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사진전 금상 '개구쟁이 벌서기'
날씨도 화창하고 싱그러운 초록색 신록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류에서 발명한 유익한 발명품중 화장실은 3순위내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찾아서 보내 드리니 음미 해 보시기 바람니다.
천하에 아무리 돈이많고 황제, 대통령, 절세미인, 이효리, 장동건,등 아무리 잘난
사람도 볼 일 만은 남에게 시키지 못합니다.
부모,아내,남편,자식,형제가 병고의 아픈고통에 시달려도 대신해서 해줄 수 없는
없는 일이 바로 이 일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장실에서 뭔가 철학을 배우고 지혜를 터득해 봅시다.
평생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 男 291일, 女 376일
순금 화장실 한국의 성인은 보통 하루 100~200g 의 대변을 배설하고 대략
1.6ℓ의 소변을 내보낸다. 육류를 즐기는 서양인은 하루 평균
100g 미만의 대변을 보는 데 비해 야채와 과일을 주로 먹는
아프리카人은 하루 평균 500g의 대변을 본다.
파푸아뉴기니 민족은 하루 평균 1kg에 이른다.
선진국일수록 배변량 줄어
사람은 평생토록,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은밀한 공간에서 몇
분씩을 투자한다. 때로는 수월하게 때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있는 힘을 다해 배설물을 解産(해산)한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등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차별 없이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가야
하는 곳이 화장실이다. 화장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배설
을 해결하는 즉 일상의 진정한 巨事(거사)
인간이 일생 중 화장실에서 보내는 평균 시간은 남자는 291일,
여자는376일이라고 한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사람이 평
생 동안 보는 대변의 양은 10~20t 정도이다.
물론 대변과 소변의 배설량은 나라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배변량의 차이는 식사 문화와 관련이 깊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문화권은 배변량이 많고,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문화권에서는 배변량이 적다. 선진국일수록 배변량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농경사회를 탈피해 산업화된 나라일수록 정제된 가공식품의
섭취는 늘고 섬유질 섭취는 감소하기 때문이다.
섬유질 섭취가 줄어듦에 따라 배변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얘기다. 섬유질을 1일 10∼15g쯤 섭취하면
대변의 양이 100∼150g 가량 증가하고, 배변 횟수도 두 번쯤
늘어난다.
인간의 배설 행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나 유물은 기원전
3000년대부터 1400년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은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
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의 수세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
지만 물이 흘러가도록 시설하여 그 위에 배설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것과 원리가 비슷하다. 천연 수세식 변기
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
로니아 유적지인 古都(고도) 우르 지방에서는 기원전 2200
년경 수세 벽돌을 쌓아 만든 걸터앉는 방식의 변기가 발견
됐다. 하수관을 통해 분뇨를 수세용수와 함께 건조한 모래
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써서 강이나 바다를 오염시
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유럽 어느 도시 투명한 화장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안에서는 밖이 훤히 보인다고 한다.
영국 소설가 존 헤링턴, 최초의 수세식 변기 고안
고대 조상들은 화장실의 개념 없이, 동물과 마찬가지로
산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배설하면서 살
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는
게 번거로워 요강을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화장실 문화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인류 문명의 척도인 수세식 화장실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소설가 존 헤링턴이 고안
한 것이 최초이다. 헤링턴의 인공 변기가 변신을 거듭한
끝에 우리 안방의 한 부분을 당당히 차지하게 됐다.
1596년 헤링턴은「물탱크와 물을 뿜어 내는 배수 밸브가
있는 나무의자」를 고안했는데, 디자인 면에서 대단히 정교
했다. 몸통 윗부분에 물통이 있고, 물이 탱크로 흘러가게
하는 손잡이와 배설물을 근처의 분뇨통으로 흘러가게 하는
밸브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냄새가 역류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헤링턴은 이 수세식 변기를 「워터 클로지트」
(Water Closet)이라 명명했다. 화장실을 표시하는「W.C.」
는 바로 Water Closet의 약자이다.
토일릿(Toilet)은 보통 변소를 말하며, 레스트룸(Restroom)
은 휴게실이 딸린 화장실을 의미한다. Water Closet은 리치
몬드 궁전 곳곳에 설치되었고,궁전 내에서 비교적 광범위하
게 사용되었다. 다음에 등장한 뛰어난 변기는 영국의 수학
자 알렉산더 커밍이 1775년 세계 최초로 특허를 낸 수세식
변기다.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헤링턴 변기를 계승했지만「밑으
로부터 올라오는 악취를 고여 있는 물이 차단시키는 장치」
인「취판」을 부착한 점이 달랐다. 헤링턴의 변기는 직접
분뇨통으로 연결돼 있었고, 단지 느슨한 덮개만이 분뇨통의
썩은 내용물을 차단할 뿐이었다. 연결 파이프에 냄새를 차
단하는 물이 들어 있지 않았다.
반면에 커밍이 개선한 디자인에는 변기 밑에 있는 배수 파
이프가 바로 뒤쪽으로 구부러져 있어서,변을 분뇨통으로
밀어 내고 난 후의 물이 파이프에 고여 있게 된다.
오늘날의 변기 장치와 흡사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 갈 것은, 볼일을 보고 난 산물을 미련 없이
버리는 물탱크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기에 파이프에 물이
고여 냄새를 차단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화장실 물탱크는 대개 사이펀관에 의해 작동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사이펀관은 압력 차를
이용하여 물을 위쪽으로 흐르게 한다. 예를 들어 수조에
담긴 물을 튜브를 이용하여 조금만 입으로 빼내면 이후
물이 계속 나오게 되는 원리처럼, 사이펀관이 물 표면
보다 아래에 있으면 수면에 작용하는 대기압으로 인해
액체가 파이프 안으로 밀려 올라간다.
