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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을 다룹니다. 바울에 대한 언급은 스치듯 한 번 밖에 안 나오지만, 이 본문의 가치는 교회 역사 전체로 볼 때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한 번도 안 나오던 도시가 언급되고, 여기서 새롭고 놀라운 복음의 발판이 마련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주로 예루살렘이나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 같은 지명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오늘 완전히 새롭고 흥미로운 장소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곳은 바로 '안디옥(Antioch)'이라는 도시입니다.
성경읽기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1장 19절부터 26절까지 읽어봅시다.
19절부터 봅시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흩어진 성도들이 전한 복음
지난 시간에 우리는 스데반의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이 일어난 것을 배웠습니다.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을 때, 그 순교의 여파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대한 시련이 엄습했고, 믿는 자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핍박받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11장 19절에서 몇 군데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지도를 한 번 그려보세요. 우선 문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1세기 로마 세계가 지중해를 둘러싼 하나의 커다란 호수 같은 곳이라고 그려보세요. 지중해 주변 전체가 로마 제국입니다. 이 제국의 한쪽 구석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리고 본문은(19-20절)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세 곳, 즉 베니게(페니키아), 구브로(키프로스), 안디옥을 언급합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이 세 지역이 복음이 뻗어 나간 다음 장소였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얼떨결에 선교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위대한 선교의 부르심에 직면했던 사람들도 아니었죠. 그들의 선교적 부르심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무슨 감동적인 콜링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쳐라!"가 그들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숨 걸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면서 그들이 챙겨간 게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도망간 그곳에서도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19절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로마 제국 전역으로 흩어진 이 사람들 머릿속에는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지 이방인들, 특히 이교도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20절의 내용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첫 의도적 선교
읽어봅시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기록합니다. 거기서 복음을 들을 사람들, 즉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이름 없는 무명의 새신자들이 안디옥에 가서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이야말로 이방인들을 향한 최초의 의도적인 선교를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그 대상을 '헬라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약간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잠깐만요 목사님. 사도행전 10장에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도 있잖아요?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의 최초가 아닙니까?"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차이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고넬료는 분명 이방인이었지만, 성경과 당시 문화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리는 특별한 부류의 이방인이었습니다(행 10:2). 즉, 그는 이방인이지만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진지하게 믿고 있던 사람입니다. 비록 전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율법의 상당 부분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혈통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은 유대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곳 안디옥의 이방인 전도는 온전히 '이교도들(pagans)'을 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공경합니다"라는 바탕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이지요. 로마와 이교도 세계의 제우스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사람들, 안디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이방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의 노력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정말 가슴 뛰는 일이지요 복음이 이교도들에게도 통할지 누가 알았을까요?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를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수리아 안디옥
20절에서 언급된 "안디옥"의 역사를 잠깐 살펴봅시다.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26살 나이에 갑자기 죽자 제국을 나눠가진 장군 중 한 명인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도시입니다. 그는 약간 강박적인 나쁜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영토 내에 도시를 세우는 것을 좋아했고, 그 도시들에 자신의 아버지 이름인 '안티오코스'를 따서 짓기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려 16개 정도의 도시에 '안디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세운 수많은 안디옥 중 '수리아 안디옥' 또는 강 이름을 따서 '오론테스 강가의 안디옥'으로 더 잘 알려진 도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언급되는 곳입니다. 이곳은 당시에 매우 번영하고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도시에 대로가 깔린 건 기본이고, 고대도시로는 드물게 밤거리에 등불을 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금은 인구가 수만 명에 불과하지만, 고대 로마 세계에서 이곳은 인구 50만 명의 번화한 거대 도시이자 로마 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꼽혔다고 합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3권 2장 4절).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 떨어져 있는 이곳은 상업과 비즈니스, 세련된 문화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디옥은 극심한 타락과 부도덕으로 악명 높아서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날리스는 "오론테스 강(안디옥의 강)의 물이 티베레 강(로마의 강)으로 흘러들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로마가 안디옥처럼 타락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악하고 방탕한 곳의 대명사가 바로 안디옥이었던 것이지요.
신약 시대 도시들의 각기 다른 특징들을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이 '종교'의 도시였다면, 로마는 '권력'의 도시였고, 알렉산드리아는 '지성'의 도시였으며,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비즈니스'의 중심지이자 '부도덕'의 도시였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속으로 '그렇다면 우리 동네인 서울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어쨌든 복음이 고넬료에게 전해지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도덕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의 경우는 완전히 이교도적이고 타락한 도시에 복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21절의 위대한 결과를 보십시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어떤 사역도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의 손이 없어도 사람들을 사교 모임이나 거대한 기관으로 끌어들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오직 주의 손이 역사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21절에 그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한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회개를 묘사하는 완벽한 표현 아닐까요? 죄에서 돌이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믿음과 회개, 이 둘은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갑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가 본 하나님의 은혜
안디옥에서 일이 너무나 잘 진행되자 이어지는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흥미로운 구절은 22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소문을 듣고"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예루살렘이 마치 본부 같이 들립니다. 누군가 늘 예루살렘에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하는 것 같습니다.
