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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아
손 창 섭
1
그들은 조그만 빵가게에 죽치고 들어앉아 길목을 지키고 있다. 목을 노리기 에는 이 가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전찻길에서 갈라져 들어오는 길이 곧바로 내다보였다. 머지않아 그 길로 돌아올 한 여학생을 그들은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일당은 네 사람이었다. 이번 작전(음모)의 주동자인 주시종과, 그의 단짝인 김진호와 남상철 거기에 송순영이까지 끼어 있었다. 순영은 시종의 깔치 (애인) 였다.
여학생을 잘 알고 있는 시종이, 창문 곁에 바싹 다가앉아, 줄곧 골목길에 시선을 붓고 있다. 윤 교장의 딸 혜란이 나타나면 우선 자기 패에게 선을 보이자는 것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혜란이 나타났다. 저만치서 한 손에 책가방을 들고 스적스적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일 게다.
시종은 뒤에다 대고 가만히 손짓을 했다. 모두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창가에 몰렸다.
“어때? 꽤 쓸 만하지!”
“그래두 이 아가씨 만은 못한걸!”
순영이 깰쨀거리니까,
“요게!”
진호가 살짝 쥐어박았다.
“예, 다리가 좀 굵다.”
“보통야, 저 정돈.”
“꽤 깔끔하겠다.”
“고게 멋이거든.”
“낙찰?”
“오케이!”
멋대로들 씨부리는 사이에 혜란은 가게 앞을 지나가버렸다.
그날 밤 시종의 아지트에들 모여서 모의를 했다.
그들은 혜란을 낚기로 최후 결론을 내렸다. 엔간히 힘든 작업일지는 몰라도, 근질거리는 팔뚝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호락호락 넘어오는 께사니(여자)보다는 도리어 별미일지 모른다. 더구나 혜란에게는 복수와 자원 확보라는 이중의 정략성이 딸려 있다. 참말 구미가 동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강제 납치가 있을 뿐이라고들 떠들어 댔다. 스릴은 그들에게 언제나 신선한 유혹이었다.
끝으로 아직 남은 문제가 있었다. 혜란을 공동 소유로 삼느냐, 누가 독점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공동탕이 졸 거다. 안 그래?”
순영이 그러고 세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참견 마. 넌 자격 없어!”
상철이 핀잔을 주자,
“누가 아니래. 면허장 내봐!”
시종이 시치미를 떼고 순영이 앞에 손을 쓱 내밀었더니,
“뻐기지 마 너무들. 내겐 더 존 거 있어!”
순영이 흘기고 시종의 손을 탁 쳐서 뿌리쳤다. 네 사람은 일제히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따위 언동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멋이요, 훌륭한 즐거움이었다.
“그럼 독탕이라면 누가 맡을래?”
시종이 진호와 상철을 번갈아 보았다.
“물론 나지. 진호는 다리가 굵어서 싫다구 했으니까.”
상철의 말에,
“임마, 까볼지 말구 나이를 좀 알아봐. 너 몇 살야 자아식.”
진호는 웃으면서 눈을 흘겼다. 그러나 실상 혜란이라는 께사니를 누가 독점하느나는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어느 한 여자에 대한 독점욕이란 것이 별로 강하지 않았다.
실상은 문벌 있고 돈 있는 집안의 딸인 혜란을 후려내려는 동기도 딴 데 있었다. 첫째는 혜란의 부친과 그 가문에 대한 시종의 참을 수 없는 복수심에서였고, 둘째는 요즈음 부쩍 군자금에 쪼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든든한 재원을 확보해보자는 속셈에서 였다.
혜란의 부친은 ‘자유 중·고등학교’ 의 이사장 겸 교장이었다. 동시에 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다. 은연중 문벌을 내세우는 집안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귀족적인 냄새를 고의적으로 풍겼다. 본시부터 시종은 그게 구역질 나게 아니꼬웠다. 시종의 부친은 자유 중·고교에서 경리 책임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윤 교장네와 같은 교회의 집사이기도 했다. 윤 교장은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시종이 부친의 상전이었다. 부친은 윤 교장 앞에서 보기 딱하리만큼 굽실거렸다. 서로가 그것을 충성이라고 생각했고 윤 교장은 은근히 그러기를 강요했다. 시종의 부친만이, 아니, 시종이네 온 가족은, 윤 교장네 온 가족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시종이 모친은 윤 교장네 일곱 살짜리 막내둥이에 대해서까지 깍듯이 공대를 했다. 반면에 윤 교장네 가족들은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시종이네 어른들을 향해서 툭하면 반말이 섞였다. 밸이 꼴렸다.
시종이네 집은 대궐 같은 윤 교장네 집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기역 자(字)로 된 제법 격식을 갖춘 기와집이기는 했지만, 실은 그것도 윤 교장네 소유였다. 그런 처지라, 윤 교장 댁에 조금만 무슨 별일이 벌어질 때는, 시종이 부모는 으레껏 가서 시중을 들고 거들어주었다. 양가 사이에는 이렇듯 어느새 주종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시종의 젊은 생리는 거기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윤 교장네가 우리 할아비예요, 뭐예요! 아버지나 어머닌, 덮어놓고 굽실거리구…….”
시종이 참다 못해 모친 앞에서 투덜대면,
“아, 인석아 말조심해라. 저게 온 철이 있나 없나!”
