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누가복음 17:1-10 27, 301, 436, 440,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6)을 말씀했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들’과 ‘제자들’이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예수님께서 뽑아 세운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따르는 모든 자들입니다. 넓게는 오늘의 교회 성도들까지도 제자들이라고 합니다.
1-4까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5-10까지는 열두 제자들인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게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그 말씀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행하기 어려우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6).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겨자씨’는 씨중에 가장 작은 씨입니다. 사실 겨자씨는 볼펜으로 찍은 점 하나만큼 작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겨자씨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자라서 큰 나무가 될 수가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사람들이 보기에는 믿음이 있는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는 작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성장할 수 있는 생명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생명이 있는 참믿음이라야 합니다.
작은 겨자씨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겨자씨 한 알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 어떤 씨앗도 만들지 못합니다. ‘씨앗’은 신비합니다. 작은 씨 안에는 온갖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씨는 무거운 흙을 밀고 나옵니다. 시멘트 콩크리트나 아스팔트도 틈만 있으면 뚫고 나오는 능력입니다. 큰 바위도 씨앗이 갈라냅니다. 씨 안에는 여러 가지 색깔과 향기로운 냄새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령만 해도 뽕나무는 순종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면 산이 옮겨질 것’이라고 했습니다(마17:20;막11:23).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말하면 뽕나무나 산이 순종하여 옮겨진다는 말씀입니다.
뽕나무나 산을 명령하여 바다로 옮긴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을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구한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은 앞서 말씀하신 ‘작은 자 하나를 실족지 않게 하는 것’이나, ‘하루에 일곱 번을 용서하는 것’이, 뽕나무나 산을 바다에 옮기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하면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익한 종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7-10).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이 종에게 ‘오늘 수고했으니 앉아서 먹으라고 말할 자가 있느냐?’(7) 고 반문한 것은 그럴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도리어 종에게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하는 주인이 있겠는냐?’(8) 고 반문했습니다. 수고한 종에게 그렇게 말하는 주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9) 종이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말할 주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지 어떠한 답례를 받을 사항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봉사할 때 답례나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오늘의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과연 이와 같은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성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종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그것이 칭찬을 들을 만한 일이나 사례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봉사에 대해서 어떠한 대가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였다고 해서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와 성도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뭘 조금 하고 나면 많은 것을 주실 것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하면 ‘아멘’하고 매우 좋아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저도 여러분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작은 것을 했을지라도 크게 칭찬하고 축복하면 더 잘합니다. 그러나 칭찬이나 축복이 없으면 하든 것고 하지 않고 비틀어집니다. 어떤 보상이나 칭찬받기를 원하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무익한 종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한 이해를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칭찬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없는 사람입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습니다.
대가성을 바라는 믿음은 ‘공양 신앙’입니다. ‘공양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심판하실 때에 공양 신앙을 한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그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반문한 것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왜 모르시냐는 말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많고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고, 너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양’은 생명이 없는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양’은 이웃에게 베푸는 신앙이 아니라 얻기를 바라는 신앙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공양 신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것을 바치고도 많은 것을 바라는 신앙은 무익한 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목사가 헌금한 것을 들고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성도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정 반대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주인이 헛말이라도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을 쉴 여가도 없이 부려먹는 사랑도 인정도 없는 아주 매정한 주인으로 보입니다. 조금 일을 덜하고 돌아왔을지라도 말 한마디라고 수고했다고 말해주어야 좋은 주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관한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뿐 아니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없는 오늘 우리에게도 상당한 교훈을 줍니다.
본문 말씀을 종합하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교훈은 우리에게 믿음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 이와 같은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성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했을지라도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솔직하게 우리가 사람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습니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있습니까? 열심히 섬기고 무익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들 ‘내가 했다’고 자랑합니다. 칭찬하면 모두 좋아합니다. 작은 것을 바친 것을 크게 축복하면 다들 좋아합니다. 그래도 나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지만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있지만 조금 모자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6)이라 말씀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서도 베드로와 함께한 제자들은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 잡는 그들에게 찾아오시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다시 그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며 불러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지만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였고, 사람들에게 용서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말한 만큼 주님을 섬기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새해에는 더욱 잘 할 것이라는 결심을 합니다.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없을지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 혼인잔치에 영접하실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 주님 손 잡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