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시원합니다.
문턱까지 온 가을이 밖에서 서성대는 것 같습니다.
아쉬워, 아쉬워 아직 집 안에 머물고 있는 여름이 떠나기를 기다리면서요.
그러나 머지않아 노랗고 빨갛게 차려 입은 여인 같은 가을이 나들이 나온 사람을 맞겠지요.
노래 / 에릭 클랩튼 / Autumn Leaves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어디로 떠나고 싶어하는 걸까요?
추파(秋波)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에게 보내는 은밀한 눈길을 이야기합니다.
추파는 원래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을 뜻합니다.
그만큼 가을에 취한 물 빛깔은 아름답고 유혹적이라는 걸까요?
곱게 물이 든 단풍과 서늘한 바람 너머의 가을 계곡은 여름보다 수량은 적을진 몰라도 더 깊고 더 푸르게 느껴집니다.
계곡의 푸른 물이 저를 유혹합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계곡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요새 버킷 리스트(bucket list)란 말이 유행입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을 적은 게 버킷 리스트죠.
성리학적 이상에 젖어 살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버킷 리스트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아마도 많은 선비들이 구곡계(九曲溪)라는 중국의 어떤 계곡을 버킷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구곡계는 중국 푸젠성(福建省)의 무이산(武夷山)을 휘감고 도는 계곡입니다.
구곡이라는 말처럼 무이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아홉 번 돌고 돌아 나가는 계곡입니다.
중국에서도 절경으로 손꼽히는 이 계곡은 아름답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무릉도원으로 통했던 곳이죠. 바로 위 사진 속의 계곡이 구곡계입니다.
그러나 구곡계로 실제로 가본 조선의 선비들이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의자에 편히 앉아서 두 번째 구곡계 사진(위)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에게 푸젠성은 멀고 먼 곳이었습니다.
타이완(대만)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본토가 푸젠성이죠. 조선에서 걸어서 가려면 수천 리 길이었습니다.
또 중국에나 우리나라에나 다른 아름다운 곳도 많습니다.
왜 조선 선비들이 본 적도 없고, 본 사람도 없고, 이렇다 할 정보도 없을 무이산 구곡계를 그리워했을까요.
무이산 아홉 봉우리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구곡계(九曲溪) 중에서 다섯 번째 계곡이 굽이치는 은평봉 아래에는
주희가 생각을 가다듬고, 학문을 연마하며, 여러 책을 쓰고, 많은 후학을 가르쳤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습니다.
주희(朱熹, 1130년~1200년)는 남송 시대를 살았던 유학자이자 사상가, 문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여러 학자들의 연구와 사상을 집대성해서 성리학의 체계를 세운 사람으로,
성리학은 조선의 이념이 되었던 사상입니다.
성리학을 주희를 높이는 말인 주자(朱子)를 넣어서 주자학(朱子學)으로 부르기도 할 만큼
그가 성리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주희는 관직을 지낸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명목상의 관직으로 그는 생의 긴 시간을 이곳 푸젠성 일대에서 보냈습니다.
성리학의 신봉자였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성인, 그가 편찬한 책은 경전이랄 수 있었고,
무이정사를 비롯한 무이산 계곡은 성지(聖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곡계가 조선 선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주희가 이곳에 세운 무이정사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희는 구곡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혹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습니다.
이 무이구곡가가 또한 조선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무이구곡가는 말 그대로 아홉 개의 시로 되어 있는데, 물길이 한 번 돌아가는 곳마다 시가 붙습니다.
그중에서 아홉 번째 계곡을 노래한 시입니다.
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탁 트이고,
뽕나무 삼나무에 이슬비가 내리는 들판 평천이 보인다.
뱃사공은 다시 무릉도원 가는 길을 묻지만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을까.
두타 계곡, 백운 계곡, 화양 계곡, 용추 계곡, 덕동 계곡, 진동 계곡, 수렴동 계곡, 달궁 계곡 ......
제가 가보거나 들은 우리의 멋진 계곡들입니다. 많습니다.
이들 계곡을 보면 구곡(九曲)이라는 이름을 넣어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조선의 선비들은 늘 무이산과 구곡계를 마음에 품고 살며 이를 소재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주희를 따라서 서원을 세우고 구곡가를 짓기도 하였죠.
우리나라의 멋진 계곡에 구곡이란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위 동영상은 우암 송시열이 병산서원을 세우고 화양구곡가를 지었던 충북 괴산의 화양 계곡입니다.
