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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매조(呵佛罵祖)-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다>
<벽암록(碧巖錄)> 제4칙에 실려 있고,
그 외에 <종용록>, <선문염송집> 등에도 실려있는 공안이다.
‘가불매조(呵佛罵祖)’란 말을 문자적으로만 풀이하면
꾸짖을 가(呵), 꾸짖을 매(罵)‘
부처를 꾸짖고 조사(祖師)를 욕하다’가 된다.
헌데 이 말이 나온 것엔 연유가 있다.
중국 당나라시대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가
자기를 찾아왔던 덕산 선감(德山宣鑑, 782~865) 선가가
가고 난 뒤, 수좌들에게 말을 했다,
「시자장래유파모개두(是子將來有把茅蓋頭)
가불매조거재(呵佛罵祖去在) ― 이 자가 앞으로 초막을 짓고
앉아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며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임제할 덕산방(臨濟喝 德山棒)’의 명성에 어울리는
활구(活句)이며, 언어폭력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격외구(格外句)이다.
※벽암록(碧巖錄)---선승들에게 매우 중요한 심서(心書)이다.
중국 송나라 때 설두 중현(雪竇 重顯, 980~1052)이 지은 송고백칙(頌古百則)에
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을 붙여
출판한 공안집(公安集)인데, 화두(話頭) 100칙(則)을 모아서 10권으로 만들었다.
이는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수시(垂示)---일종의 서문이다.
※착어(着語)---촌평. 공안(公案)에 붙이는 짤막한 평.
※평창(評唱)---평론과 제창(提唱-어떤 일을 처음 주장하는 것)을 말함.
※격외구(格外句)---일종의 선문답으로 정해진 틀 밖의 말, 즉 개안(開眼)하게 하는 말.
위산 영우 선사의 예언대로 덕산 선사는 후에 어느 날
낭주(朗州)의 덕산원(德山院)에서 상당설법을 하면서 이렇게 설파했다.
「아저리(我這裡) 불야무(佛也無) 법야무(法也無) ―
내가 있는 이곳에 부처도 없고 그 가르침도 없다.」라고 했단다.
과연 이 법문을 보면, 위산 선사가 덕산을 잘못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덕산 선감 선사는 용담 숭신(龍潭崇信, ?~850) 선사의 제자로서
<금강경>에 통달하고 있어서, 속성이 주(周)씨였기에 별명이
주금강(周金剛)으로 널리 알려진 학승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밑천으로 용담 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깨우침을 얻기 전까지 중국 내 사찰들을 다니면서
당시 유명한 선승들과 법(法)을 겨룬 일화로 유명하다.
이 공안은 용담 선사를 만나기 이전에 법론쟁(法論爭)을 위해
찾아갔던 위산(潙山)에서의 이야기이다.
위산 영우 선사는 온건한 사상의 소유자이고, 선의 공사상(空思想)을
일상생활에서 윤리적으로 실천하는 근엄한 도덕가였으며,
덕산의 스승인 용담 선사와 같은 반열의 인물로 위앙종(潙仰宗)의 개조이다.
헌데 이 일화는 덕산이 용담 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
주금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오만방자하며 분별에 가득 찼던
시기의 사건인 만큼, 이 공안을 참구할 때에는
이런 덕산의 경지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해서 이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덕산 선감(德山宣鑑) 선사가 위산(潙山)에 도착해
보따리를 옆에 끼고 법당에 올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법당을 한 바퀴 돌고
“무무(無無) ― 아무도 없구나.”라고 말하고 나갔단다.
덕산이 당시 훌륭한 선승으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한 위산과
한바탕 법론(法論)을 펼칠 각오로 법당의 동과 서를 오가면서
위산을 찾았지만, 아직은 분별의 장막에 갇혀
깜깜한 덕산의 눈에는 분별지(分別智)를 벗어나
초월지(超越智)의 경지에 들어선 위산이 보이지 않는지라,
“아무도 없구나”라면서 돌아서고 말았다.
<금강경>에 대한 지식만 가득할 뿐,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에 공(空)한 만법(萬法)의 자성(自性)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만법의 공한 자성과
스스로의 자성이 합일된 경지에 있는 위산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바로 「시견유시불견유불(豕見唯豕 佛見唯佛) ―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라는 격이다.
그런데 법을 논할 사람이 없다며 산문 밖으로 나간
덕산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생각해보니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위산과 법론(法論) 없이 돌아가는 것이 너무 성급했다는 후회가 드는지라,
주금강이란 소문대로 나름의 경지에 오른 교학자로서,
비록 깨달음은 얻지 못했을망정 그동안 쌓은 해오(解悟)의 경지가 있으니
어찌 그냥 물러나겠는가.
이에 덕산은 “너무 경솔했구나”라고 반성을 한 후,
정중히 위의를 갖추고 다시 위산과 법론할 요량으로 법당으로 돌아가니,
위산이 좌정해 있었다.