물은 파이프를 따라 올라가 굽은 곳을 돌아서 다른 쪽
끝으로 떨어진다. 일단 물이 사이펀관을 돌아서 다른
쪽 파이프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공기의 압력 때문에
남아 있는 물이 파이프를 따라 계속 흐르게 된다.
구부러진 파이프를 사용한 덕분에 파이프 속에 있는 냄새가
거꾸로 흘러들어 오는 것도 막아 주고, 벌레가 올라오는 것
도 막는 역할을 한다. 커밍이 개선한 취판은 현대의 모든
수세식 변기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됐고, 이후 도시의
상하수도 보급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됐다.
물론 이것이 요강과 뒷간을 대치하고 영국 화장실의
기본적 시설이 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흘러야 했다.
화장실이라는 문화는 상하수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1847년 영국 정부는 대하수 시설이 완성되자, 런던 시민
에게 모든 분뇨를 하수 시설에 방류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 이후 눈부실 만큼 변기의 개량이 이뤄져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수세식 변기가 탄생하게 됐다.
물을 매개로 싸는 곳과 씻는 곳이 하나의 공간에 통합
되면서 좌변기, 세면기, 욕조로 구성된 화장실이 등장한
것이다.
중국의 화장실
화장실 없었던 루브르와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의 大문호 빅토르 위고가『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화장실의
변천사는 인간 문명의 발달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화장실의 역사 또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이야깃거리가 많다. 수세식 변기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궁전과 같은 좋은 건물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이 그
대표적 건물이고,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나 루브르
궁전도 마찬가지다.
원래 베르사유 궁전은 1631년 루이 13세가 자그마한
사냥용 별장으로 지은 것인데,『짐은 국가다』라고
했던 루이 14세의 명으로 20년에 걸쳐 100ha나 되는
대정원을 만들고, 건물 전체가 증축된 궁이다.
루이 14세는 절대주의 왕권의 영화를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 화려한 외부와 실내장식은 어떤 형용사를 써도 표현
하기 힘들 만큼 호화찬란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건물에 단 한 개의 화장실도 없었다. 그토록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면서 어째서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
을까?
게란트가 쓴「화장실 문화사」의 내용에 따르면, 아름다운
궁전에 화장실처럼 더러운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루이
14 세의 생각 때문에 베르사유에 화장실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04-기발하고 재미있는 화장실 표시
루이 14세, 26개의 휴대식 변기 소유
그렇다면 화장실이 없는 궁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대소변을
처리했을까? 당시 궁의 왕과 귀족들은 저마다 전용 변기
(휴대용 요강)를 가지고 다녔다. 「천하무적 잡학사전」에
따르면, 궁전을 지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자그마치 26개나
되는 변기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컬렉션이 아닐 수 없
다. 그는「구멍 뚫린 의자」변기에 걸터앉아 재판을 하고 명
령을 내렸다. 그것도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귀족들은 휴대용 요강을 지참하여 생리적인 응급 대비를
했으나, 오물을 비우는 일은 하인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오물을 으슥한 궁전의 정원 구석에 버렸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거의 매일 밤 열리는 궁전 무도회에
초대된 손님들의 배설물이었다. 전용 변기를 가지고 다니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전용 변기를 갖고 있지 않은 손님
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궁전의 구석 벽이나 정원
의 풀숲이나 나무 밑에 용무를 해결한 배설물이다.
화려한 무도회 뒤에 남는 골칫덩이였다. 궁에서 생활하는
궁신들의 배설 또한 이러했다고 하니 오물로 덮인 궁전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원에서 지독한 악취와 지린내가 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를 보다 못한 궁전 관리인이 마침내 정원에「에티켓」
이라는 팻말을 써 붙였다. 「에티켓」은 대변금지를 의미
하며, 변만 잘 가리면 에티켓(예의)을 잘 지켰다고 보는
것이다. 예의범절을 의미하는 에티켓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이힐을 탄생시킨 똥 거리
당시 유럽의 일반 가정에서는 어떠했을까?
보통 가정에서는 요강을 사용했지만 그 오물을 길거리에
마구 버렸다. 가정에서 쏟아 붓는 요강의 오물 때문에
사람들은 거리를 다닐 때 모자나 망토, 우산을 써야 했다.
오물을 피하기 위해 썼던 남자들의 중절모와 여자들의
망토와 우산이 오늘날 장식용 패션으로 둔갑한 것이다.
외출한 경우에는 도시의 거리에서 볼일을 보는 게 다반사
였다. 그래서 중세 유럽은 길 한복판에 대변이 산더미처럼
쌓여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의「변소 거리」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거리에서 볼일 보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도시의 거리 여기저기에 널린 대변은
여성들의 하이힐을 탄생시켰다. 귀부인들은 치렁치렁한
드레스 끝자락에 길거리의 오물이 묻지 않도록 나무를 다듬
어서 만든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다녔고, 그것이 하이힐의
유래가 되었다. 하이힐의 굽 높이는 거리를 뒤덮은 오물의
높이와 비례했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프랑스의 향수는 화장실이
없던 시절 발달했다. 물이 귀한 탓에 프랑스 사람들은 목욕
을 거의 하지 않아 몸에서 악취가 났고, 화장실이 없어 아무
데나 볼일을 보았기에 그 지독한 냄새로 골머리를 앓았다.
몸의 악취와 거리의 똥 냄새를 없애기 위한 고민이 향수 발달
로 이어져 몸에 뿌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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