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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국 (왕상 1:1-11:43)
1. 다윗의 말년 다윗의 말년을 소개하는 것을 필두로 열왕기서는 시작한다. 다윗이 나이가 들자 이불을 덮어도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없어 신하들이 젊은 여인을 그의 품으로 보낸다. 수넴여자 아비삭은 다윗의 잠자리를 돌보고 그를 따뜻하게 했으나 동침은 안한 것으로 전해진다(왕상 1:1-4). 젊은 여인의 정기가 다윗의 기(氣)을 보존해준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사람의 정기가 동남(童男) 혹은 동녀(童女)의 배꼽 부분에 가장 많이 스며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그 기는 성적 교제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접촉과 마찰로 전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포천에 살았던 백인웅이라는 사람은 평생동안 14-15세 되는 여종만을 골라 꼭 동침했다고 한다. 1-2년 마다 젊은 여자로 갈아치우면서 90이 넘도록 장수했다 한다. 그러나 소녀와의 육체접촉에서 일어나는 행음(行淫)은 오히려 몇곱의 해가 된다고 하여 금기시 되었다. 다윗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하겠다. 2.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대결 다윗의 기력이 쇠하자 아도니야가 왕위를 노리면서 일대 정쟁의 회호리 바람이 분다. 다윗의 첩 학깃에게서 난 네번째 아들인 아도니야는 압살롬이 죽자<그림:압살롬의 무덤> 자신이 왕이 될것이라 여기고 반란을 일으킨다. 아도니야를 지지한 사람은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이었다. 요압은 제사장 아비아달과 공모하여 아도니야를 왕으로 삼고자 지지하는 세력과 함께 에느로겔 근처로 모인다. 그러나 솔로몬과 그를 지지하는 제사장 사독, 그리고 선지자 나단은 초청되지 않았다. 요압의 정치적 적수였던 브나야도 당연히 없었다(왕상 1:5-10).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선지자 나단은 밧세바에게 잽싸게 고한다. 밧세바와 나단은 함께 다윗을 설득하기로 하고 먼저 밧세바가 다윗을 찾아간다. 밧세바는 다윗에게 이전에 약속한 대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라고 재촉한다. 밧세바가 다윗을 재촉하고 있는 사이 미리 계획된 대로 나단이 다윗을 찾아가 아도니야의 반역을 고하고 솔로몬을 세울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를 맹세한다(1:11-31). 여기서 우리는 잠시 밧세바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이 이전에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로 언약했다는 것이다(왕상 1:30). 그런데 사무엘하에 나오는 다윗의 행적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역대기서가 이를 보충하고 있다. 역대상 22장은 성전건축과 관련하여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성전을 짓도록 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하가 끝날 때 까지 다윗의 성전건축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바로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신명기사가에 의해 기록된 역사서에 성전건축에 대한 문제와 솔로몬의 왕위계승에 대한 이야기가 누락된 것을 발견한 역대기 저자가 이를 보충한 것이라 여겨진다. 역대기사가(Cronicler's Historian)에 의하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단다. 그래서 야훼는 그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할 것이라고 다짐하신다(대상 22:6-19). 솔로몬의 왕위계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역대기사가에 의해 보충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는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 빠진 부분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부분이 제사장 계열의 후기 유다인에 의해 첨가되었다고 말한다. 3. 왕이 된 솔로몬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브나야를 불러 예루살렘 근처의 기혼계곡에서 솔로몬을 왕으로 삼게한다. 선지자 나단은 제사장 사독과 함께 솔로몬을 왕으로 기름붓는다(1:32-39). 궁중예언자인 나단은 제사장 사독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밧세바와 연합하여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한다. 솔로몬이 왕으로 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도니야는 겁에 질려 제단의 뿔을 잡고 살려달고 애원한다(1:50). 도피성제도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무고한 죄명을 뒤집어쓸 때 제단의 뿔 곁으로 피신하면 사면해주는 관습이 있었다(출 21:13-14). 솔로몬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아도니야를 살려준다. 반면에 요압은 제단의 뿔을 잡고 살려달라고 했지만 결국 처형당한다. 2:34). 이로써 솔로몬은 자기의 정적을 물리치고 왕위를 잇는다. 그동안 다윗을 보필하면서 다윗왕권의 중추적 역할을 한 요압은 다윗 말년에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다 도리어 역습을 당한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왕상 2:1-9). 여기서도 신명기사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표출된다. 야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실을 바르게 하면 무엇이든지 형통할 것이란다(2:3). 