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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 편지를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마술사
◆천원 오천원 지폐의 비애
“띠- 지르르-르르- 띠-띠- 철커덕-!!” 은행이나 우체국 농협 관공서 등에 설치되어 있는 ‘자동입출금기계’가 천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를 뱉어내는 소리입니다.
이곳이 산골마을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원주 시내에 있는 것들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하네요.
기계가 확인하고 수납하는 현금 지폐의 최하 하한선이 어느 사이엔가 ‘만원’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기계 옆구리에 쪽지 안내문이 붙어 있네요. “천원 지폐와 오천 원 지폐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안쪽 직원창구를 이용해 주세요.”
아직까지도 천원, 오천원이 작은 돈이 아닌 이들은 심기가 불편해지는데 이에 대하여서 관계자들은-
천원 지폐의 경우 장수가 많아지면 수십 번씩 계속 넣어야 하고 그때마다 기계가 작동을 하여야 하는데 기계에 무리가 올 수 있고-
한꺼번에 장수를 헤아리는 장치를 하려면 기계를 업그레이드하여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이제 우리 사회 일반 통용 지폐 거의가 만 원짜리로 되어가고 있으므로... 하는 등등의 설명인데 어쩐지 마뜩치 않습니다.
한 마디로 ‘천 원짜리는 번거롭다’고 선을 긋는 것인데 거기에 또한 곧 도래할 ‘오천 원짜리의 번거로움’도 아예 도매금으로 포함을 시켜버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가 이렇게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도대체 우리 사회에 500원짜리 100원짜리 10원짜리 5원짜리 그리고 1원짜리는...
그러고 보니 그러한 단위는 못 본지가 꽤 된 것 같습니다. 활용도가 낮아 사용빈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어서 잠적을 하게 된 것인가요?
아니면 아예 발행자체를 하지 않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요...?
앞면에 퇴계 ‘이황’이 그려져 있는 천 원짜리 지폐가 처음 나온 것은 1975년 이라는 기록입니다.
그 이전 1973년도에 먼저 발행되어져서 사용되어지고 있던- 고액권(!) 500원짜리 (이순신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던-) 지폐의 위용을 누르고 드디어 1000원 짜리 통용 시대를 열은 것이 되겠네요.
물론 그 보다 2년 앞선 1973년에 이미 만 원권 지폐가 나왔지만 당시 액면가로 100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정도의 최고 고액권이었던지라 서민들의 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왜 그때 그렇게 큰 고액 현금 만 원짜리가 ‘이황’ 천 원짜리보다 먼저 나왔어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다보탑이 새겨져있던 10원짜리 동전과 거북선이 새겨져 있던 5원짜리 동전도 사용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무궁화 꽃이 새겨져 있던 1원짜리 동전들은 그 활용 가치를 많이 상실하여 구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돼지 저금통에 넣는 돈의 최소단위가 10원 동전이 이미 되어버린 때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동전들을 돼지 저금통에 가득 모아가지고 절그럭-절그럭- 흔들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 가기 전 해인 1975년도만 하여도 천 원짜리는 꽤 쓸 만한 액수였습니다.
일류극장이라고 하는 영화 개봉관의 요금도 300~4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상영하던 아랑 드롱 주연의 ‘볼사리노 2’를 400원 내고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해인 1976년도 10월 달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인가... 훈련을 받고 다시 원주통신학교로 가서 5주 정도 교육을 마치고 춘천 소양강 댐 근처에 있는 자대에 가서 받은 이등병 첫 월급이 2천 몇 백 원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 원짜리가 그러하였을진대 오천 원짜리의 활용 가치는 말할 것도 없이 상당히 큰 것이었고 그래서 잠바 안주머니에 곱게 모셔둔 오천 원짜리가 한 장으로도 큰 부자가 된 기분이 되곤 하였습니다.
1973년도 여름날에- 지금은 보고 싶지만 소식조차도 알 수 없는 친구와 함께 거액 오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을 가지고 피카디리 극장으로 그때 처음 등장한 이소룡의 ‘정무문’을 보러갔다가
전회 매진이 되어서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다가 허리우드 극장에 가서 당시의 요정 올리비아 핫세가 나오는 영화 ‘썸머타임킬러’를 300원 입장료를 내고 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것으로 보아-
정말 그 당시에 5천원권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기계조차도 ‘번거롭다’고 저렇게 거부하고 뱉어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군요...
지금은 현금 5만 원짜리 시대이지요. 저 어릴 적에 ‘5만-’이란 집한 채 값이었는데 지금은 다섯 명이 둘러 앉아 ‘설렁탕’ 한 그릇씩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이지요.
“이 쯤에서 다시 한 번 화폐개혁을 하여야 하는 것 아냐?” 하는 말들을 합니다.
1953년에 통화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하였고 다시 1962년에 10분의 1로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제는 또 한 번 그렇듯 통화단위를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하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언젠가 남미 쪽 어느 나라에서는 ‘우유 한 병을 사려면 몇 백 만원, 버스 요금이 몇 십 만원-’이라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마구잡이로 돈을 ‘찍어낸-’ 결과로 세계인의 지탄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1000’ 이라는 숫자와 그 개수는 한 참을 헤아려야 하는 큰 숫자이기는 하지만 작금의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새겨져 있는 지폐 한 장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10000’이라는 ‘굉장히 무지하게 큰 숫자’ 쯤 되어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인 것을 돌아보면-
며칠 전, 우리 마을 할머니 한 분은 지난번 설날에 아이들에게 세뱃돈으로 5000원씩을 주었더니 “할머니, 오천 원 가지고는 살 수 있는 게 없어요.”라며 볼멘소리를 하여서 만 원짜리로 바꾸어 주었다고 하시면서 쯧-쯧- 혀를 차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허허 그 녀석들 참 그러네요.”하며 맞장구를 쳤지만 시내 상점이나 마트 등에 가서 문구나 장난감 등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나서는- 그래 단순히 아이들의 ‘철없는 투정소리’이라고만 넘겨 버릴 수만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60원에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던 70년대 초반 무렵에 그렇게 중국집에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었던 친구들의 모습이 둥실-둥실- 떠오릅니다... 호기롭게 200원짜리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날에는 즐거움이 배가 되었고...
휴... 멀게는 초등학교 시절에 5원짜리 ‘크라운 산도’를 사먹고 10원짜리 ‘삼립크림빵’에 행복해하며 2원50전짜리 표를 가지고 냉-냉- ‘드라큐라’ 영화 광고가 붙어 있던 전차에 올라타서는 을지로로- 종로로- 신나게 서울 시내를 돌아 다녀보았기도 했고
20원씩 들고 나온 친구들과 기동차를 타고 뚝섬에 가서 종일토록 수영을 하며 뜨거운 여름 땡볕을 이기기도 하였는데...
‘옛날 사람’의 하릴없는 구시렁이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오늘 하루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보아도 그때마다 역시 흐뭇한 기쁘고 좋은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by/산골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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