안디옥의 소식이 예루살렘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견하게 되는데, 이 파송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부가 지부에 사람을 보내는 일은 언제나 양면성이 있습니다. 격려일 수도 있고 점검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안디옥에서 벌어진 일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데, 예루살렘의 관점에서 이것은 기쁜 소식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소식입니다. 바나바가 어떤 눈으로 이 공동체를 보느냐에 따라 안디옥 교회의 운명이 갈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23절이 그 답을 줍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사도행전 11:23).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여겨봅시다. 그는 안디옥의 교인들이 할례를 받았는지 보지 않습니다. 절기를 지키는지, 음식을 가리는지, 예배 형식이 예루살렘과 같은 지 점검하지 않습니다. 그가 본 것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호의, 거저 받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은혜가 본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엇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는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살아가는 모양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됩니다. 낯선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밥을 먹는 그 광경이, 바나바에게는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은혜로 보였던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를 돌아볼 만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잣대로 사람과 세상을 봅니다. 규정을 들고 간 사람은 어긋난 것부터 보고, 두려움을 안고 간 사람은 위험부터 봅니다. 바나바는 은혜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갔습니다. 24절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사도행전 11:24). 신학의 정교함이 아니라 은혜를 알아보는 이 눈이 교회를 살렸습니다.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더욱더 풍성하게 은혜의 분위기를 누리는 곳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늘 은혜의 분위기 속에 살다 보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분위기 속에 있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뼈저리게 갈망하고 환상을 품기까지 합니다.
'은혜는 좋은 날씨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날씨가 좋은 한국에 있다보면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아침에 구름이 조금만 껴도 "아, 오늘 날씨 꿀꿀하네"라고 불평하시죠. 저도 독일에서 생활해보기 전까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에 독일 날씨는 늘 우중충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날씨에 엄청나게 집착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오늘 맑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독일에서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해가 빛나고 하늘이 파랗기만 해도 흥분하고, 햇살 좋은 날이면, 시내 광장이나 교회 건물 벽에 여기저기 붙어서 일광욕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고요. 심지어 제가 다니던 학교 잔디밭은 아예 일광욕하려고 자리깔고 누운 학생들로 즐비했습니다. 휴가를 갈 때는 무조건 태양이 비치는 곳을 원했죠. 그렇게 날씨 안 좋은 동네 사람들은 좋은 날씨에 대한 판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요? 그 안에 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없을 때는 미친 듯이 갈망합니다. 우리가 교회, 가정, 사회에서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누리는 은혜는 어떤 것일까요?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안디옥의 성도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놀라워서 23절에 바나바는 그들을 권면합니다. ‘내가 와서 너희를 가르치고, 교정하겠다’고 하지 않고, 그저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라”고 격려합니다. 그 결과 24절은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건강했고 활력이 넘쳤으며, 은혜의 분위기가 충만했습니다. 이걸 읽으면서 은혜는 자석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
상황이 너무나 폭발적으로 성장하다 보니, 바나바(위로의 아들)는 아마 일종의 번아웃이 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저는 바나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주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점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어쩌면 바나바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안디옥에서 일이 이렇게 은혜롭게 잘 되고 있는데, 예루살렘 본부 사람들이 와서 일을 꼬이게 둘 순 없어!" 어쨌든 바나바는 저 멀리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도움을 구하러 가지 않고, '다소'라는 곳을 떠올립니다(약 220-240 Km). "몇 년 전 극적으로 회심하고 즉시 복음을 전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지. 그는 하나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향했습니다. 안디옥에서의 엄청난 사역에 지치고 압도당한 바나바가 사울을 떠올린 것입니다. 원어의 느낌을 살리면, 바나바는 다소에서 사울을 그야말로 '이 잡듯 샅샅이 뒤져서' 찾아냈습니다. 전단지를 돌리듯 쉽게 찾은 게 아닙니다. 이 사역을 위해 그가 꼭 필요했기에 헌신적으로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라고 말합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저는 사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가르치던 그 위대한 1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완전히 이교적인 낯선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거리를 걸으면 타락과 쾌락, 도덕적 더러움에 충격을 받지만, 그 한가운데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변화시키는 능력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사울(바울)은 다소에서 약 12년 정도의 조용한 준비 기간을 보냈습니다. 어쩌면, 그의 전적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당국이 그를 피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10여년이 흐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그 세월을 결코 낭비된 시간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미래의 사역을 위해 다듬어지는 시간이었고, 마침내 안디옥으로 와서 세상을 뒤흔들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디옥은 수많은 위대한 설교자들을 배출하는 중심지가 됩니다. 바나바, 바울, 베드로를 비롯해 2~4세기에 걸쳐 이그나티우스, 크리소스토무스 등 기독교 역사상 놀라운 설교자들이 이 도시에서 배출됩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공식적인 강단 사역' 이면에는, 성도들의 생생한 '비공식적인 전도 사역'이 활발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의 전도가 종종 가장 위대한 설교이고 선교입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우리 모두가 유창한 달변가나 성경 지식의 대가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 멀리 오지로 떠나지 못해도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내 삶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고 입술과 삶으로 전할 수 있으면 됩니다. 건강하고 강력한 교회는 이 두 기둥 위에 세워집니다. 견고한 '공식적인 말씀 사역'과 성도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역동적인 '비공식적 전도'입니다.....
CBS성서학당 “그 길 위의 바울”: 최주훈 목사
제2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탄생
사도행전 11:19-30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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