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살았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소크라테스와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그 식사와 바꾸겠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알고 존중히 여기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과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좋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많은 돈을 내고 해야 한다면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못하시겠습니까? 감춘 죄가 드러날까 봐서요? 오늘 바리새인은 예수님과 식사를, 그것도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바리새인은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가치 있는 일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아직 누구신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39절에서 "저가 선지자라면" 이라고 했고, 40절에서는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선지자나 선생님으로 알았을 뿐 전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대접, 또한 소홀했습니다. 손님을 청해놓고 당시의 예절대로 발 씻을 물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일 때 그 동네의 한 유명한 여인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이 여인이 유명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그녀에 대한 소개는 37절을 보시면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죄를 지은 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또 39절에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47절에서 인정하기를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종합해볼 때 이 여인은 세상에 드러난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고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그런 죄인이고 예수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찾아와서 하는 행동을 봤을 때 누구보다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뉘우치고 용서 받기를 원하는, 죄로 인해 심령이 곤고한 자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자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이 오는 곳입니다. 교회는 죄인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욕탕에 가면서 다 씻고 잘 차려입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욕탕에 씻으러 가기 때문입니다. 병원에는 아픈 사람이 가지, 아프지 않는 사람이 의사를 찾지 않듯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죄인이 나오는 것이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 같은 죄인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받길 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처럼... 우리도 이런 마음이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이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합니까. 사실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이 있기 전에 그녀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건입니다. 바리새인은 대부분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바리새인의 집에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인 여자가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인의 이 행동이 증거하는 것은 어떤 모욕과 수치를 무릅쓰고라도,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려고 하는 의지가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38절을 보시면 이 여인이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합니다. 들어왔지만 감히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합니다.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도 아니라 분명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 여인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소문으로 듣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임을 알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그저 자기 집에 초청한 손님으로, 선지자로, 선생으로 알았지만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을 구주로, 주님으로 맞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는 손님을 청하였을 때 먼저 물을 떠서 먼지 묻은 발을 씻게 하고, 이어서 수건을 준비하여 손과 발을 닦게 하고 약간의 올리브 기름을 바르도록 내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고도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물 대신 눈물로 발을 씻기고, 수건대신 머리털로 닦고, 올리브기름 대신 귀한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탄식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줄을 알았으리라" 이 부분을 제가 가진 NLT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is proves that Jesus is no prophet. 이것이 예수가 선지자가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주님이 아시고 질문합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옳다고 하시면서 이 여자가 하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이 탕감 받은 자는 죄를 꼭 많이 지은 자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죄를 크게 깨달은 자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 하였으니 죄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능히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바위도 물에 가라앉고 모래도 물에 가라앉듯이 죄는 크든, 작든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를 사망으로 능히 끌고 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죄의 무게는 얼마일까요? 오백 데나리온입니까? 아니면 오십 데나리온입니까? 나는 오십 데나리온인데 저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남의 눈의 티만 보는 바리새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죄 같지도 않은 것도 심히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크게 죄를 범하고도 담대한 자가 되지 말고 조그마한 죄라도 두려워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는 크고 작은 것보다 인식하고 깨닫는 분량입니다. 우리는 죄를 더 많이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여기고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습니다. 미워하고 저주한 것만 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며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많이 깨닫고 돌이킬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 죄를 거저 용서해주셨을까요? 오늘 비유한 주인의 생각처럼 우리가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 값은 우리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 됩니다. 힘써도 안 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도 안 됩니다.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신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것입니다. 이전에 성철스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교는 죄를 깨닫기는 하되 그 죄값을 대신 치를 자가 없다.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죄를 대신하여 예수가 희생했다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정말 대단한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발견만 한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죄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죄값을 탕감해주셨습니다. 그냥 탕감한 것이 아니라 대신 희생을 치름으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48절에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것을 본 사람들이 “저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직도 바리새인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선지자입니까? 아니면 선생님, 유대인 랍비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주인 된 집에 초청받고 오신 손님 정도입니까? 선지자가 죄를 사할 수 없고 선생이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죄를 사할 능력도, 방법도, 자격도 없습니다.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죄 용서는 하나님만 베풀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철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신앙정서를 분명히 아시는 주님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철저한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의 집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신데 예수님이 이 여인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곧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속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고 능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향해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여인의 믿음은 먼저 예수님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사하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께 나와 용서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도 그 사랑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으니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 따로 사랑 따로 가 아니라 믿음과 함께 사랑도 더해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랑하지 못하거나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전제로 하고 사랑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예수님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그 믿음이, 그 사랑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대접하시길 바랍니다. 이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눈물로 발을 닦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발을 눈물이 아니라 피로 닦으셨고 감람유가 아니라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은혜를 많이 깨달은 자가 많이 사랑하고 많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더 깊이 깨닫고 이전보다 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사랑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