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향 김미화
향이 진동한다. 고만 고만한 옅은 향들 사이를 걷던 걸음이 문득 멈춘다. 향수병 하나를 통째로 깨트린 것처럼 수목원 온실 안을 가득 채운 화사한 향내가 발목을 잡는다. 향의 진원지를 찾아 코끝이 저 혼자 바쁘다. 꿀을 좇는 나비처럼 향을 찾아 연신 두리번거리는 시선이 행여나 향의 경계선을 흩트릴까 조심스럽다.
깊은 숨을 들이쉰다. 분명 이 근처가 틀림없다. 향기를 사방팔방 분수처럼 뿜어 대는 키가 나지막한 나무를 찾았다. 짙은 초록색의 잎사귀 위로 신부의 부케처럼 어여쁜 꽃무더기가 올라 앉아 있다. 보랏빛이 약간 섞인 분홍잎들이 발그레 웃는다. 개나리꽃보다 더 두툼한 꽃들이 둥글게 뭉친 눈송이처럼 오밀조밀 모여 있다. 생김새를 얼핏 보니 수국인 듯해서 무성한 이파리들 틈에 1학년 아이처럼 달고 있는 이름표부터 뒤적인다.
서향. 흔히 천리향이라 부르는 상서로운 나무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꽃나무, 심지어 만 리까지도 향이 전해져서 만리향이라 불린다니 향의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 그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다. 서향은 1316년 무렵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국할 때 우리 땅에 처음으로 가져 온 나무라고 전해진다. 향이 얼마나 좋았길래 치욕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그 먼 길에 고이 품어서 돌아 왔을까?
향기는 사람을 홀린다. 밀폐된 방 안에 서향 두 그루와 갇히게 된다면 분명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중독사할 것만 같다. 미약에 취해 더없이 만족한 얼굴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오로지 향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은 어쩐지 달콤하다. 한껏 코를 벌름거리며 서향 앞에 서서 들숨 날숨을 번갈아 쉬며 향이 배어들기를 잠시 기다린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향에 미친 그루누이다. 서향을 마주 하니 왜 그가 향수에 빠져 들었는지, 끝내 소유할 수 없었던 향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비참한 죽음을 왜 스스로 선택하는지 그제야 조금쯤 이해되었다. 그루누이는 무취의 사람이었다.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보살핌도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다. “ 이 아이는 냄새가 없어.” 라는 말 한 마디와 함께 늘 버려졌다. 더 큰 불행은 개보다 몇 만 배는 예민한 후각을 타고난 선천적 능력이었다. 탁월한 후각능력 때문에 그는 타인의 향을 원했고 기어이 살인까지 저지르고 만다. 결국 이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다. 무취로 태어난 자가 원한 것은 오직 하나, 최고의 향수 바로 사람 냄새였다.
그렇다. 독특한 체취에 사람들은 서로 끌리기도 하고 막역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 그 사람 말이야, 진짜 사람 냄새 나더라.’ 이 말이 얼마나 따뜻한 말인지 겪어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사람 냄새란 단어는 막대 향처럼 마음 바닥에서 두고두고 향기를 피운다. 향의 기억은 뜻밖에도 오래 간다. 눈을 채 못 뜬 무녀리도 냄새로 제 어미의 품을 파고 든다. 식물도 제각각 고유의 특별한 향으로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미물이어도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향을 품고 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향으로 목청껏 알리는 것이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라고 시작하는 강신재의 소설은 지금도 변함없이 풋풋한 비누 향을 풍긴다. 누구나 처음 맡은 냄새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엄마 냄새, 아기 냄새, 뽀얀 증기와 함께 퍼지는 갓 지은 밥 냄새, 저녁 밥상의 된장찌개 냄새, 햇살에 잘 마른 빨래 냄새, 비 오는 날의 커피 냄새 모든 냄새는 기억들을 감싸고 있다. 그러다가 물 위로 떠오르는 고래처럼 온갖 냄새의 진원지가 ‘기억’ 이라는 것을 향기가 가끔 일깨워준다.
서향을 마주 본다. 처음 맡은 향에 자꾸만 거나하게 취한다. 이 넓은 온실 안이 텅 빈 것 같다. 나도 점점 옅어져 사라지고 그 속을 뭉게뭉게 채우는 것은 오직 형언할 수 없이 화려한 향기뿐이다. 서향에 홀린 옛 고려 사람이 되어 조금씩 흩어진다. 이 향의 기억은 이제 무엇으로 포장되어 내게 남을지 궁금하다.
서향의 짙은 향을 욕심껏 담아도 아쉬운 걸음이 차마 안 떨어진다. 내내 머뭇거리며 근처를 벗어나지 못한다. 서향이 이리 무서운 것일 줄이야. 천 리 만 리를 떼어 놓아도 끝끝내 코 끝까지 따라 오는 것이 바로 이 서향의 향기다. 기억에 묻어 온 건지 피부에 묻어 온 건지 서향 하나가 내 마음에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목은집]에 서향의 향기를 노래한 아주 오래 전의 시 한 수가 전해져 온다. 훈향이 남아 시는 지금도 향기롭다. 소리 내어 읊어 보면 서향꽃이 만개한 풍경이 눈앞에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이 꽃그늘 아래서 잠자듯이 죽어도 좋겠다. 계절은 벌써 흥건한 향기에 취하는 봄이다. 애드벌룬 주머니에 서향 향기만 가득 담아서 한껏 부풀리고 수신인 란에 당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적고 싶다. 서향만큼 오래, 멀리 가는 기억이고 싶은 봄날에 사람 냄새 나는 당신이 그립다.
첫댓글 작품 감상 잘 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인의 넉넉하고 풋풋한 향을 새삼 음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