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따내
1983년 11월 7일, 동아건설이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규모인 32억 9700만 달러의 대수로공사를 리비아에서 수주, 현지에서 계약을 체결했다. 대수로공사는 지름 4mㆍ총길이 1872km의 송수관을 묻어 하루 400만t의 물을 공급, 사막을 옥토로 바꾸기 위한 리비아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2년 5개월전 공사 정보를 사전에 귀띔받은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은 사내에 비밀전담반을 설치ㆍ운영하고 21차례나 해외출장을 다니며 직접 뛰었다. 통수식은 연인원 1100만명이 동원되고 550만대의 건설 중장비가 투입된 대역사 끝에 1991년 8월 28일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가졌다. 가다피는 이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격찬했다. 동아건설은 1989년 2차 공사까지 수주하는데 성공, 1996년 9월 1일에 2차 통수식을 가졌다./조선
[1998년] 조용필 음악30년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조용필 음악 30년` 콘서트는 진정한 대중의 스타란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게 만든 감동적 무대였다. 1998년 11월 7일 조용필은 음악 30년을 기념하는 대형 콘서트를 가졌다. 4000석 극장을 가득 메운 공연은 `창밖의 여자`가 실린 1980년 1집부터 최근 발표한 17집 `야망`까지 조용필 음악 발자취를 자료화면으로 엮은 5분짜리 영상쇼로 시작했다. 관객은 정장 차림 40-50대 중장년 부부부터, 친구나 연인끼리 온 20대 젊은이들, 이 공연을 보려고 일부러 한국을 찾은 일본인 팬도 3백여명이나 됐다. 3일간 계속된 공연에서 관객들은 극장이 떠나갈듯 환호했고, 뜨거운 현장 열기는 10대 인기 댄스그룹 공연장을 방불케 했다. 1시간40분으로 예정했던 공연은 계속된 "앙코르!" 함성에 2시간으로 길어졌다. 한 공연기획자는 "가수는 콘서트를 정기적으로 해야 관객층이 두터워진다는 정설을 보여준 공연"이라고 말하고 "조용필 공연은 절정에 오른 느낌"이라며 "공유할만한 문화적 체험이 드문 우리나라 중산층의 대중문화 사랑을 이끌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열성 여성팬 수십명은 조용필 얼굴을 보려고 공연이 끝난 뒤 1시간 넘도록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럼 내년이면 40년인가 보네요? 커피님, 조용필 씨 좋아하세요?^^*
[1992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두브체크 사망
1968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1992년 11월 7일 숨졌다. 향년 70세였다. 두브체크의 일생은 불운의 이상과 실패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1921년 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8세에 공산당에 입당한 뒤 2차대전 중엔 공산당의 나치 유격전에 참가, 두차례 부상하기도 했으며 1958년 소련공산당의 정치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 10년 뒤 체코 공산당의 제1인자가 됐다. 공산당 제1서기가 된 두브체크는 체코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접목시킨 `제3의 방법`을 모색했다. 두브체크의 개혁의지는 마침내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자유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조약군은 체코를 전격 침공,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켰으며 그후 축출된 두브체크는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약20년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1989년 체코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하벨에게 패배한 뒤 상징적인 연방의회의장이 됐다. 결국 두브체크의 ‘인간적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의 세계에 대한 이상적이고 순수한 비전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다./조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1978년 11월 7일 한·미 양국은 제11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의 합의로 설치된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에 의거해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했다. 1975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UN군 사령부의 해체를 결의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이 기관의 설립으로 UN군 사령부가 존속되었으며,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지휘통제가 실질적으로 강화되었다. 1993년 11월 한·미 양국의 합의에 따라 한미연합사령부는 전시에만 한국군을 지휘하도록 변경되었다. 한미연합사령부는 미국군 장성을 사령관으로, 한국군 장성을 부사령관으로 해 통합 참모진을 구성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주한미군의 합법성을 보장받으며 '합의 의사록'에 따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미연합사령부의 주요 기능인 작전통제권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군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연합사령관의 승인을 반드시 얻어야 하지만 ① 외부의 적으로부터 현존하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경우에는 승인을 얻지 않아도 무방하며, ② 일정 시간 내에 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 대통령 또는 다른 한국군 지휘관이 임의로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45년] 함흥 학생반공의거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함흥에 모두 문동기같은 공산주의자들밖에 없었던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문동기와 오철형이 그 지역에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반공애국지사들이 연이어 일어나 반공 의거를 일으켰었다. 