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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의 변화
오늘은 주일,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교인들은 오지 못하는 텅 빈 예배당에서 전도사님과 단 둘이 예배를 준비한다. 카메라 앵글은 괜찮은지, 마이크 볼륨은 적당한지 살펴본다. 새로 설치한 촬영용 조명이 너무 밝은 것 같아 전구를 몇 개 빼놓는다.
시간이 되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으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방송을 시작한다. 교인들은 유튜브 화면으로 나를 보고 있지만, 내 앞에는 오직 카메라만 있을 뿐이다. 이 상황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혼자서 찬양도 하고 설교도 하며 예배를 인도한다. 코로나가 불러온 비대면 시대에 작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흔한 풍경이다. 모든 목사가 유튜버가 되는 순간이다.
코로나 때문에 나타난 교회의 변화는 온라인 예배만이 아니다. 성찬식과 세례식을 못한 지 오래다. 어린이들은 전도사님이 올린 영상을 보며 집에서 각자 예배를 드리고 있다. 얼마 전 청년부는 각자 자기 방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며 줌(zoom)으로 온라인 모임을 했다. 어느 교인이 몸이 아플 땐 전화로 쾌유를 기도하는 온라인 심방을 했다. 지난번 공동의회는 단톡방에서 진행되었다. 전교인을 단톡방에 초대해 안건을 올리고 투표 기능으로 활용하며 의결했다. 이 모든 변화가 여전히 많이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다들 천천히 적응해가고 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과연 교회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것에 끝이 있듯, 코로나도 끝이 있다. 과거에도 팬데믹은 있었지만 인류는 결국 극복했고 교회는 다시 모일 수 있었다. 코로나도 그렇게 된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분명히 백신과 치료제는 개발되고, 이전처럼 교회에서 서로 악수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고 함께 모여 밥 먹을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분명 이전과 다를 것이다. 왜냐면 코로나를 통해서 우리는 잊지 못할 공통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비대면 신앙생활이다.
코로나는 신앙생활의 주도권을 목사에게서 교인에게로 넘겨줬다. 목사는 발열 증상이 있는 교인에게 주일날 교회에 오라고 강요할 수 없다. 목사는 주일 11시에 예배당에서 엄숙하게 예배 영상을 찍어 올리지만, 편한 시간에 소파에 기대어 스마트폰으로 자기 맘에 드는 다른 교회 목사의 설교를 골라 듣는 교인을 말릴 수 없다. 목사는 코로나 때문에 무급휴직당한 교인에게 십일조를 요구할 수 없다. 언택트(untact) 시대에 과거와 같은 대중 동원 이벤트 목회는 불가능하다. 비싼 돈 들여서 크고 화려하게 지은 예배당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교회 생태계의 전환
비대면 시대의 신앙 경험은 교회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오래전부터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라는 무시무시한 독촉이다. 코로나가 나타나서, 그동안 묵혀두었던 과제를 이제 안 하면 죽는 것으로 만들었다. 바로 교회 생태계의 전환이다.
교회 생태계의 전환을 처음 떠올린 건 2010년경이다. 당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많이 보았다. 제왕적 목회의 병폐, 목사의 재정 비리와 도덕적 일탈, 교회의 신뢰도 추락, 교세의 정체와 하락. 이렇게 도미노 쓰러지듯 한국교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목사 개인의 저열한 윤리의식이나 개별 교회의 왜곡된 구조 때문일까.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너머에 있다.
성장주의 목회가 문제다. 전도와 부흥이라는 명분 아래 한국에는 대형교회, 그리고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이렇게 두 교회만 존재하는 듯했다. 모이라고, 헌금 내라고, 건물 짓자고 교인들을 닦달했다. 커지고 싶어서, 유명해지고 싶어서, 힘을 갖고 싶어서 목사들은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성공하는 교회는 많지 않았다. 전도는 사람이 아니라 건물이 하는 거라며, 감당 못할 빚을 져서 과도하게 큰 예배당을 짓고는 결국 이자도 못 내서 이단에게 경매로 넘어가는 교회가 많았다. 왜 성장주의 목회가 통하지 않았을까? 목사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일까?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왜 교회에 젊은 사람들이 없을까? 30-40대 교인들은 군부독재를 경험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학교를 다니면서 권위주의를 향한 비판의식을 키웠다. 그들에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반공 극우 근본주의 신앙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결국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모독하는 설교에 분노했고, 국정 농단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매도하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대 청년들은 더 그렇다. 얽매이고 구속받는 결속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들에게, 전체주의적 공동체를 강요하는 교회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콘텐츠를 맞춤 소비하려는 그들에게, 일방적인 설교는 소용이 없다.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리는 이들에게, 문자언어 세대의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 문화를 전달하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교회에서 청년과의 소통이 실패하는 원인은 세대 차이가 아니라 문화 차이에 있다. 10년 넘게 청년 목회자로 사역하며 발견한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변화된 시대에 발맞춰 선교적 교회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다. 교회의 본질은 성장이 아니라 선교다. 선교는 교회 사역의 일부가 아닌 전부다. 선교는 교회가 대안 공동체가 되고, 교인의 삶이 세상과 구별될 때 이뤄진다. 성경과 교리를 선교의 상황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낯선 자를 환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 낮은 자를 존중하고 다른 문화의 사람을 품는 일, 이것이 선교다. 멀리 가는 것뿐 아니라 우리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의 문화를 고려하고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어울리고 스며드는 일상이 선교다.
