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와 체르마트를 지나며
비 내리는 스위스의 아침.
유스호스텔 작은 베란다 끝에 데롱데롱 매달린 빗방울이 오늘따라 참 사랑스럽습니다.
누군가는 여행이 풍경을 보는 일이라 말하지만 저는 사람을 지나고 마음을 지나 결국 나를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 여행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스위스 길은 참 비쌌습니다.
밥 한 끼 먹는데 30프랑. 우리 돈으로 6만 원 가까이. 커피 한 잔과 빵 하나를 사 들고 앉아도 10프랑이 훌쩍 넘어갑니다.
처음엔 물가에 놀라고 두 번째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숨 쉬고 세 번째쯤 되니 그냥 웃음이 나더군요.
아 오늘은 빵 하나가 만 원이 넘는구나.
그렇게 스위스 물가에 조금씩 적응해 갑니다.
유스호스텔 식당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배낭을 멘 젊은 여행자들. 등산화를 벗으며 웃는 노부부. 젖은 우산을 접으며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다들 자기 인생 하나씩을 품고 이 먼 곳까지 흘러왔겠지요.
체르마트의 밤은 너무 고요하고
창밖엔 흐린 구름이 걸려 있었고 마테호른은 끝내 얼굴을 다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자연도 그렇고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을 때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요.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좋은 사람도 있었고 오래 아픈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위로받는다고들 하지만 반대로 가장 깊은 상처 또한 사람에게서 받습니다. 많이 준 만큼 많이 아프다는 말이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압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친해졌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결국 서로의 손톱으로 상처를 남기는 일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으니까요.
사람들은 비밀을 지켜주지 못한 상대를 원망하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을 너무 쉽게 내어준 자신을 더 아파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스위스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살아갈 수 있다고. 그리고 저는 그 방법을 신앙 안에서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기도하고 기다리며 받아들이는 법.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는 법 말입니다.
유스호스텔 침대에 누워 창밖 빗소리를 듣다 보면 문득 어린 시절 생각도 납니다.
시골 냇가에서 뛰놀던 시간들. 비 오는 날 처마 끝 빗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기억들. 결국 사람은 멀리 떠나도 자기 마음이 자라난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가 봅니다.
취리히의 아침도. 체르마트의 밤도. 비싼 물가도. 커피 한 잔도. 빵 하나도. 지나고 나면 결국 모두 삶의 한 장면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았다가 아파하고. 또 조용히 꺼내어 보내주고. 그러면서도 다시 사람을 믿고 여행을 떠납니다.
비 오는 스위스 아침. 오늘도 저는 소박하게 살아보려 합니다. 있는 만큼 나누고. 할 수 있는 만큼 위로하고. 둥글둥글 모난 마음들을 조금씩 깎아가면서.
여행은 결국 풍경보다 사람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그 배움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긴 여행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