그 당시 남한에는 반공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었고, 남한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반공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에 함흥과 신의주 일대의 애국지사들이 반공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반공의거를 일으켰었다. 1945년 11월에 일으킨 반공 의거는 공산체제에 항거한 북한 지역 최초의 학생 의거였다. 교장 주기용을 제거하며 오산학교를 공산주의 이념의 학교로 재편,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음모를 전해 듣고 학생들이 격분해 있던 중 러시아 혁명기념일 행사에 오산 밴드부를 강제 동원하려하자 4학년 150명 전원이 11월 6일 정주 고읍의 공산당 각 기관들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 때 구속된 주모자급 학생들은 교장의 보증으로 풀려났으나, 공산 당국이 다시 교장을 구속하자 13명의 학생들이 혈서를 쓰는 등 석방 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결국 교장도 석방되었다. 이 일의 전말이 신의주 동중학교에 본부를 둔 평북 학생회에 알려지게 되어 신의주 소재 학교의 학생들도 일제히 궐기하여 마침내 압록강 물을 피로 물들게 한 1945년 11월 의 신의주 학생 반공 의거가 일어나게 되었다. 오산 학생들은 1947년 5월 23일에도 반공 의거를 일으켰다. 당시 공산 당국은 교장 주기용을 해임하고 공산주의 앞잡이 전의원을 교장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들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전의원과 일부 교사 및 민청파 학생들에 항거하여 학교를 제 모습대로 바로 세우려 하였다. 반공 민족주의자 교사들과 학생들은 정주 보안서까지 쳐들어가며 과감하게 귈기했으나 소련의 뒷받침 아래 도도히 전개된 북한의 공산화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주모자 박승종 등 20여명의 학생들과 민족주의자 교사 들은 체포, 구속되고 대부분의 오산 관계자, 교사,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었다. 당시에 반공 이념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공산 당국에 의해 쫓겨난 민족주의자 교사로는 경희대 법대 학장을 역임한 학술원 회원 이근칠(20회), 헬싱키 올림픽 레슬링 국가 대표팀 감독이었던 현 학교 법인 이사장 김옥규(金玉圭·23회), 경희대 교수와 오산 학교 교장을 역임한 고한권(高漢權), 반공교육의 최선봉에 섰다가 신의주 형무소에 투옥되었던 현 학교 법인 이사 김봉빈(金鳳彬· 26회), 오산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한 평생을 바친 임상흠(林相欽 ·27회) 등 20여 명이 있었다. 한편 오산학교의 졸업생들도 반공 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1947년 1윌 압록강변 청성진 출신이 주축이 되어 중국 국부군과의 협력을 도모하고 반공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청성진 보안서를 습격하였다. 이 의거로 김홍제(35회)는 목숨을 잃고, 한익룡(29회), 심 창휘(32회), 김옥섭(33회) 등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는 수난을 당하였으나 김영록(35회)은 다행히 월남에 성공했다. 1950년 12월 오산 출신들과 정주 지역 애국 청년들은 서해의 애도 (艾島)를 거점으로 유격백마부대를 결성하고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 부대는 유격전을 전개하여 북괴군의 시설과 보급로를 파괴하고 수많은 북괴군과 중공군을 사살하는 등, 적 후방을 교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공산 통치에 감연히 항거하여 재학생들이 일으킨 두 차례의 반공 의거와 졸업생들의 청성진 보안서 습격 사건과 유격백마부대의 활동 등은 오산에서 가르치고 오산에서 배운 대로 민족을 구하고자 행한 몸부림이었다. 이리하여 항일 민족 학교라 불린 오산학교는 시련기를 거치면서 반공 민족 학교라는 또 하나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
1867년 마리 퀴리 부인 출생
[Curie, Marie, 1867.11.7~1934.7.4]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물리학, 화학 /출생지 폴란드 바르샤바 주요수상 노벨물리학상(1903), 노벨화학상(1911) 폴란드의 바르샤바 출생. 결혼 전 이름은 Marja Skłodowska이다. 당시 폴란드는 분할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압정(壓政)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였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였다. 1891년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 J.H.푸앵카레, G.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수학·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895년 P.퀴리와 결혼 후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이 잇달아 발견된 시기였는데, 뢴트겐의 X선 발견, H.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되어 퀴리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먼저 베크렐의 추시부터 시작, 이때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피에르가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썼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寫眞法)보다 편리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放射能:radioactivity)’이라 불렀다. 또한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시료(試料)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 속에 미지(未知)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했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산출되는 피치블렌드에 대하여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분석을 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어 그 해 12월 라듐을 발견하였다. 