정적(政敵)을 제거한 솔로몬은 왕권을 굳건히 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다윗이 살아생전에 반역을 일으킨 아도니야를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를 살려두면 화근이 될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도니야가 걸려든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덕택으로 근신해야할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와서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달라는 청을 한다(2:13-18). 부친 다윗의 후궁이었던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는 아도니야의 의도를 눈치챈 솔로몬은 브나야를 시켜 그를 살해한다(2:19-25). 압살롬도 다윗의 후궁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획득하려는 음모를 꾸민적이 있는 것을 볼 때(삼하 16:21), 아도니야도 다윗의 후궁을 취함으로써 자기세력의 건재함을 과시하려 한 것 같다. 두번째 제거 대상은 제사장 아비아달이었다. 아비아달은 엘리가문의 후손이자 아히멜렉의 아들이었다. 사울이 아히멜렉의 후손을 몰살하려 했을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다윗에게 피신했던 사람이다. 이 후 다윗과 동고동락하면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다가 말년에 다윗을 배반한 것이다. 다윗을 보필한 댓가로 목숨을 건진 아비아달은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하고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아나돗으로 유폐된다(2:26; 비교. 렘 1:1). 아비아달 대신 그동안 열세에 있던 사독이 제사장이 됨으로써 솔로몬 왕가의 종교지도자로 부상한다. 그동안 다윗을 도와 다윗왕권을 튼튼하게 해준 공로자였던 요압장군 역시 아도니야 편에 섬으로써 죽임을 당한다. 요압의 과거 공로가 인정되지 않은 것은 우선 병권을 쥐고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점과, 다윗의 말년에 안하무인격인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왕을 업신 여긴 결과라 여겨진다(왕상 2:28-33). 요압을 죽인 브나야가 군대장관으로 임명되고 솔로몬 왕국은 명실공히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었다. 단지 다윗의 심중을 읽은 나단 선지자만 살아 남지만 솔로몬이 왕위에 있는 동안 그의 활약은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가부장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연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 아비아달과 요압장군이 아도니아 편에 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단과 밧세바와의 결탁으로 솔로몬이 왕이 되었으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반란이다. 그러나 신명기사가는 다윗왕통을 이은 솔로몬을 더 옹호하고 있고 아도니야가 반역자로 몰린다.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솔로몬은 어찌 보면 행운아다. 조선을 세운 이태조는 자기가 사랑하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들인 방석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방원의 반대에 부딪친다. 조선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방원은 이복동생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부왕에게 반감을 갖게되고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부친과 자기를 도와 조선건국에 앞장섰던 정도전 역시 방석을 앞세운 댓가로 방원에게 살해당한다. 방원은 혁명에 성공하고 조선의 3대왕인 태종이 된다. 솔로몬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나이 어린 솔로몬, 그것도 다윗과 밧세바와의 불륜에 의해 태어난 정통성이 약한 왕자가 아닌가? 어쨋든 솔로몬은 전권을 장악하고 이집트왕 파라오의 딸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는다(왕상 3:1). 당시 이집트 왕은 국력이 쇠약한 때인 21왕조(1070-945 B.C.E.)의 한 왕으로 여겨진다. 이제 솔로몬이 행한 외국여자와의 결혼정책이 시작되는 셈이다. [지도: 솔로몬 시대의 팔레스틴] 4. 지혜를 구한 솔로몬 지혜로운 왕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착공되기 전이라 솔로몬은 산당(山堂)에 올라가 야훼께 분향했다. 산당(바마)은 가나안의 전형적인 지방성소로서 원주민들의 종교중심지였다. 그들은 그곳에 각종 신상을 모셔놓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산 언덕에 자리잡은 산당에서 때때로 조상들을 위한 예배가 거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솔로몬 역시 산당을 찾은 것은 야훼 신앙과 가나안의 종교가 산당을 중심으로 혼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훗날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제일 먼저 산당을 부숨으로써 야훼종교가 다른 종교와 혼합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왕하 18:4; 23:5).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의 번제를 드리자, 야훼께서 꿈에 현몽하여 솔로몬에게 소원을 묻는다(왕상 3:3-5). 솔로몬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까지 주신다(3:6-13). 솔로몬은 대신 야훼의 법도와 명령을 지켜야 한다(3:14). 예로부터 꿈은 신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다(민 12:6; 삼상 28:6).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꿈에 신이 나타나 직접적으로 계시하는가 하면, 때론 사람이 성전이나 제단에서 잠을 자면서 꿈을 청해 신의 뜻을 받기도 한다. 솔로몬의 경우 자신이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잠을 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솔로몬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잠을 청한 것이리라. 이런 식으로 신의 뜻을 얻는 방식을 종교학 용어로 '인큐베이션 오네이로망시'(incubation oneioromancy)라 한다.
