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2장 제물론(齊物論) 18절
[본문]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물건을 다 같이 그러하다고 여기는 근거를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알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그렇다면 물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시다는 것입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그렇지만 시험삼아 거기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하자. 내가 말하는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그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말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그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내 너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나고 몸이 말라 죽게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 위에 서는 사람은 두려워 벌벌 떠는데 원숭이들도 그러한가? 이 세 가지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몸 두는 곳을 알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소⋅양과 개⋅돼지를 잡아먹고, 고라니와 사슴은 부드러운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잘 먹고, 솔개와 까마귀는 쥐를 좋아한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 것인가?
원숭이는 편저(猵狙)에게 암컷이 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를 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어울려 논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를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를 보면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와 사슴은 그를 보면 후닥닥 달아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것인가?
내가 보건대 어짊과 의로움의 기준이나 옳고 그른 방향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내 어찌 그 분별을 알 수가 있겠는가?
[해설]
이번 17절에는 제물론(齊物論)을 제대로 알기 위한 인식론(認識論)과 가치론(價値論)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17절은 설결이라는 제자가 왕예라는 스승에게 질문을 하고, 왕예가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건을 다 같이 그러하다고 여기는 근거”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만물이 가지런하다고 주장(齊物論)하는 근거’를 묻는 물음이다. 여기서 ‘물건’은 존재론적으로 확대하면 ‘만물’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러하다’는 것은 만물이 ‘존재’라는 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에게 그 근거를 아십니까? 라고 묻는데, 스승은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제자는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이 알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서 인식론적 물음이 된다. 인식론은 앎이 무엇인지, 그리고 안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이다. 이것에 대해 스승은 다시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라고 답하면서 오히려 제자에게 부가의문문 형식을 빌어 대답을 한다.
스승은 여러 가지로 예를 들면서, 올바른 몸두기, 올바른 맛, 올바른 어울려 놀기, 올바른 아름다움, 올바른 어짊과 의로움을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때 예를 든 것들은 가치론과 관련된다. 즉 이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가치적인지에 대한 물음들이다.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가치적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치론은 주체가 대상의 값(값어치)을 매기는 기준에 대한 이론이다. 장자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주체마다 그 값을 다르게 매기는 점을 예로 들면서 대상의 값은 일정치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대상이 일정한 값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그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믿고 있다. 장자는 이번 17절에서 이에 대한 믿음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면 가치관이 바뀌게 되고 인생관이 바뀌게 된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진다. 제물론은 만물에 대한 평가기준이 만들어진 지금까지의 관습에 강한 의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만물은 과연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평가기준에 따른 차별이 있는 것인가?
노자 『도덕경』 22장
[본문]
굽은 못생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잘 베어지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살아간다. 그런데 굽어야 펼 수 있고, 우묵해야 채워지고, 낡아야 새로워지고, 적어야 얻어지고, 많아야 헷갈려 잃게 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상반되는 것까지 껴안아서 하나로 보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스스로 임할 수 있는 관점을 세상살이의 표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밝게 드러나고, 자신을 옳다고 여기지 않아 자신의 옳음이 빛나게 되며, 자신의 공적이라 여기지 않아 공이 있게 되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아 조직의 장이 된다.
성인은 오직 다투지 않는 까닭에 세상이 그와 다투지 않는 것이다. 굽은 못생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잘 베어지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살아간다는 옛말이 어찌 헛된 빈말이겠는가? 상반된 개념을 둘로 보지 않고 진실로 그 전체를 보아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할 수 있으면 온전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해설]
굽은 못생긴 나무는 사회적으로 못난 사람을 의미하고, 곧은 잘생긴 나무는 잘난 사람을 의미한다. 못난 사람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있는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고, 잘난 사람은 가치있는 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가치있는 것들을 소유한 잘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치있는 것들로 생각하는 것은 출세성공이며, 이때의 출세성공은 재력과 권력을 지니는 것이며, 지위와 명예를 높이는 것이다.
노자는 ‘굽은 못생긴 나무가 오래산다’는 옛말을 비유로 하면서, 못난 사람의 자리에 스스로 임하는 것이 더 좋다는 가치관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상반되는 것(굽고 폄, 우묵과 채움, 낡음과 새로움, 적음과 얻음, 많음과 잃음)까지 껴안아서 하나의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할 수 있으면 다툼이 없으면서 자연스럽게 높은 곳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강의 예고〉
▪584회(2024.09.24) : 장자 해설(27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585회(2024.10.01) : 장자 해설(28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