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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사진 왼쪽) 시인과 김의도 강원도민일보편집국장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서영 |
“여량의 정신, 강원도가 나아갈 방향”
“생명·평화 아리아의 중심 문화 만들어야”
“미학적 측면 강원도 재조망 이상적 시대 맞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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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보듬는 ‘아우라지 미학’ 연구에 남은 생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강원도민 김지하(72) 시인을 크리스마스이브인 지난 24일 박경리문화관에서 만났다. 그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김 시인의 장모) 선생 타계 후 원주에 정착했다. ‘강원인 김지하’라는 표현은 그의 말이다.
백운산 자락, 달맞이 축제로 유명한 원주 회촌마을 인근에 자리 잡은 토지문화관은 고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를 기념하는 건물로 작가들의 창작 산실이다. 직원의 안내로 2층 김영주(김 시인의 부인)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연일 체감온도 영하 10도 아래로 곤두박질치던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날씨가 오랜만에 영상을 회복해 포근하기까지 했다. 김지하가 미학(美學)으로 회귀한 것처럼.
마침내, 약속된 시간인 오전 11시 원주시청 인근에 위치한 자택 아파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박경리문화관에 도착한 김 시인은 지팡이를 짚고 가쁜 숨을 내쉬며 “빨리 오셨네” 라며 취재진을 반겼다. 최근 미학 회귀를 선언한 김 시인은 미당 서정주(1915∼2000)와 같은 아름다움의 시인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라며 목소리와 달리 온화한 표정이다.
질풍노도로 독재시대를 헤쳐온 저항 시인 김지하는 대뜸 “이제 내 고향은 강원도야”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김의도 강원도민일보 편집국장과 서영 사진부장이 김 시인의 강원도 예찬론 강의 수강생(?)으로 함께 자리했다.
‘아우라지’ 강원도 미학에 심취해 있다고 거듭 밝힌 김 시인은 “책장에서 책 몇 권을 가져왔으니 시간 나면 읽어보쇼”라며 3권의 역작을 건넸다. 김지하와 그의 시대(2013년 11월), 김지하의 수왕사( 2013년 11월), 산알 모란꽃(2010년 4월) 등이었다.
김 시인은 “내가 이제는 늙고 힘들어 언론과 인터뷰를 고사하고 있는데 토지문화재단 김영주 이사장의 추천도 있고 강원도 언론이라 시간을 냈소”라며 조금은 긴장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최근 등산 에 나섰다 한 고속도로 휴게소 계단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쳐 거동이 조금은 힘들다고 근황을 밝힌 김 시인의 어려운 발걸음 속에서 피어나는 강원도 얘기는 흥미진진한 판타지 소설과 서정적인 시가 융합된 훈훈함 그 자체였다.
-최근 미학(美學)으로 회귀했다고 하셨는데, 미학과 강원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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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에 대한 질문에 김 시인은 대뜸 “서울대에서 미학을 전공한 노인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매스컴에 추한 얼굴을 내밀기 민망해”라며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최근 근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강원도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은 어울림의 ‘정선 아우라지’가 핵심이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강조한 그는 포퓰리즘을 경계했다.
생명사상과 미학의 출발점인 ‘물’은 산에서 나온다며 산과 물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미 물을 ‘최대의 치료제’로 명명했다고 한다. 산은 좋은 약초를 선물한다. 그 산의 고향은 강원도라는 그만의 학설이다.
“공부 안하는 놈과 얘기를 안한다”며 몇 개의 질문을 취재진에 던진 그는 택시기사와의 짧은 토론(김 시인은 주로 택시를 이용한다)에서 얻은 담론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서로 평등한 조건에서 자주, 자립, 협동하는 삶이 ‘공생주의’다. 공생주의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난해한 질문에 철학적 답을 내놓기 위해 고심하던 취재진의 고민으로 자위해 본다.
잠시 후 그는 “나는 13살에 빨치산에서 전향한 부친을 따라 고향을 등져 한이 많다”며 당시 최고의 전기기술자로 원주 군인극장 영사주임에 자리를 옮긴 부친을 따라 강원도에 둥지를 튼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증조부는 ‘동학’ 운동을 하다 숨졌으며, 할아버지는 피신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지하는 바로 그 뜨거운 피를 잇는 동학의 아들이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김 시인은 현재 아우라지 미학에 몰두 중이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아우라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아우른다는 뜻을 소유하고 있는 아우라지의 행정구역 상 이름은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다. ‘여량(餘糧)’ 여기서부터 출발이다.
그와의 대담은 본격적인 속도를 내고 있었다.