이에 좌구(坐具)를 불쑥 내밀며, 먼저 “스님”하고 부르니,
위산은 대답은 하지 않고 불자(拂子)를 집어 드는지라,
분별에 가득 찬 덕산으로서는 위산의 무응답을
감응(感應)할 수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할(喝)’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법당을 나가 짚신을 신고 산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좌구(坐具)---수행자가 앉거나 누울 때, 또는 부처나 스승에게 예배할 때
방바닥에 까는 직사각형의 베. 비구가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할 생활필수품(6물)의 하나로
방석과 요를 겸용하는 깔개이다.
※불자(拂子)---짐승의 털, 삼(痲)등으로 만든 일종의 먼지를 터는
총채와 비슷하다. 선(禪)에서는 마음의 잡념을 쓸어낸다는 상징물로서
고승이 법상에서 법문을 할 때 지니는 의식용 불구이다.
그런 후 저녁에 위산이 수좌에게 묻기를,
“아까 왔던 그 자는 어디 있는고?” 라고 하니,
수좌가 말했다. “그 때 법당을 나가 짚신을 신고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위산이 말하기를, “이 자가 앞으로 초막을 짓고 (그 안에)앉아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며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상대방의 부름에 무심코 대답하는 것을 ‘무심의 작용을 통해
자성(自性)을 내보이는’ 감파(勘破)라 하는데,
도인들 간의 법거량(法擧量)에서는 상대방의 부름에
교감(合一)을 이루는 선답(禪答)을 내는 방편으로 유행했었다.
따라서 덕산의 부름에 위산이 불자를 든 것도 이런 방편의 하나였다.
비록 증오(證悟)는 모르지만 많은 선객들과의 논쟁과정에서
선문답의 방편을 많이 보아온 덕산인지라, 불자를 든 위산의 뜻 -
논리를 뛰어넘는 선문답의 의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감파(勘破)---점검, 검사, 깊은 속뜻을 알아차리는 것,
교학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에 가득 찬 불교학자로서,
경전은 도외시한 채 교외별전 불립문자(敎外別傳不立文字)라며
참선에만 매달리는 선승들의 어리석음(?)을 깨뜨리겠다는 각오로
강남으로 내려온 덕산이지만, 논리를 뛰어넘는 위산의 방편을 보자
논리적으로 법을 논쟁하려는 덕산의 입장에서는 위축돼,
더 이상 법론쟁(法論爭)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할(喝)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 것이다.
위산 역시 덕산의 명성을 익히 들었으니,
덕산과의 한판 법논쟁(法論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선지식들 간의 법거량이 아니라 불경(金剛經)에 대한 논쟁이라 해도
위산 같은 대덕(大德)이 패할 리야 없겠지만
주금강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덕산이기에
위산도 어느 정도 긴장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산이 덕산의 부름에 나름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할(喝)을 하면서 법당을 뛰쳐나가니,
위산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지만, 아여(我汝)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인 위산이 덕산의 됨됨이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지금은 덕산이 증오(證悟)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해오(解悟)의 분별에 갇혀 저렇게 천방지축 나대지만,
조만간 깨달음을 얻으면 인적이 드문 산봉우리에
초암을 짓고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며 상식적인 불교를 부정하고
가불매조(呵佛罵祖)하는 큰 선지식으로 거듭날 것을
지레 짐작하고 예언을 한 것이다.
과연 위산 영우 선사의 예언대로
후에 어느 날 덕산은 상당법어를 하면서 이렇게 설파했다.
「아저리(我這裏) 불야무(佛也無) 법야무(法也無) -
여기에 부처란 없다. 법 또한 없다.
달마시개노조호(達摩是個老臊胡) 십지보살시담분한(十地菩薩是擔糞漢) -
달마는 비린내 나는 오랑캐이며, 십지보살은 똥 푸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등묘이각파계범부(等妙二覺破戒凡夫) 보리열반시여궐(菩提涅盤是驢橛) -
깨달음이란 굴레를 벗어난 범부에 지나지 않고, 보리와 열반은 나귀 묶어두는 말뚝이다.
십이분교시점귀부(十二分敎是點鬼簿) 식창지(拭瘡紙) -
십이분경의 가르침은 귀신의 장부이자 고름 닦는 종이이고,
불시노호시궐(佛是老胡屎橛.) - 부처와 노자는 똥 닦는 밑씻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여(我汝)---나와 너란 뜻.
※십이분경(十二分經)---부처님 가르침을 그 내용이나 서술형식에 따라
12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12부경(部經), 십이분교(十二分敎),
십이분성교(十二分聖敎)라고도 한다.
가히 반어와 역설의 기막힌 언설이지 않는가.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에게 얽매임이 있어서는
결코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말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어야만 읽은 경문이나 들은 법문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같은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살불살조(殺佛殺祖)’까지 들먹였다.