한국교회는 진작에 성장주의를 포기했어야 했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며 선교적 교회로 변모해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 과제를 거부하거나 미뤄뒀다. 이제 코로나가 나타나서 빨리 하라고, 안 하면 죽는다고 재촉한다. 코로나 덕에 교회 생태계의 전환은 필요가 아닌 당위가 되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
변화는 항상 두렵다. 교회의 전통을 바꿔도 되나? 너무 위험한 짓 아닌가? 걱정 마시라. 나는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교회가 늘 시대에 적응하며 변화를 거듭하며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 전통을 버리고 주일을 지키기로 했다. 세례는 원래 몸 전체를 물 속에 담그는 침수례(침례)만 있었는데, 이후 상황에 맞게 물을 머리에 뿌리는 살수례(세례)도 가능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의 7성례 중에서 2성례(성찬과 세례)만 지키기로 했다. 하긴 교회에서 통기타를 치고 강대상에 드럼이 올라올 때 장로님들이 노발대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어떤가? 십자가 자리에 스크린이 걸리고, 종이 책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봐도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면 코로나 시대에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의 구조부터 생각해보자. 그동안 교회는 중심(center)의 역할을 했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마을 중앙에 교회가 위치하고 그 지역 신앙과 삶의 중심 역할을 한다. 도시도 그렇다. 교회가 동네의 중앙에만 위치하는 건 아니지만, 신앙인에게는 종교 생활만 아니라 모든 일상의 중심에 유형의 지역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바람직한 모습이지만 간혹 부작용도 나타난다. 교회에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면 금단현상마저 나타나는 종교 중독의 모습을 코로나 정국에서 이미 수차례 보았다.
이제 교회는 센터가 아니라 플랫폼(platform)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플랫폼이란 승강장을 뜻하는데, 마치 지하철이 교통수단과 승객을 연결하듯이, 생산과 유통과 소비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유튜브, 배민(배달의 민족) 앱처럼 콘텐츠나 서비스를 소비자들과 연결해주는 무형의 공간이다. 어떻게 교회가 플랫폼이 될 수 있을까?
“주날개그늘교회는 어디에 있나요?”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2016년 개척할 때 교회의 공간을 두 곳에 뒀다. 그래서 교회를 검색하면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과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이렇게 두 군데가 나온다. 코로나 전에 대면으로 예배드리던 상황을 기준으로 보면, 주일예배는 탄현동 고양시 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모인다. 정발산동에는 교회 사무실이 있고 새벽기도회를 드리는 평일 모임 공간이 있는데, 여기 명칭은 ‘윙윙발전소’이고 입구에 조그맣게 주날개그늘교회 명패가 붙어 있다. 그래서 교회 방문자들에게 장소 안내하기가 힘들고 택배기사마저 짜증내기 일쑤다. 상가를 임대하든가 해서 한 장소에서 주일예배와 평일 모임을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했을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하기 위해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가 교회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영적 네트워크가 교회다. 마치 전국 지하철 노선이 정거장을 거치듯이, 유형의 제도로서 교회는 성도 네트워크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우리 교회 15개 목장(소그룹)이 작은 플랫폼이고 주일예배 공동체가 큰 플랫폼이다. 사실 이렇게 교회 구조를 짰다고 해서 교회의 유형적 중심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교인들은 여전히 장소 중심으로, 목사 중심으로 교회를 사고한다. 그러다가 코로나를 맞았다. 이제 진짜로 성도의 일상이 철도망이 되고 온라인 예배가 플랫폼이 되는 시대를 준비해야만 하는 때가 됐다.
교회의 플랫폼 역할에서 핵심은 콘텐츠
어떻게 교회가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요즘 상상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나누자면, ‘구독 경제’를 교회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구독이란 매달 일정액을 내고 신문이나 잡지 등을 주기적으로 받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영화, 음악, 식품, 옷, 신발, 화장품 등 문화상품이나 생활용품뿐 아니라 심지어 고가의 명품이나 자동차까지 월정액을 내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유 경제와 공유 경제를 뛰어넘는 개념이 구독 경제다.
