 표현하고, ‘無用의 손가락’을 은유 삼아 이 보다 더 좋은 시상의 표현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이 와카 한 수로 바쇼는 사이교와의 시의 교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5. 맺음말
관찰사로서 발령 받은 그 지방을 유람한 송강의 「관동별곡」과 전업시인으로서 여행을 떠난 바쇼의 오쿠노 호소미치를 통해 한일 양국의 두 기행문의 양상을 비교할 수 있었다. 두 나라의 동쪽 해안선을 끼고 명소라 불리는 곳을 여행한 두 작가의 시각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관동별곡」의 서사 부분에서 보이는 송강의 여행은 관찰사로서 발령 받은 임지에서 그 곳의 경관을 관망하는 것이었다. 관동팔경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며 감상한 것으로, 뛰어난 경치와 함께 연군의 정과 우국의 마음을 말하고자 한다. 임금을 걱정한다는 것은 당대 정치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송강은 여행을 한 것이다. 또한 오쿠노 호소미치의 서문을 통해 본 바쇼의 여행은 오로지 순수한 동기의 개인적인 여행이었다. 당시의 시대흐름과는 달리 정보를 위한 여행이거나, 사회적, 정치적 목적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여행자 자신의 개인적인 여행을 한 것이다. 「관동별곡」과 오쿠노 호소미치에는 역사적 대상지를 시적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관동별곡」은 옛 궁왕의 대궐터인 철원과 신라의 사선(四仙)의 유희의 장소인 금난굴, 총석정, 삼일포, 선유담, 영낭호 등의 장소를 시적 소재로 활용하여 유람의 여행을 하였고, 오쿠노 호소미치는 비운의 영웅 요시츠네와 관련된 세노우에의 숙박역에서 충절을 지킨 사토모토 하루의 유적지, 요시츠네의 허망한 자취가 서려있는 히라이즈미, 아사카산의 부근의 줄풀을 외치고 다닌 사네가타 등을 시적 소재로 활용하여 진혼의 여행을 하였다. 또한 「관동별곡」과 오쿠노 호소미치에는 그리움(戀)이라는 공통적 시각이 나타났다. 「관동별곡」에서 송강은 유가 사대부적 이념에 충실한 입장에 서서 뛰어난 자연 경치를 보더라도 결국은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충정을 읊고자 했고, 오쿠노 호소미치에서 바쇼는 시가(詩歌)에서 읊어지는 우타마쿠라의 땅을 찾아가는데, 특히 그가 가장 존경했던 와카 시인 사이교의 자취를 더듬어 가는 여행을 함으로써 눈 앞에 보이는 자연경관을 통해 옛 시인의 詩心과 해후를 시도하고 있다. 위의 두 작품은 결국 목민관으로서의 여행의 기록과 전업시인으로서의 여행의 기록이라는 차이와 함께, 유람의 기행과 진혼의 기행, 연군의 정과 先人 연모의 정이라는 한․일 기행문학의 차이의 일면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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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고 : 2001. 12. 30 ․심 사 : 2002. 1. 15 ․심사완료 : 2002. 2. 28
주 소 : (502-767)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마재마을 대주파크빌 108동 607호 전 화 : 062-530-3210 E메일 : kkyun_2000@hanmail |
첫댓글 아이구야~이 논문감을....몇 날 걸려 다볼꼬?
하이쿠 하면 바쇼 라고 한다고 하네요. 오두님이 주먹시 라고 우리이름을 부치셨던가... 좀 긴 글이지만 흥미롭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함돠. 일단은 점심 먹고요~ㅎㅎㅎㅎㅎ
혼또니 아다마가 이다이데스네 ㅎㅎ(글이 너무작아서 도저히) 두분이 사담 나누는것도 왜 이리도 궁금해지는지?ㅎㅎㅎ
비교는 한꺼번에 둘을 배울 수 있어서 좋습니다. 우리문화는 유럽문화처럼 인접국에 동화 내지는 혼재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것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올려주신 글에서 많은걸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리 쥐나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