아름다운 계곡입니다.
무이산과 구곡계를 노래한 이들 중에는 조선의 선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많은 화가와 시인, 묵객 들도 조선의 선비들처럼 그랬습니다.
이들 중의 한 화가는 무이산 일대를 그림으로 그리고는
산에 물이 없으면 빼어나지 않고, 물에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는 말을 그림에 남겼죠.
높은 산에는 깊은 계곡과 맑고 푸른 물이 있습니다. 무이산 역시, 산도 계곡도 아름답습니다.
저 같으면 구곡계도 좋지만 그 물의 상류를 쫓아서 무이산으로 더 올라가 보겠습니다.
위 사진처럼 무이산 상류에 가면 정말 푸르고 맑은 계곡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저런 계곡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가을이면 푸른 계곡물 위로 노랗고 빨간 낙엽들이 하나둘씩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물과 함께 흐르다가 잠시 멈추는 것을 반복하며 계곡을 떠나겠지요.
가을날, 계곡은 더 깊어 보이고, 푸르름도 더 짙을 것 같습니다.
저 계곡은 가을이 제게 보내는 추파입니다.
이번 여름, 설악산 계곡을 쉬지 않고 흘렀을 푸른 물입니다.
이 사진은 겨울의 지리산 계곡을 촬영한 것입니다.
바로 아래 사진과 함께 십 년도 훨씬 넘게 제가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죠.
이 사진들을 보는 순간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조니뎁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의 블로그에서 빌려온 것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제게는 편견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맑고 푸른 계곡 사진을 서양인들은 잘 찍지 않는다는 편견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에머랄드나 코발트 빛 물 색깔을 지닌 계곡이 많습니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은 곳의 물은 대개 이런 빛깔을 지니니까요.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의 사진들을 찾아 보면 생각 외로 이런 사진이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의 착각일 확률이 높겠지만 저는 더러 왜 이런 사진이 귀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위 사진은 어느 미국 어느 사이트에서 배경 사진으로 쓰라고 개방한 사진입니다.
멋진 사진입니다. 이 계곡에도 푸른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은 고맙지만 제가 좋아하는 감각은 아닙니다.
제가 사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카메라 노츨 시간을 길게 해놓은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계곡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이런 감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캐나다 사람으로 보이는 분이 찍은 사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원본 사진의 파일이 커서 제가 더 마음에 드는 구도로 잘랐지만요.
저 물 빛깔과 물 너머로 보일 듯 말 듯한 개울 바닥의 색깔이 오묘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색에 제가 좋아하는 구도입니다.
계곡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위 그림은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를 일컫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화가 보하(普荷)가 그린
<삼소도(三笑圖)>입니다.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라고도 하지요.
중국 동진시대의 여산 동림사에는 고승 혜원(慧遠, 333년∼416년) 스님이 계셨는데
일생 동안 호계 다리를 넘지 않겠다는 규율을 스스로 정했습니다.
절 밖을 나가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유교의 도연명, 도교의 육수정과도 교류하며
우정을 쌓고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연명과 육수정이 혜원 스님이 있는 동림사로 찾아와 모처럼 즐겁게 회포를 풀었습니다.
스님은 헤어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을 배웅하며 청담(淸談)을 나누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호계 다리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37년 만에 다리를 건너버린 것입니다.
이를 안 세 벗은 크게 웃었는데 거기에서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후 이 고사를 화가들은 그림으로 그렸고, 시인은 시로 노래했지요.
호계(虎溪)라는 계곡에 있었다고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동진 시대라면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당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알고, 더 다양한 역사를 알고, 더 많은 생각들을 알고 있습니다.
도연명과 육수정과 혜원 스님만 만날 일은 아니지요.
이번 가을 아름다운 계곡 옆에서 좋은 벗들과 청담(淸談)을 나누는 건 어떨까요.
멋진 만남과 푸른 대화에 경계를 잊고, 시간 가는 것도 잊을 수 있다면 인생에서 그보다 더 즐거운 시간은 없을 듯합니다.
앞에서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건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며, 아니 경계를 잊어버리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가을이 그러하듯
푸른 하늘이 없는 듯
누운 날
가벼운 눈인사처럼
와 노니시라
온다는 약속도
간다는 말도
잊어버리고
은사시 옆 개울물
바위틈 가을이
그러하듯
바람만 알고
잠시 머물다 가는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