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전인 1988~89년도에 중앙대학교 앞 영빈 커피숍(지금은 편의점)에서 DJ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가을만 되면 군대 간 남자친구를 생각하며 토니 올란도와 앤드던(Tony Orlando & Dawn)의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참나무에 노란리본을 달아주세요)라는 노래를 신청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이렇듯 노란리본은 단순한 형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얼마 전 세월호에 대해 지겹다는 사람을 만났다. 노란리본이 지겹다고 했다가 이제는 최순실 뉴스도 지겹단다.
이런 이들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먼저 노란리본은 세월호 학생들을 위한 기다림이다. 우리 국가가 인정한 교육과정 중 하나인 체험을 위한 수학여행을 가다가 세상을 달리한 어린 학생들에 대해 "놀러다다가 죽었다."다거나 "이 세상에 그것은 교통사고나 마찬가지다."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은 그런 맥락을 모르거나 진영논리에 갇혀지내는 사육된 사람이다.
개인들의 친목이 아니라 공적인 일, 즉 우리 국가가 인정한 그래서 교육부가 의도한 교육적 체험 도중에 국가와 어른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느라 사고를 초래하고, 사고 후에도 대통령 이하 누구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는 최소한 몇 명이라도 생환하기를 기다려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기다림처럼 큰 사랑의 실천은 없다. 노란리본을 만들며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 일은 집으로 오는 이를 그리는 마음이다. 물론 노란리본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만 기다린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대처하지 않은 무기력한 우리 자신에게 주는 반성이기도 하다.
"이제는 모두 이 세상에서볼 수 없지만 잊지 않았노라고, 기억하고 있노라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노라고"
자발적으로 노란리본 다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을 보면 아직 교육자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역시 박근혜 게이트라고 명명한 최순실 사태는 지겨워서 눈 감고 마는 일이 되서는 안 된다. 세월호 때에도 대통령이 업무 시간 중인 7시간 동안 사적인 무언가를 위해서 공적인 일을 무시했다. 사람들은 정작 자기가 알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상황도 모르고 나타나 "구명조끼 입었다는 데 그렇게 구하기 힘드냐!"고 생뚱맞은 말을 했을 때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난 국가를 국난으로 만든 거대한 재난이 바로 공적인 일을 아주 작은 사적인 일로 희생시킨 결과이다.
반성, 그리고 학습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물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기억하려고, 또 그것을 반성하여 고치지 않고 넘어가려는 자기 태만이 우리를 위기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먼저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당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덕과 지혜를 추구하시오.
국가의 이익을 돌보기보다 국가 자체를 돌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어떤 행동을 준수해야 할 때 할 순서요."(소크라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