김 시인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잉여에서 발생한다. 노동부터 농산물 생산과정 전체에서 남는 이익이 잉여다”며 그러니 가장 중요한 물질적인 기초가 잉여라는 의미다. 잉여가 바로 미(美)의 시작이란 논리다.
“여량이 뭐냐, 남은 곡식이란 뜻인데 남기는 게 아니라 당초부터 떼어놓은 것인 만큼 바로 이 여량의 정신이 미의 정신”이라며 “나는 미학자로서 여량을 찾을 것”이라고 거듭 아우라지 예찬론을 펼쳤다.
또한 내년부터 ‘시’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김지하는 “늙으면 변화해야 시인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다”며 미학으로의 회귀를 고심 중인 속내를 털어놓았다.
-강원인의 입장에서 보는 강원도의 문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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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해 김 시인은 “생명은 경제중독에 걸려 돈 얘기만 한다”며 신랄한 비판으로 포문을 열었다.
좋은 땅과 물이 있는 강원도는 그동안 왕조사(王朝史)의 중심이었지만 껍질의 땅으로 소외됐다. 궁예, 왕건, 견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등 강원도와의 인연이 있는 왕조사는 풍부하다. 그러나 먹고, 살고, 애쓰는 과정에서 역사는 강원도를 외면했다고 한다.
강원도 문화 애정론을 펼치는 김 시인의 얼굴에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초특급 욕쟁이(김지하의 표현)와 이웃 할아버지의 온화한 모습이 교차되고 있었다. “강원도와 특히 원주와 인연을 맺은 이들 역사적 주인공만으로 부족한가”라는 물음으로 강원도 문화의 중요성을 대신한 그는 생명평화 아리아의 중심으로 강원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원주는 충청도와 경기도, 경상도가 접한 곳이다. 이런 지역이 받고 있는 홀대에 김 시인은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이제 내 고향은 원주”라고 선을 그은 그는 한반도 지정학적 중심지인 이곳의 스토리텔링을 천천히 풀어갔다.
한강, 섬강, 단강 합수부인 ‘흥원창’은 지리적 특성으로 전쟁의 중심지였으며 인근 거돈사와 법천사를 중심으로 불교 이데올로기의 정수였다.
정감록에서 밝힌 가장 좋은 땅 10곳도 강원도에 있다.
“신비주의와 고대철학의 중심지인 강원도 문화는 어렵다”고 설명한 김 시인은 변두리에서부터 문화운동을 시작하자는 난해한 이론을 꺼냈다. 동해안 작은 어촌과 DMZ 접경지역에서부터다.
이 중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인 ‘시김(판소리의 멋과 맛을 느끼해 해주는 일종의 발성기법-편집자)을 언급한 김 시인은 “발효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시김’은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과 신명으로 뒤바꿔 내고 있다. 이것이 발효이고 시김이다”고 강조했다. 시김은 한에서 출발해 신명으로 귀결된다는 의미다.
전 세계적 문화적 충격에 불을 지피고 있는 ‘한류’도 ‘시김’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게 그의 이론이다.
시김은 논리가 아니다. 시김은 논리와 논의 자체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불같은 분발이거나 배고픔, 번갯불이다.
우리의 시김은 남도소리, 판소리, 탈춤, 육자배기, 불교, 무속문화 등을 중심으로 한다.
한국인이 세계에 전해야 하는 문화와 지혜의 ‘시김’에 열변을 토하던 김 시인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정선아리랑이 ‘시김’새의 첫 뿌리에 속한다”고 말하며 탁자를 두어 번 내려쳤다. 우리나라의 가능성이자 강원도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바로 ‘아우라지’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전라도 사람으로 서울에서 교육을 받은 자가 강원도 ‘아우라지’ 예찬론을 펼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김 시인은 “판소리 대가 가왕 소흥록은 민족문화의 근원들을 판소리에서 찾았는데 이것들이 결국은 정선아리랑과 연계되고 있다고 했다”며 “미스터리로 다가왔던 우리문화의 융성과 최근 한류 등의 개벽사상의 시작은 강원도였다”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시인은 “소흥록이 죽을 때 제자들이 선생님의 목소리의 원천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정선아리랑’이라고 답했다”며 정선 아리랑 즉 아우라지의 미학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김시인은 정선 5일장은 현 정부에서 주창하고 있는 창조경제의 롤모델이라며 정선 5일장을 연구하면 창조경제의 답이 나온다고 현정부 실세에게 조언했다고도 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강원도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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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시인 |
“동해의 물은 변화의 장소다. 재분배의 ‘파시’도 동해안 작은 어촌에 가면 남아있다. 강원도의 미스터리 ‘예맥’에도 집중해야 한다. 미학적 측면에서 K-Pop의 고향은 정선아리랑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김 시인의 목소리는 갑자기 천부경(天符經)을 거론하며 커졌다. 취재진의 수첩에다 자신만의 계산법을 적어가며 말이다.
