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신천(信川)은 황해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는 승산군(升山郡)이었고 고려 때에는 신주(信州)라고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두 지역 모두 중반군(重盤郡)에 소속되었고, 궁홀은 궐구(闕口)로 개칭되었다. 승산과 궐구는 태봉 때 또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 전에 신주(信州)와 유주(儒州)로 개칭된 것으로 짐작된다. 신주는 995년(성종 14) 방어진으로 바뀌었다가 1012년(현종 3) 폐지되고 황주(黃州)의 속현이 되었다. 유주는 1018년 풍주(豊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1259년(고종 46)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신천으로 개칭되어 현감을 두었다가 1469년(예종 1)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909년에 문화군과 병합되었다. 1952년에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월면·산천면·용진면이 안악군으로 이관되었으며, 초리면·궁흥면의 일부를 송화군에 편입시키고 재령군 서초면의 일부와 삼천군 궁흥면·초리면·문화면의 일부를 통합해 군 영역을 조정하였다. 1953년에 재령군 용평리와 삼천군 덕천리의 일부, 1954년에 재령군 청천리의 일부, 1958년에는 벽성군의 온천리·도락리·냉정리·지남리가 이군에 이관되었다. 또한 1967년에는 온천리를 장재리로 개칭했고 온천리·송오리·원암리의 일부를 각각 분리·통합하여 온천리를 만들었다. 1977년에 봉황리를 새길리로, 석봉리를 새날리로 개칭하고 근로자리를 신설하였다.
성씨의 역사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강씨의 득성조(得性祖)는 중국 주나라 왕족인 강숙(康叔)으로 전해지며, 시조는 그의 후손인 강호경(康虎景)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관력(官歷)이 분명한 충열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므로, 전국에 사는 강씨는 모두 강지연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중시조 강지연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 할 때 국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이후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때 신성은 황해도 신천(信川)의 옛 이름으로 신천강씨가 관향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후손들이 본관을 신천으로 하였고, 강지연의 6세손 강윤성(康允成)은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하여 강씨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강씨는 신천, 곡산(谷山), 재령(載寧), 충원(忠原), 진주(晉州) 등 10여개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신천·곡산·재령강씨가 대종으로써 오늘날 이들 3본 이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들 3본마저도 모두 근원이 신천강씨라 하여 신천으로 통합한 이후 족보를 같이하고 있다.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선산군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제주도 서귀포시
황해도 신천
황해도 재령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신천강씨는 13,909가구 총 44,25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