이 두 원소는 방사성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 발견은 방사성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대학 이학부(理學部)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 얼마 후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이 후 단독으로 방사성물질을 계속 연구, 1907년 라듐 원자량의 보다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고, 1910년에 금속 라듐의 분리에도 성공하였다. 그 동안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고, 라듐연구소 건립에도 노력하였다. 이것은 그 후 파스퇴르실험소와 퀴리실험소가 되었는데, 그녀는 퀴리실험소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하였다. 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은 마리의 실험조수로 있던 F.졸리오 퀴리와 결혼,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방사능 발견의 공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1913년] 프랑스 작가 카뮈 출생
← 카뮈, Henri Cartier-Bresson이 찍은 사진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자스 태생의 궁핍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후손이었다. 공립국민학교에서 만난 교사 루이 제르맹의 도움으로 1923년 알제 리세(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며, 알제대학 재학 중에는 철학 교수 장 그르니에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알제리의 젊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로 주목받았으며 1934~35년 잠깐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레지스탕스 기관지였던 일간지 <콩바 Combat>의 편집장으로서 큰 영향력을 누렸다. 1942년에 발표한 첫번째 단편소설 <이방인 L'Etranger>(1942)은 아랍인을 죽인 한 '아웃사이더'의 초상을 통해 20세기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뛰어난 작품이다. 그밖에도 <페스트 La Peste>(1947)·<전락 La Chute>(1956) 등의 소설과 평론 <시지프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반항적 인간 L'Homme revolte>(1951) 등이 유명하다. 1957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그후 3년이 채 안 되어서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876년]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출생
본관 상주(尙州). 호 한힌샘·한흰메. 초명 상호(相鎬).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배재학당 만국지지(萬國地誌)특별과를 졸업, 이어 보통과에 입학, 1900년 졸업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 조직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협성회(協成會)를 창립하여 《협성회보(協成會報)》를 발간하였고 또 조선문동식회(朝鮮文同式會)를 결성, 한글 기사체(記寫體)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여러 학교와 강습소의 교사·강사직을 맡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1898년 《국어문법(國語文法)》을 완성, 1910년 이를 수정·발간하였다. 1905년 국어연구와 사전(辭典) 편찬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1907년 어윤적(魚允迪)·이능화(李能和) 등과 함께 학부(學部:교육부)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위원이 되었다. 한국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체계를 세워 국어학 중흥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 보급에 정성을 기울여 김두봉(金枓奉)·이규영(李奎榮)·최현배(崔鉉培)·장지영(張志暎)·이병기(李秉岐)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1921년에는 이들 문하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한글학회의 전신)를 창설함으로써 1933년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월남망국사》 《한문초습(漢文初習)》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국문초학(國文初學)》 《말의 소리》 등이 있다. /naver
[1879년] 러시아의 공산주의 이론가·혁명가 트로츠키 Leon Trotsky 출생
1879년 11월 7일 태어남 / 1940년 8월 20일 죽음
트로츠키 "만약 태양이 부르주아만을 위해서 타는 것이라면 태양을 꺼버리겠다. " - 레온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혁명의 지도자로 활약한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로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이다. 1898년 1월에 혁명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지만 1902년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탈출해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합류했지만 멘셰비키에 가담하여 레닌과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1905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혁명적인 파업운동과 차르 정부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1906년 다시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주요 저서 <결과와 전망 Results and Prospects>을 쓰고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 1907년 시베리아에서 도망쳐 빈에 정착했다. 10월혁명 이후 레닌에 합류했고 1917~24년 소련 외무 및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지만 레닌이 죽은 뒤 일어난 권력투쟁 과정에서 요시프 스탈린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1929년 추방당했다. 그후 해외에서 반(反)스탈린 세력을 지도했으나 멕시코에서 스페인 공산당원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2004년] 중국 뤄양[洛陽] 룽먼석굴[龍門石窟]에서 백제불상 첫 발견
