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
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 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