교회도 구독하는 것이 있다. 바로 주보다. 통상 주 1회 예배드리고 그때마다 주보가 나온다. 종이 인쇄가 아닌 온라인 뉴스레터 형식의 틀에 온라인 예배 링크, 교회 소식, 교인 동정, 중보기도 제목, 신앙 성장을 돕는 추천 유튜브 영상, 주목할 만한 뉴스, 추천 도서 등의 콘텐츠를 잘 큐레이팅 해서 교인들에게 제공하면 어떨까? 카드 뉴스 형식으로 해도 좋겠다. 여하튼 교회가,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해보자는 얘기다.
사실 플랫폼보다 중요한 건 콘텐츠다. 무엇을 전하고 나누는 플랫폼이 될 것인가? 사실 이 점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다. 솔직히 교회가 제공하는 콘텐츠의 폭은 매우 좁다. 기껏해야 설교, 찬양, 성경공부, 신앙강좌 정도다. 지난 수십 년 간 기독교는 미디어를 반대하는 입장을 고집했던 터라, 결국 미디어를 통해 전달할 콘텐츠의 기근을 맞이했다.
모태신앙으로 평생 교회의 사람으로 살면서 가졌던 불만은 엄숙주의였다. 왜 기독교인은 이리도 진지하기만 할까? 웃기고 재미있고 신나는 교회 콘텐츠는 왜 보기 어려운 것인가? 그래서 시작한 게 팟캐스트 <기독교 예능, 응급처치>다. 성결대학교 채플에 강사로 갔다가 앞 타임 강사와 인사를 나눴는데, 그가 힙합 뮤지션 아이삭 스쿼브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외모와 패션, 타투와 말투가 인상적이었는데, 나중에 인터뷰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쇼미더머니〉가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 뉴스앤조이로부터 기독교인 래퍼들을 연속 인터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이 비와이였고, 그다음이 아이삭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기독교 문화에 대한 공통의 문제의식을 발견했는데, 그게 결국 엄숙주의를 무시하는 B급 기독교 예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모아졌다. 결국 여차여차해서 시작한 방송이 어언 4년이나 되었다. 주로 한국교회의 왜곡된 신앙과 문화를 꼬집는 내용을 다소 경박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다루는데, 악플도 있지만 감사하다는 댓글이 더 많이 달린다.
기독교 콘텐츠에 대한 또 다른 삐딱한 생각은 왜 목사만 말을 많이 하냐는 것이다. 교회 콘텐츠는 주로 목사들이 만든다. 물론 성경이나 신학에 관해 아는 게 많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사실 교회 안에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을 잘 전할 수 있는 평신도도 많다. 그래서 만든 게 <주날개라디오>다. 주날개그늘교회 팟캐스트 안에 있는 코너인데 교인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간증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신앙의 여정을 걸어왔는지, 앞으로의 소망은 무엇인지 등을 이야기하는데, MBC <라디오스타>의 포맷으로 CBS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하는 듯한 구성이다. 목사와 교인이 격 없이 낄낄거리며 대화 나누는 인터뷰였다.
요즘 염두에 두고 있는 유튜브 콘텐츠는 가칭 <목사님은 너무해>다. 이건 나와 아내, 그러니까 목사와 사모가 나와서 신앙 상담하는 프로그램이다. 역할을 분담해서 사모인 아내는 사연자의 고민에 대해 친절하게 공감하고 위로하지만, 목사인 나는 성격대로 사연자가 현실을 직면하도록 뼈 때리는 말을 건네는 콘셉트이다. 그래서 제목이 ‘목사님은 너무해’다.
‘온라인 공동체’가 가능할까?
이런 질문을 받았다. ‘교회는 공동체인데,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동체가 가능할까요?’ 얼굴을 마주하고 밥도 같이 먹고 친밀하게 교제해야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온라인에서만 만나서 공동체가 될까?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런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본다.
‘나모스 클럽’(www.namos.org)이라는 웹사이트가 있다. 내가 1999년에 만든 신학 전공 해외 유학생 커뮤니티다. 신대원 시절, 유학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정보들을 모아 두는 개인용 인터넷 카페로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중에는 초대형 커뮤니티가 됐다.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유학 정보를 공유하고 신학 토론도 하고 해외 생활정보도 나누면서, 신기하게 인터넷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공동체성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다. 진실한 나눔과 격려와 위로가 이뤄지는 감동도 체험했다.
