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화이트 와인과 싱싱한 굴 한 상자. 199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도시 캉(Caen)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 두 가지로 행복했다.
평소 10프랑(당시 한화 1500원)짜리 와인만 마시던 가난한 유학생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라 큰 맘 먹고 30프랑짜리를 고른 덕분이었을까. 굴과 함께 마셨던 그 와인(이름은 기억 못해도)을 지금도 최고의 와인으로 추억한다.
다시 송년회의 계절. '죽자고 마시는' 술이 아닌 와인이 여기저기 각광받는 때다. 와인 좀 마셨을 법한 이들은 어떤 와인을 마실까. 프랑스에서 6년 간 유학했던 김이석 동의대 영화학과 교수한테 물었더니 "격식 차리는 게 싫어서 프랑스에서도 보드카만 마셨다"는 답이 돌아왔다. '격식'보다는 '취향'을 드러낸 답변. 그러나 정말 '격식' 때문에 와인이 부담스러운 이들이 있다면 와인이 억울할 수도 있다.
부산대 평생교육원 와인아카데미 강사 박경아(부산대 앞 와인숍 바인 대표) 씨는 "와인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술이고, 알고 마시면 더 좋은 술"이라고 말했다.
■계절 안주와 즐기는 와인생선회나 해산물 안주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린다. 제철인 굴과 특히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는 프랑스 샤블리 지역에서 생산되는 샤르도네(품종) 100% 와인 '샤블리'가 있다. 산도가 좋고 풍미도 뛰어나 해산물의 비릿한 맛을 잘 잡아 주기 때문이다.
계절 안주와 어울리는 와인
샤르도네 100% '샤블리'
산도 좋고 풍미 뛰어나
겨울 별미 굴과 찰떡 궁합김장철 김장김치와 수육이 안주라면 보졸레 누보도 권할 만하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부르고뉴 보졸레 지역에서 해마다 9월 초 수확한 포도를 4~6주 숙성시킨 뒤 11월 셋째 주 목요일부터 출시하는 와인. 산도가 좋고 향도 풍부하다. 올해 코리아와인챌린지에서 전국 소믈리에들이 프랑스 와인 중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가장 맞다고 선택한 '샤토 그랑 아보르'(레드 와인)도 수육과 잘 어울린다.
박 강사는 "와인이 알고 보면 양념이 과하지 않는 제철 음식과 잘 어울리는 술"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와는 스위트 와인이 어울린다. 단맛끼리 뜻밖의 조화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피노 누아르 품종의 독일 와인 '모젤'과 이탈리아 와인 '모스카토 다스티'가 권할 만하고, 레드 와인으로는 스페인 와인 '산타클로스 데 토리바스' 등이 있다. 병이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인 '모젤'은 LED 조명이 붙어 있어 다 마신 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쓸 수도 있다.
■ 송년회 의미를 더하는 와인
스토리텔링으로 의미를 더하는 와인도 있다. '화합과 연대'를 강조하고 싶은 자리라면 18가지 품종의 포도로 만든 프랑스 와인 '샤토네프 디 파프'를 권할 만하다. 18가지나 되는 품종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좋은 와인이라 결혼 선물로도 인기다.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와인
伊 '모스카토 다스티'
달콤한 케이크와 잘 맞아
LED 붙은 '모젤'도 인기프랑스 부르고뉴 와인 '지브리-샹베르탱'은 한국인 박재화 씨 부부가 루디몽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으로 이름나 있다. 프랑스 와인이지만 독특하게 라벨에 천(天) 지(地) 인(人)이란 한자가 들어가 있다. 하늘과 땅 사람의 기운이 골고루 들어가 빚어진 와인이라는 의미다. 로마 새해의 신 이름을 딴 호주 와인 '아나페르나'는 각오를 다지는 신년회에 제격이다.
■ 와인, 알고 마시면 더 좋은 술
와인 도수는 5.5~15도까지 다양하다. 스파클링 와인도 9~14도가량 되고 레드 와인은 12~15도다.
기포 있는 스파클링 와인은 샴페인과 샴페인 아닌 스파클링 와인으로 나뉜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만들어진 스파클링 와인을 뜻한다. 그외 스파클링 와인은 생산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 언어로 다르게 부른다. 프랑스는 샴페인을 제외한 스파클링 와인을 크레망(Cremant)이라고 하고, 스페인은 카바(Cava), 이탈리아는 스푸만테(Spumante), 독일은 젝트(Sek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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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알고 마시면 더 좋은 술이다. 사진은 부산대 앞 와인숍 바인. 와인샵 바인 제공 |
박 강사는 "와인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술"이라고 했다. 천천히 마시면서 향을 즐기면 된다. 알면 알수록 더 잘 마실 수 있는 술이기도 하다. 와인을 알아가다 보면 그 나라 문화와 역사도 알게 된다. 와인아카데미, 와인과 인문학을 연결한 강좌가 많은 이유다.
글·사진=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