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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학교에서 돌아온 딸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하다. “무슨 좋은 일 있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내민다. ‘홀랜드(Holland) 리포트 진로 탐색 검사’라고 쓰여 있다. 2년간 미술 영재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아이의 재능에 의구심이 있어서 ‘투자’에 인색했다. 그래서 학교 사생 대회나 공모전에서 상을 받지 못하는 딸에게 “아이를 좋아하는 네 성품상 디자인 전공보다 유치원 교사가 어울린다”는 독설을 내뱉는 ‘안티 엄마’였다. 딸은 그런 엄마에게 자신의 재능과 의지를 확인해주고 싶나 보다. 결과지에는 진로 정체성이 A타입 ‘예술형’으로 나왔다. 홀랜드 검사는 피 검사자의 진로 정체성을 총 여섯 가지로 나누는데 R(실제형), I(탐구형), A(예술형), S(사회형), E(기업형), C(관습형)가 그것. 실제형은 기술자나 운동선수, 탐구형은 의사나 인류학자, 예술형은 디자이너나 음악가, 사회형은 상담가나 교사, 기업형은 경찰이나 정치가, 관습형은 회계사나 공무원 등의 직업적 특징이 있다. 딸의 진로 정체성은 다른 지수(참고로 수학적 능력을 요구하는 탐구형은 35% 수준)에 비해 81.4%로 월등히 높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한 사회형은 46.5%로 낮은 편. 엄마의 독설이 빗나간 셈이다. 예술형은 시각디자인이나 섬유 미술, 시각 커뮤니케이션, 패션 디자인, 연극영화과를 전공으로 추천한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꾼 딸에게는 적중한 결과다. 간섭 받기 싫은 예술형 딸이 해야 할 일은 결정 났다. 문제는 ‘어떤 특성화고등학교에 가냐’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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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지에는 친절하게 딸이 갈 만한 고등학교 리스트도 있다. 적성과 관련된 고교 학과 정보가 그것. 전공과는 공연예술과, 그래픽아트 전문가, 무대미술과, 무용과, 영상예술과 등을 추천했다. 갈 만한 특성화고와 전문계고는 서울공연예술고 한강미디어고 서울디자인고 서울덕원예술고 상일미디어고 한림예술고 국립전통예고 등이다. 하지만 정작 평소 딸이 가고 싶은 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등학교와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가 빠졌다. 더구나 국립전통예고는 초등학생 때부터 실기를 준비해야 하는 곳이니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서울덕원예고도 마찬가지. 디자인 관련 학교로 후보를 좁히니 한강미디어고와 서울디자인고만 남는다. 한강미디어고등학교에는 패션디자인과 대신 시각디자인과가 있고, 서울디자인고등학교에는 패션디자인과가 있다. 갈 수 있는 학교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거르고 걸러보니 서울디자인고만 남았다. 학교 진로 담당 교사에게 검사지의 학교 선별 기준을 물으니 적성과 그에 맞는 성적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딸이 가고 싶은 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는 내신 성적 10% 초반, 성동글로벌경영고는 30%가 커트라인이다. 35% 안팎인 딸의 성적으로는 지원 불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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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특성화고는 웬만한 특목고만큼 높은 성적을 요구합니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나 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등학교가 그 예죠.” 서울시교육청 직업교육 담당 최도규 장학사는 특성화고 특별 전형이 5%에서 1.5%로 축소되어 인기가 주춤하지만, 대기업 취업이나 해외 대학 진학에 성과를 보이는 학교는 여전히 경쟁률이 높다고 설명한다. 학생 실력이 검증된 만큼 질 높은 교육을 하는 것이 사실이며, 탄탄한 기업일수록 해당 학교의 학생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 즉 진로 적성이 확고한 중위권 학생이라도 내신 성적이 좋지 않다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인문계고 가느니 좋은 직업교육을 받은 뒤 취업을 해서 재직자 전형을 노린다는 노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취업이나 진학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특성화고에 가야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불안이 엄습한다. 무엇보다 지난해부터 특별 전형이 대폭 축소되면서 진학보다 취업에 비중을 두는 특성화고 운영 방침에 따르면 재직자 전형으로 대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내신 성적 35%으로는 검증된 특성화고 입학이 불투명하다. 딸은 답답한 마음에 인문계고 가서 열심히 공부해 대입을 준비하겠단다. 일선 중학교 진로 교육 담당 교사들은 이런 결정에 손사래를 친다. 인천 신흥중 한성준 교사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이 정도 내신 성적이라면 인문계고 가서 하위권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진학도, 취업도 못 하는 진퇴양난에 빠질 공산이 크다는 설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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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특성화고 진학을 염두에 둔 상당수 중3 중위권 학생의 고민일 터. 최 장학사는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좋은 정책이 있으니 학교의 명성이나 내신 커트라인에 연연하지 말고 취업에 적극적이고 실속 있는 학교를 찾으라”고 권한다. 서울권 2년제 대학 상당수는 오래전부터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입학 기회를 많이 주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배운 전공과목과 적성이 잘 맞는다면 2년제 대학을 노리는 것도 좋다는 조언이다. 그렇다면 딸의 내신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특성화고는 어느 학교가 있을까? 패션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으며 딸이 도전할 수 있는 곳은 4개 학교 정도. 성동글로벌고등학교,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예일디자인고등학교, 세그루패션디자인고등학교다. 세그루패션디자인고는 거주지 관내에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고, 커트라인도 50% 안팎이라 안정권. 예일디자인고는 전통이 있고 커트라인이 40% 수준이라 도전해볼 만하지만, 집에서 1시간 30분 거리라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서울디자인고는 내신 성적 50% 수준으로 1시간 거리. 딸이 가장 가고 싶은 성동글로벌고는 거주지에서 30분 거리며 패션디자인과가 탄탄한 교육으로 이름나서 안성맞춤이지만, 내신 성적 커트라인이 높아 일단 보류다. 취업률도 살펴볼 항목 중 하나다. 2012년 서울시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서울 지역 특성화고 전체 취업률은 44.2%. 진학률은 2012년 기준 45%다. 하지만 올해부터 ‘선취업 후진학’ 정책이 강조되면서 진학률은 낮아질 전망이다. 우리가 후보로 삼은 특성화고 취업률은 서울디자인고 62%, 세그루패션디자인고 26.9%, 예일디자인고 36.2%다. 취업률만 봐서는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딸은 어느 학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엄마, 2학기 기말고사까지 시험이 세 번 남았잖아요. 한 번 볼 때마다 성적을 5%씩 올려볼게요. 그다음에 결정해도 되죠?” 대학에 가고 싶은데, 특성화고 가자니 진학의 문이 좁은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특성화고든 인문계고든 중위권 성적의 중3 딸에게 가장 요원한 일은 성적 향상이 아닐는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