팟캐스트 <기독교 예능, 응급처치>에서도 공동체성을 경험을 하고 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청취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낸다. 얼마든지 무료 청취가 가능한데 말이다. 모아보니 1년에 수백만 원 된다. 편집자 인건비, 게스트 사례비, 녹음 후 밥값, 방송 제작비로 사용한다. 그리고 오프라인 공개방송을 하면 별다르게 광고를 안 해도 수십 명이 모인다. 누가 개설했는지 모르는 몇 개의 청취자 오픈 채팅방이 돌아가고 있고, 지역별 모임도 열리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두 명의 진행자가 아닌, 이름 모를 청취자들의 자발적 헌신으로 이뤄지고 있다. ‘나모스’와 ‘응급처치’의 사례를 보면서 비대면 상황에서도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오프라인에서 대면하는 공동체만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온라인상의 ‘길드원’(인터넷 게임에서 쓰이는 말로 길드의 구성원을 뜻함-편집자)과도 두터운 친분을 나누며 자란 세대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백종원은 게임 길드원을 자기 회사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질문도 들린다. 유튜브로 설교해도 되나? 설교 자료로 영상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 영상 자체만으로 설교가 가능한가? 설교는 기본적으로 스피치이고 영상 자료는 보조 수단에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닌가? 전통적인 설교 개념에서는 그게 옳아 보인다. 설교자는 인격으로 설교해야 하기에 영상 자체가 설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떠오른다.
나는 프레지(prezi)로 6년간 설교했다. 2010-2016년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로 있을 때 300회 넘는 모든 설교를 온라인 프레젠테이션 도구인 프레지로 만들었다. 프레지는 줌인, 줌아웃하며 모션으로 공간관계를 활용하여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도구다. 지금은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는 처음 보는 신기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발견한 것은 같은 내용의 설교라도 전달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청년은 친구 따라 교회 놀러 왔다가 설교 내용이 아니라 프레지의 움직이는 그림이 신기해서 그것을 보려고 매주 예배에 나왔고 결국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았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소위 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린다. 구술언어 시대의 고대인들에게는 사제가 전하는 신화가 설득력이 있었다. 문자언어 시대의 근대인에게는 지식인의 이성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세대인 지금의 20대는 미디어가 전해주는 영상에 매혹된다. 물론 중요한 건 내용이지만 전달 방식도 무시할 수 없다. 더 이상 뮤직 비디오가 음악을 전달하는 보조 수단이 아닌 것처럼 때로는 미디어 자체가 콘텐츠인 경우도 많다. 설교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아도 영상이 설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복음 전파하여 영혼 구원하는 게 설교의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영상만으로도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로 향하는 물음
지금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그럴수록 생각의 틀을 깨는 창의적 영성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부른다. 영적 전쟁은 상상력 전쟁이다. 사탄은 계속 우리의 생각을 가둔다. 돈이라는 틀에, 전통이라는 감옥에, 욕망이라는 방에 가두고 그 이상을 생각 못하게 한다. 과감하게 깨부수고 나와야 한다. “아니, 왜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거침없이 나아가다 보면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신학이다.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의견을 구하자. 그들의 책을 읽자. 사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우리가 처음 겪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사를 더듬어 비슷한 문제를 극복한 신앙 선배들의 사례를 발견하고 교훈을 찾아보자. 혼자 가면 오래 못 간다. 같이 가야 한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SNS를 활용하여 서로 소통하면서 같이 길을 찾아보자.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본질을 알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서 여태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 근본 질문, 단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대단히 신학적이고 어려워서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그래서 마주하지 못하고 묵혀왔던 질문이다.
본질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질문을 통해 비본질을 제거하면 알 수 있다. 비본질이란 무엇인가? 형식과 관행이다. 이를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럴까?’ ‘이게 맞나?’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가톨릭 교회를 향해 던졌던 질문이다. 주일이 그리스도인에게 유일한 신앙의 시간인가? 왜 신앙의 공간은 예배당이어야만 하는가? 목사가 제사장인가? 그 또한 평신도 아닌가? 이렇게 캐고 들어가면 본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삼위일체의 틀로 교회와 예배에 대해 질문하면서 비대면 시대에 새로운 교회와 신앙을 상상하는 이에게 지침이 되는 음성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과연 우리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사는가? 우리 교회는 성자 그리스도의 몸인가? 거룩을 지향하고 분열 않고 일치하며 섬김 받기보다 섬기는가? 우리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인가? 하나님은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나? 우리의 예배는 성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가? 예배를 통해 성자 예수님을 따르기로 다시금 다짐하는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선교를 위해 일상으로 흩어지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첫댓글 낯선자를 환대하고,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낮은자를 존중하고 다른 문화의 사람을 품는일...
혼자가면 오래 못가니 같이 가야합니다.
공통체와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