“천부경 81자는 아우라지의 구절리 ‘9’, 임계로 넘어가는 큰너그미재의 아홉굽이 ‘9’와 연관이 깊다.” 이는 9곱하기 9는 81이라는 단순한 셈법을 넘어 강원도를 다시 조망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강원도가 잘될 조짐을 ‘아우라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다. 즉 천부경과 사내경, 아우라지와 화엄사상으로도 귀결된다는 뜻이다.
김 시인은 “화엄사상의 근원은 어디인가, 바로 오대산 월정사다”라며 또 한 번 우렁찬 목소리를 내뿜었다.
아우라지는 좌·우·중도와 종교계 등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강원도의 힘이다.
강원도의 산(山)과 물(水)은 각 분야별과 함께 이상적인 시대를 맞을 수 있다.
여성의 시대 도래를 예견한 김 시인은 “장모인 박경리 선생이 원주에 터를 잡고 ‘원만의 땅’에 왔다고 했다. 이는 평화의 땅으로 향후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며 “바로 이 같은 생명과 평화가 토지 완간의 힘으로 본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음(陰)의 시대, 여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도 독자가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역사가 태양(해) 중심에서 달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그는 “우리의 남도 시김새는 그 주역이 단연 여성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시대’가 한 걸음 나아가면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충격파를 만들어 낸다”며 김지하만의 여성관을 피력했다.
내친김에 이번 대담에서 하지 않기로 굳건히(?) 약속했던 정치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에 대해 “남자의 시대는 가고 여자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내가 한 얘기야. 박근혜 혼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남자의 보조적인 역할이 필요한 ‘이원집정제’가 내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토지문화관 직원이 김 시인의 단골 밥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와 심도(?) 있는 정치이야기는 여기서 접었다. 낮 12시에 예약을 했는데 벌써 오후 3시가 다가오니 확인 차 연락을 취한 것이다. 토지문화관 인근에 있는 허름한 그의 단골집(토종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부터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만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주옥같은 얘기가 한 시간 넘게 덤으로 이어졌다.
이날 인터뷰로 시작해 명 강의로 끝난 4시간의 만남은 진한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머리를 내민 태양이 시골길로 연결된 밥집 골목에 쌓인 강원도 눈길을 보듬고 있었다.
정리=원주/윤수용 ysy@kado.net
대담┃김의도 강원도민일보 편집국장
김지하(金芝河) 시인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1963년 ‘저녁 이야기’로 데뷔했다.
산정국민학교, 목포중학교, 원주중학교, 중동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김 시인은 1954년 원주 한 영화관 기사로 들어간 부친을 따라 목포에서 원주로 이주했다.
당시 원주중학교 2학년에 편입한 그는 선배의 손에 이끌려 찾은 가톨릭 원주교구에서 지학순 주교와 인연을 쌓았다.
김 시인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60년 반독재·반외세·반매판의 깃발 아래 4월 혁명에 뛰어든다.
김지하는 남북 학생 회담의 남쪽 학생 대표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내정될 만큼 당시 학생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1966년, 김 시인은 7년 반 동안이나 유지하고 있던 ‘고의적인 장기 학적 보유자’의 신분을 끝내고 대학을 졸업하지만 수배자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 강원도 한 탄광에서 숨어서 광부로 생활했다.
김지하 나이 스물여덟 살때인 1969년 ‘황톳길’, ‘비’, ‘가벼움’, ‘녹두빛’, ‘들녘’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위대한 저항시인의 길을 걷는다.
1971년, 그는 지학순 주교가 이끄는 천주교 원주교구 농촌협동운동의 기획위원으로 취임한다.
1973년 4월 7일, 김지하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박경리의 외동딸 김영주와 결혼한다.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후 1980년 겨울 석방된 김지하는 1981년 국제시인회(Poetry International)의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위원회가 주관하는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잇달아 받는다.
이후 그는 현실비판에서 나아간 불교의 선(禪),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 기독교 사상이 하나로 버무려진 ‘생명 사상’을 주창하게 된다.
1990년대 들어 김지하는 가톨릭 농민회의 박재일 회장과 사회 운동가 장일순, 천주교 원주교구 등 원주 지역 재야인사들과 손잡고 공동체 운동을 벌였다.
만해문학상,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 노벨문학상과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 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