← 룽먼석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제1굴. 면적이 36제곱미터에 달한다. 망국의 한을 안고 이역만리 중원으로 간 백제인의 자취가 중국 뤄양(洛陽) 룽먼석굴(龍門石窟)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현재 뤄양대 특임교수(전 공주영상정보대 교수)는 7일 “룽먼석굴의 877번 불상 왼쪽 좌불이 조각된 두 개의 작은 감실(龕室) 아래에서 부여씨(扶餘氏)라고 적힌 명문(銘文)을 발견했다”며 이를 공개했다. 임 교수는 “현지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 서기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며 “부여씨는 백제 왕실의 성이었으므로 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에 끌려온 백제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강우방(姜友邦) 이화여대 교수는 “백제인이 조성한 불상이 당나라 시대 석굴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앞으로 한·중 간의 고대문화 교류 연구에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윈강·둔황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의 하나인 룽먼석굴은 5~7세기에 만들어진 불상 9만여개가 있는 곳으로 지난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chosun.com) /Google
[1993년] 대전 세계박람회(EXPO) 폐막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93일 동안 대전광역시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로, 대전엑스포라고도 한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의 전문박람회였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었고, 공식 마스코트는 '꿈돌이'였다. 주제의 의미는 그 동안 우리나라가 이룩한 발전성과를 돌아봄으로써 국민의 역량을 모아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또 그 동안 매우 빠르게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나타나고 있어, 이를 극복하고 다가오는 21세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대전엑스포가 끝난 뒤 과학공원구역은 '과학은 내 친구'라는 주제로 체험과 실험을 통한 교육적인 놀이공간으로 새로 문을 열어 과학기술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naver
[1983년] 한국-파키스탄, 국교수립
파키스탄은 한국과 1968년 한국 총영사관 설치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1983년 양국 대사관 설치에 합의하였다. 1985년과 1988년에 대통령 하크와 총리 모하마드 칸 주네조, 1996년 총리 베나지르 부토가 각각 방한하였으며, 1990년 외무장관 최호중이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경제협력 확대방안을 논의하였다. 1984년 해운협정, 1985년 과학기술협정·사증면제협정·문화협정, 1987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투자보장협정, 1996년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출은 2억 6254만 달러, 대한수입은 4억 357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섬유사, 유류, 피혁 등이고 수입품은 의류, 전기·전자제품, 철강·금속제품 등이다. 한국은 1991~1997년 사이 총 190만 7000달러의 무상 원조를 하였다. /naver
[1962년] 주은래, 인도가 중국의 주장선을 인정한다면 국경선에서 중국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중국-인도 국경분쟁'의 원인은 국경선에 대한 양자의 견해가 완전히 엇갈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인도측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대에 영국이 그 실력을 방패로 해서 멋대로 그은 ‘맥마흔 라인’(1914)을 그대로 국경선으로 보고 있는 데 대하여, 중국측은 영국 침략 이전의 전통적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주장하였다. 양국의 국경수비대가 최초로 충돌한 것은 1959년 8월 인도 북동부 국경지대와 라다크 지구에서였다. 이 때에는 1960년 4월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네루(Nehru, Jawaharlal)의 회담에 의하여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봄이 되자 다시 인도군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여 7∼9월에 라다크 지구, 맥마혼 라인에서 중국군과의 사이에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동년 10월 인도군은 대규모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중국군의 반격으로 완패하였다. 중국군은 동년 11월 돌연 정전을 선언하고 평화회담을 제의한 후 일방적으로 철수하였다. 1962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서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의한 조정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국경지대에서는 군사적으로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나, 국경선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naver