혜연(慧然)이 엮은 <임제록(臨濟錄)>에 실려 있는 공안으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욕설이나 살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첫 번째 살(殺)은 ‘믿지 말라’는 뜻이고,
두 번째 살(殺)은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 참뜻은 “내 마음 안에 있는 부처를 죽이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스승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다.
즉, 마음의 상[相-망상, 우상]을 멸함으로써 본래청정심을 회복해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한 제 본분을 다하라는 말이다.
‘불취어상 여여부동’이란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여여해서 동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권위에 따르는 허상뿐인 관습을 깨뜨리고 변화해야 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두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부모⋅친척을 만나면 부모⋅친척도 죽여라.
임제 문정(門庭)은 이 ‘살불살조’라는 화두 하나로
격렬하고 전광석화 같은 장군풍 가풍을 남김없이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 화두에서 살인은 육체적⋅생명적 살인이 아니다.
‘우상’으로 떠받드는 부처와 조사, 권위의 아버지와
탐애(貪愛)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정신적 살인이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아야만
글로 읽고 말로 들은 모든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의심으로 시작된 구도일지라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이고,
망설이는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두려워하는 마음 또한 없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어디 아무나 민다고 쉽게 열리는 세상이던가.
그런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나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라.’고 하는 말에서
부처나 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부처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아니라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상징적인 부처요 조사이다.
그리고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다는 것은
형체나 모양이 있는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부처나 조사에 대한
권위의식이나 고정관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망념의 중생심을
텅 비워버리고 본래의 불심(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즉, 부처나 조사에 대한 고정된 상상의 이미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들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해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의 실천으로 무한한 자기 향상을 이루는
깨달음의 실천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나 조사라는 이름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모습),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나 조사에 대한
명상(名相)과 고정관념의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본래심의 지혜로운 선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중국 당나라시대에 단하산(丹霞山)에 기거해
단하 천연(丹霞天然, 739∼824)이라 불리던 선사가 행각을 하다가
어느 추운 날 혜림사(惠林寺)에서 법당의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가 <조당집(祖堂集)>에 전하고 있다.
※조당집(祖堂集)
과거칠불로부터 석가모니불, 그리고 당나라 말 오대(五代)까지
선사(禪師) 253명의 행적과 법어․ 게송․ 선문답을 담고 있다.
952년 남당(南唐)의 천주(泉州)에서 편찬됐으며,
현재 해인사 <고려대장경> 속에 단 1본만 전해진다.
1912년 일본인 학자들이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본을 조사하다가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두고 초기 선종사 연구에서는
돈황 문헌에 못지않은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이것 역시 형상의 불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한 예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상을 부처로 착각하고 있다.
참된 부처(眞佛)는 어디에 있는가.
선에서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면서 많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느니,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라고도
하지만 많은 수행자가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있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
“만약 모양과 형색, 소리를 통해서는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고 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행자가 착각을 해서 모양과 형상을 통해
부처를 친견하려고 하고 있음을 선종에서는 철저히 책하고 있다.
대체로 선종의 가르침은 당시 중국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격렬한 반역정신이 흘러넘치는 해방사상이다.
선종의 실질적 창시자인 6조 혜능(慧能: 638∼713) 선사가
강조한 “불성엔 남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佛性卽無南北)”는
만민평등사상은 후기 봉건사회의 민권사상과 당시 신지식인이었던,
이른바 한문(寒門) 출신 신진 관료들의 ‘평등’ 갈망이 낳은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돈오성불(頓悟成佛)과 자성불도(自性佛道) 사상 또한 자급자족의
소농(小農)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한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역사적 필연이었다.
더구나 혜능 자신이 빈한한 계층 출신이었기에 더욱 절실한 지향이었다.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하는 가불매조(呵佛罵祖)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사상해방운동이며,
인불(人佛) 평등사상의 구체적 실현이었다.
이들 선사상은 8세기 이후 후기 봉건사회 분위기와 부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는 문벌 귀족이 정치⋅경제적 특권을 누리는 출신계급구조를
타파하려는 신진관료와 자작농민의 열망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불교는 이 같은 시대정신과 결합해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불교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혜능의 선종 출현은 당(唐) 중엽 이후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사회 모순, 계급 갈등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선불교는 사회⋅역사적 각도에서 보면
반(反)권위⋅반우상⋅반체제를 기조로 하는 해방사상이었다.
혜능의 선사상을 크게 보면 이 같은 사회적 요구를 종교형식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혜능이 갈파한
“중생이 곧 부처(衆生是佛)”라는 한마디에 요약됐다.
선종의 절대 평등사상은 출신 신분에 따른 품급(品級)의 차등이나
빈부의 차별 등과 같은 사회적 모순까지를 포함하는
드넓은 평등의 지평(地平)이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불교를 시작하면서 인도의 사성제도를 부정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