[그림: 가나안의 산당에서 발견된 돌기둥-2,000-1,000 BC]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두 창기가 동시에 아들을 낳았는데 한 창기가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를 깔아 뭉게 죽이고 다른 창기의 아이를 훔친 사건이 발생한다. 자고 일어나 자기 아이가 다른 창기에게 있는 사실을 알고 아이의 엄마가 왕에게 가서 판결을 요구한다.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자 왕은 칼을 가져오라 하여 아이를 두 동강내어 반반씩 나누어 가지라고 명한다. 아이의 진짜 엄마가 자기 아이를 살리려고 다른 여인에게 내어주자 왕은 양보한 여인이 아이의 진짜 엄마라고 판시한다(3:16-28). 이로써 솔로몬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고 심지어는 시바의 여왕이 그의 지혜를 직접 시험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내려온 사건까지 전해진다(왕상 10:1-13). 솔로몬의 지혜를 찬양하는 성서기자 역시 솔로몬이 삼천가지의 잠언(proverbs)을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32).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솔로몬의 행적중에 '지혜로운 판결'외에 그가 이스라엘을 지혜롭게 다스렸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는 다윗이 남겨준 부(富)로 성전과 궁전을 지었다. 그 과정에서 재정적인 압박을 받자 다윗이 점령한 영토 일부를 두로(페니키아)에게 양도하는가 하면(왕하 9:11), 백성들에게 세금징수를 독려했으며 강제노역을 부과했다(5:13; 10:14). 솔로몬 왕에 얽힌 지혜로운 판결도 그것이 솔로몬 자신의 것인지 의심받고 있다. 이야기 내용에 단 한번도 솔로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왕'이라는 일반적인 칭호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세계도처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널려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다. 지혜로운 원님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여자가 아이를 안고 마당에 있는데, 어떤 모르는 여자가 와서 아이를 안아보자고 한다. 아이를 건네주었더니 갑자기 돌변하여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우겨댄다. 다급한 나머지 원님을 찾아가서 자기 아이를 돌려달라고 하소연한다. 원님은 아이를 가운데 놓고 두 여자 더러 서로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게 한다. 아이가 끌려가는 쪽이 진짜 엄마란다. 아이의 친 엄마는 차마 아이를 잡아당길 수 없어 아이 쪽으로 질질 끌려가는 것을 본 원님은 그 여자가 진짜 엄마라고 판시한다. 비록 형태는 약간 다르지만 성서이야기와 거의 대동소이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지혜로운 판결 이야기는 다윗왕가를 옹호하는 후대의 사가들이 솔로몬의 치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첨가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결코 지혜로운 왕이 아니었으며 결국 다윗의 통일왕국이 분할되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을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난 왕'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솔로몬의 성전건축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유역에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으며 주변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한다(왕상 4:21). 이것이 솔로몬을 소개하는 성서기자의 변명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윗과 달리 영토를 확장하는 전쟁을 수행하지도 않았고 주변국 역시 이스라엘의 속국이라기 보다는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솔로몬의 일일 식사에 소요되는 음식이 밀가루 삼십석, 살진 소 열마리, 그리고 수사슴과 암사슴 등을 비롯한 노루와 각종 새들로 가득찼다니 그의 사치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4:21-25). 솔로몬의 기마병이 12,000이요 외양간만 해도 40,000개나 있었다고 하니 군사력 역시 가히 제국에 버금가는 규모였다(4:26-28). 당시 팔레스타인을 위협하는 외부침략이 없었다. 그 결과 솔로몬은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5:4). 솔로몬은 다윗이 남긴 부로 영화를 누린 것이다.
[그림설명: 가나안 도시 하솔에서 발견된 송아지 상. 후기청동기(1550-1 200 B.C.E.) 것으로 보이는 청동 송아지 상은 사마리아 북단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바알의 상징이다. BAR- 83-5-39]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두로 (페니키아)<그림-도기: 10BC>의 왕 히람은 그에게 부하를 보내어 문안한다. 솔로몬은 히람에게 성전을 지을 백향목을 수입하기로 하고 그와 계약을 체결한다(5:1-12). 이로 인해 백성들은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레바논에까지 원정하여 그곳에서 한 달씩 체류하면서 나무를 옮기는 일을 하였다(5:13-14). 히람의 건축기술자들이 예루살렘에 파견되어 성전건축을 담당함으로써 가나안의 바알종교가 예루살렘에 유입되는 통로를 열기도 했다(5:18). 예루살렘의 성전은 성전뜰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거의 유사한 건축물이 갈릴리 지방에 있는 가나안의 하솔 지역에 설립된 사실이 최근에 발견되었으며,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양식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림-왕궁건축구조물> 성전 마당에는 제의에 사용되는 물(聖水)을 저장하는 물탱크(바다)가 있었는데 12마리의 황소가 그것을 떠받치고 있었다(왕상 7:23-25). 바알의 상징인 송아지상(像)이 솔로몬의 성전에 있는 것은 여로보암이 송아지상을 만들고 야훼라고 소개하는 것과 유사하다(왕상 12:25-33).