[1962년] 미국의 여성 사회운동가, 정치가 루스벨트(Roosevelt, Eleanor, 1884~1962) 사망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는 그를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라 했고, 포드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는 그를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열 살 때 고아가 돼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운명적으로 루스벨트가(家)의 여성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Roosevelt, Theodore, 1858~1919) 대통령은 그의 삼촌이었고,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1882~1945)도 먼 친척 오빠였다. 그가 다섯 아이를 키우며 내조에 충실하는 동안 남편은 상원의원, 해군성 차관보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현모와 양처를 꿈꿔온 그의 결혼생활은 1918년 남편과 자신의 비서 루시 머서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이때부터 둘은 평생토록 껍데기만 부부였다. 의례적인 자리 외에는 별거했고, 식사도 따로 했다. 1921년 루스벨트가 소아마비에 걸리면서 엘리너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남편을 대신할 정치적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제 독립적인 공인이었고 남편과는 정치적인 동반자였다.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엘리너는 신문에 칼럼 ‘마이 데이(My Day)’를 쓰며 때로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고 또 때로는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정치적으로도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의회에서 증언을 하고, 또 기자회견까지 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루스벨트가 또 다른 여성과 사랑을 속삭일 때 엘리너는 AP통신 여기자 로리나 히콕과 동성애에 빠졌다. 루스벨트가 죽은 뒤에도 그는 미국의 유엔대표로, 또 유엔 인권위 의장으로 활약했고, KKK단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부를 찾았던 그런 여성이었다. 1962년 11월 7일, 그녀가 죽었다. /조선
[1931년] 강서성 서금에서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 수립. 주석에 모택동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naver
[994년] 에스파냐의 신학자·법학자·철학자·역사가·시인 이븐 하즘(Ibn Hazm, 994~1064) 출생 코르도바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마이야 왕조가 쇠퇴하면서 가문이 몰락하자 그도 여러 차례 박해를 받고 투옥되었다. 1013년 코르도바를 떠나 아르메니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그 후 발렌시아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박해를 받아 1019년 코르도바로 돌아갔다. 1023년 칼리프 압둘 라만 5세에 의하여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7주만에 그가 암살되자 다시 투옥되는 비운을 겪었다. 풀려난 후 하티바로 가서 《비둘기의 목걸이》를 썼다. 그 후 이슬람 정통파로부터 이단시되고 있던 수니파 이슬람의 법학파인 자히리파의 입장에서 과격한 신학적 논쟁을 폈다. 이 때문에 각지에서 탄압을 받게 되어 마요르카섬으로 몸을 피했으나, 극도의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호스 근처의 카사몬티하에 있는 집에서 죽었다. 그는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신념과 행동가적인 성향을 보여 주었으며 법학·논리학·역사학·윤리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활발한 저작활동을 펼쳤다. 또한, 자히리 법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자히리파의 원리를 창조적으로 신학 분야에 확대시켰다. 저서로 법학·논리학·역사학·윤리학 등에 걸친 약 400여 편의 작품을 썼다고 전하지만, 대부분이 현전하지 않고 《비둘기의 목걸이》를 비롯한 10종 정도의 작품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이슬람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알 미랄 완 니히르(여러 종파에 대한 단정(斷定)의 서)》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에 관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이슬람의 여러 파에 대해서는 자히리파의 입장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한, 문학작품 《비둘기의 목걸이》는 이슬람 연애론의 백미로, 연애 및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여러 예를 30장(章)으로 나누어 쓴 것이다. 이 작품은 S.스탕달이나 A.모로아의 《연애론》의 선구가 된다는 평을 받고 있다. naver
그밖에 2005년 감옥서 사상 첫 복싱 세계챔피언전(태국) 2005년 전교조의 교원평가제 실시 반대 집회 2005년 한국·벨기에 확대정상회담(서울)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 이라크 전역 60일간 비상사태 선포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1998년 깅리치 미국 하원의장 은퇴 1998년 독일 헬무트 콜 총리 퇴임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신한국당 탈당 1997년 유학자 류정기 옹 별세 1991년 SBS TV방송, 시험전파 발사 1990년 보리사브 요비치 유고 대통령, 동구권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방한 1984년 신병현 국무총리 권한대행 취임 1982년 서아프리카 오트볼타에 쿠데타 1982년 레바논, 한국에 파병요청 1980년 미국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 사망 1980년 정치풍토쇄신위 발족. 위원장 김중서 대법원장 1979년 한국서 첫 일란성 다섯 쌍둥이 태어남 1975년 해군기동연습서 함대함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1973년 국민복지연금법안 확정 1972년 닉슨 미국대통령 재선 1955년 영국 애틀리 노동당수 사임 1953년 발칸3개국, 조약부속의정서에 조인 1953년 막사이사이, 필리핀대통령에 당선 1952년 레바논, 부녀자에 참정권 부여 1950년 이발료 300원, 목욕료 100원 1950년 유엔안보리, 한국대표 초청안 가결 1932년 제2차 쌍성보전투 1923년 대전에서 전국형평사대표자대회 1922년 소련, 코민테른 기념 중앙 라디오 본 방송 개시(소련 라디오방송 정식 개시) 1921년 이탈리아, 국가파쇼당 창당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발생 1915년 월북 사학자 김석형 출생 1913년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사망 1911년 국세징수령 공포 1908년 어업법 반포 1903년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로렌츠 출생 1901년 청 이홍장 사망 1876년 한글학자 주시경 출생 1840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알렉산드로 코발레프스키 출생 1818년 독일의 동물생리학자 에밀 뒤부아레몽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