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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2년 10월 4일 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좋은 몫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접하게 되면, 그 사건이나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나 흐름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 결과에 집착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문제를 삼거나 판단을 하거나 시비를 가리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과정이나 흐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학적, 논리적 사고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추나 추리에 대하여 탐정처럼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그런 것에 대하여 학습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수학이나 논리학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다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수학적 사고나 논리적, 철학적 사고를 전보다 덜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답형이거나 객관식에 익숙해져 있고, 그렇게 정답에 집착해서 족집게 과외나 족집게 학원을 더 선호하고, 열심히 문제를 대입해서 차근차근 풀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논리적, 수학적, 철학적 성향은 뇌 세포의 생성과 관계가 있는지 완만한 이차방정식 곡선을 그리다가 나이가 들어 뇌세포가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급격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고 점차 무너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치매도 생기고, 건망증도 심해지고, 기억력도 빠른 속도로 감소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금방 한 약속도 잊어버리고, 금방 한 말도 잊어버립니다. 어떤 때는 내 전화번호도 잊고, 엉뚱한 곳에 전화하기도 하고, 전화번호를 찾아서 걸다가 다시 잊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도 싫어집니다. 그냥 아주 단순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단순성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복잡한 데서 벗어나 단순하게 살고 싶은 것이 욕심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건강에 좋다고 의사들은 충고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고스톱이라도 쳐야 머리가 굳지 않는다고, 머리를 녹슬지 않도록 신경 써서 살아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몫’이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사건과 상황의 결과만을 가지고 급히 판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문제와 오늘 복음의 말씀은 곧잘 교회와 가정에서 그 ‘몫’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하고 비유를 들어서 얘기하기도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마르타의 입장이 되고, 마리아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은 마르타이고, 누구는 마리아’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나도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좋지 않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마리아의 몫을 선택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조금은 편안하고, 바쁘게 일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자리에 있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항상 붙어 있는 그런 자리가 욕심나고, 좋을 것입니다. 손님접대를 위해서 음식을 마련하는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고, 귀찮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 편을 드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기도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과 손님을 초대하고 모신 것은 마르타였고, 일하는데도 너무 손이 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상황에 대하여 예수님께 푸념을 늘어놓은 것이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놓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몫은 예수님과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마리아처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그 발치와 곁에 붙어서 사랑하는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고, 눈길을 마주하고, 말씀을 듣고, 품에 파고들고, 억센 팔로 안아주시기를 기다리는 마리아처럼 사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일할 때도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일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좋지 않은 경제 상황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건 마르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타처럼 그렇게 살아도 매순간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하고, 좋은 몫을 선택하고 그 좋은 몫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언제나 일에 매달리고, 의식주에 매달리고, 억지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 마리아의 좋은 몫을 차지하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만 생각하지 말고 먼 안목에서 마리아의 좋은 몫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일할 때는 마르타와 같이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 마르타의 몫도 그 때는 좋은 몫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3-24
형제 여러분,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여러 교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한때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한때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하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24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축일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Francis)
신분 : 부제, 설립자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81/1182?-1226년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done)와 프랑스인 어머니 피카 드 브를레몽(Pica de Bourlemon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사업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요한(Giovanni)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사업상의 이유 등으로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 사람’이란 뜻의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Perugia) 간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두 도시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여전히 기사가 될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1205년에 브리엔네(Brienne)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들었는데,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 나온 그는 120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나병 환자를 만나 입맞춤을 한 후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했다. 이를 안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길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응하며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어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는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본격적으로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기도와 노동을 하며 극도의 가난 생활을 실천했다. 1209년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길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 회칙이 너무 엄격하다 여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성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장면을 꿈에서 본 후 1210년 마침내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그리고 극도의 가난을 살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11명의 동료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의 사명까지 주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했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지원자가 늘어 여러 곳에 분원이 생겼다. 그만큼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212년 아시시의 명문가 출신인 성녀 클라라(Clara)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현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부터 프란치스코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해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몇 개의 관구가 형성되었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성 프란치스코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와 순교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알 카밀(Al-Kamil)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에 대한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회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회칙을 보완해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인준을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길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五傷)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그의 일생 내내 계속되면서 동시에 심한 육체적 고통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찬가’를 지어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1226년 9월 병세가 깊어진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한 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의 주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도 채 되지 않은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 형제가 그를 기념해 지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곳곳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제3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 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성 프란치스코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프란치스코 형제들과 형제회, 클라라 수도회, 재속 3회 회원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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