[지도: 솔로몬의 무역로] 성전건축과 더불어 솔로몬은 왕궁을 짓기 위해 13년을 할애한다(왕상 7:1). 왕궁 역시 두로의 히람이 맡아 건축하였으며, 그 안에 아내로 맞은 파라오의 딸이 거할 거처를 마련하였다(7:1-51). 솔로몬의 궁전에 사자상이 새겨진 것을 볼 때(7:36), 가나안의 종교가 유입된 흔적을 보여준다. 여신 아세라는 흔히 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이것과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다윗성의 장막에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긴다. 법궤는 야훼의 율법이 담긴 두 돌판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출 25:21; 신 10:2; 왕상 8:9), 때론 야훼의 빈 옥좌로 인식되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이 법궤는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그룹(천사)들의 날개 바로 아래에 안치되었다(8:6). 두 개의 그룹들이 지성소의 측면을 옹호하고 있어 계약궤를 보호한다. 고대 근동에 퍼져 있는 다른 종교의 성전에는 지성소안에 여러 신상(神像)이 모셔졌는데 이스라엘의 경우는 신상대신 하나님의 법궤가 자리잡은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 두로의 무역활동로(주전 10-7세기)]
. [그림: 가나안 도시 우가릿에서 발견된 아스다롯 여신상. 후대에 접어들어 아세라 여신과 동일시되었던 풍요의 여신 아스다롯의 양쪽에 뱀이 있으며 사자를 밟고 있다. BAR-83-5-65]
6. 솔로몬의 타락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시바의 여왕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오면서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온다(왕상 10:1-13). 솔로몬은 다윗과는 달리 건축사업에 충당하기 위해 외국인 뿐만 아니라 내국인에게도 힘겨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노역을 강요했다(10:14). 부역은 성전과 왕궁 뿐만 아니라 하솔, 므깃도, 게셀등지의 요새를 증축하는데 활용되었다(9:15). 외국으로부터 금을 수입하여 왕궁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상아로 된 보좌를 만들고 은을 마치 돌처럼 냵다고 성서는 증언한다(10:27). 솔로몬의 대외무역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집트에서 말을 수입하여 히타이트(헷)와 아람 사람에게 팔았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야훼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10:26-11:1). 외국에서 온 솔로몬의 아내들은 자기들의 신을 섬겼는데,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 암몬의 밀곰과 몰록, 모압의 그모스 신(神)들이 합법적으로 솔로몬의 왕궁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11;2-8). 솔로몬이 나이들어 실정(失政)을 계속하고 이방 여인들의 종교적 혼탁이 야훼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다. 급기야 솔로몬은 타도대상이 된다. 솔로몬에 항거한 사람중에 르손은 다메섹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위협하기도 했다(11:23-25). 결정적인 반란은 여로보암에 의해 주도된다. 솔로몬 휘하에서 건축사업의 감독을 맡았던 여로보암은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에게 북쪽 10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11:26-39).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하자 그는 이집트로 피신하여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다시 이스라엘로 귀환하여 북쪽의 왕이 된다. 이로써 솔로몬 시대(966-927 B.C.E)는 끝나고,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연합하는 유다왕국과 북쪽의 10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할되어 200년 동안 대치한다.
7. 맺음말 솔로몬 왕국은 외부의 심각한 침략이 없었던 평화스러운 때에 부와 영화를 누렸다. 다윗의 확장정책이 솔로몬에게 와서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처음과는 달리 야훼신앙에 대한 열정과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백성들은 솔로몬의 이중적 압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국내에 남아서 세금을 내야 했으며, 동시에 건축사업을 위한 노역을 제공해야 했다. 부역하자니 세금을 낼 수 없고, 세금을 내자니 부역의 의무를 감당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민심은 극도로 이완되고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었다. 말년에 이스라엘의 10지파가 떨어져 나가고 백성들은 반란을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그들을 진압할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모습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솔로몬이 내실을 기하고 다윗이 이룩한 부를 지켰다면 이스라엘은 근동의 강자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뒤로 돌아가지 않는 법! 우리는 솔로몬의 과오를 보면서 더 이상 그를 현자(賢者)라고 칭찬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용두사미로 끝난 솔로몬의 행적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으로서의 우리나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한반도 주변국은 자국의 안정에 주력하고 있다. 힘의 공백기에 접어든 한반도는 우리 힘으로 통일을 이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소위 '강대국'들이 자국의 안정을 이룩한 뒤에는 우리의 땅을 다시 노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고대 근동의 정치적인 공백기에 내실화를 기하지 못하고 성전과 왕궁을 짓는데 국력을 탕진함으로써 결국 나라가 갈라지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