모친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시종이만은 윤 교장네 식구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대등한 입장에서 같이 뻗댔다. 고등학교 동급생인 윤 교장의 아들 근수에 대해서도 결코 눌리지 않았다. 녀석이 수재형인데다 들고 파는 바람에 성적은 좋았지만, 체력만은 도저히 시종을 당하지 못했다. 시종은 도장에 다니면서 당수 연습으로 완력과 기술을 더욱 닦아왔다.
시종과 근수는 자연 대립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서로 경계했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적인 시비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재사형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이 근수 쪽에서는 언제나 충돌만은 피했다. 한두 마디 신랄한 말을 던져놓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짙은 모멸과 묵살의 뜻을 담은 조소였다. 그때마다 시종은 밸이 뒤틀렸지만 용케 참았다. 그는 기회만 노렸다. 좀더 뚜렷한 무슨 건덕지만 생기면 대번에 해치울 생각이었다. 그저 그렇게 벼를 뿐이었다. 근수 따위의 피라미를 해치우는 건 간단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반석 같은 근수의 배경이 켕겼기 때문이다.
시종은 사람깨나 건드릴 줄 아는 도장 패와 몰려다니면서 공연히 재보는 정도로 우선 자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대소의 파탄이 속발했다. 시종이 노상에서 윤 교장을 보고도 경례를 하지 않고 외면해버린다고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훈육 주임은 시종을 닦아세우고, 교장에게 정식 사과하라고 강권하였다. 시종은 응하지 않았다.
“근수는 우리 아버지에게 경례를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두 근수 아버지에게 경례를 하지 않기루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수가 먼저 우리 아버지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저두 사과할 수 없습니다.”
훈육 주임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시종의 부친은 성난 황소처럼 훈육실로 달려들었다. 부친은 다짜고짜 시종에게 매질을 했다. 사정없이 주먹으로 후려치고 발길로 지르고 했다. 반 미친 사람처럼 당장 아들을 때려죽일 듯이 날뛰었다. 보다 못해 훈육 선생이 뜯어말렸다. 근수가 자기 부친에게 사과하지 않는 한, 자기도 죽으면 죽었지 교장 앞에 사과할 수 없노라고 시종은 끝까지 버텼던 것이다. 시종에게는 1주일간 정학 처분이 내렸다. 불량배들과 함께 몰려다닌다는 소문이 그를 더욱 불리하게 했다.
모친은 미련한 녀석이라고 시종을 나무라고 쭐쭐 울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다. 이번엔 자유 중·고등학교에 경찰의 수사 선풍이 불었다. 5천여 만 환에 달하는 밀수품과 하주를 적발하고 보니, 의외에도 그 자금의 출처가 자유 중·고등학교였다는 것이다. 일체의 장부가 압수되고, 경리 책임자인 시종의 부친이 구속당하는 동시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그러고서도 어찌 된 일인지 교장은 까딱없었다. 어렴풋이 눈치챘던 일이 있어 내막을 꼬집어 밝히고 보니, 윤 교장이 직접 밀수업자와 결탁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종의 부친은 애매했다. 뻔뻔한 윤 교장의 엄명에 의해서 엉뚱하게도 시종의 부친은 범행 책임을 혼자 걸머지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캐낸 시종은 가슴에 불이 붙었다. 잠시도 유예할 수는 없었다. 댓바람에 그는 윤 교장네 집으로 달려갔다. 시종의 눈에는 살기 띤 핏발이 서려 있었다. 그는 교장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당장에 자수하고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모든 내막을 폭로해버 리겠다고 을러댔다. 교장은 천하에 이런 무도한 미친놈이 있느냐고 노발대발하였고 가족들과 사이에 옥신각신 시비가 붙었던 끝에, 시종은 마침내 근수를 때려눕히고야 말았다.
그 다음으로 시종은 경찰에 쫓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윤 교장이 이내 경찰에 연행되었고, 신문에서는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이쯤 되고 보니, 학교를 비롯해서 윤 교장네 집과 시종이네 집에서는 동시에 난장판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2
행동을 취하려면 우선 군자금이 필요했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시종은 먼저 누이를 만나기로 했다. 여대생이었다. 학교 길목을 지키는 게 제일 간편했다. 아침 등교 시간에 시종은 누나의 학교 근처로 갔다. 4월 신학기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았다. 길이 미어지게 흘러가는 여대생들의 색채와 육체의 물결은 좀 눈부셨다. 그 속에서 시종은 이내 누이를 발견했다.
“누나!”
시종은 서슴지 않고 길모퉁이 에서 튀어나왔다.
“어머나, 시종이 너 어쩐 일이냐?”
누이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시간의 여유를 주면 귀찮아진다. 시종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씽(돈) 가진 대루 털어줘. 좀 급한 일이 있어서그래.”
누이는 그 말에는 개의치 않고,
“얘, 너 참 잘 만났다. 나하구 얘기 좀 하자!”
가까이 보이는 빵가게로 시종을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누이의 표정에는 슬픔과 노여움이 엉겨 있었다. 시종은 버티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 급해석그래. 얼른 씽이나 꺼내줘. 나중 천천히 만날게.”
누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책가방 속에서 500환짜리 두 장을 집어냈다.
“겨우 요거야. 너무 쩨쩨하게 놀지 말어, 누나.”
“얘 봐. 내가 돈주머닌 줄 아니.”
“그러지 말구 2천 환만 더 줘.”
“2천 환이 어딨니. 단 200환두 없는데…….”
싹수가 틀리면 단념도 빠르다. 시종은 핑 돌아서 걸으려고 했다. 누이가 소매를 붙잡았다.
“너 요즘 어딨니?”
“건 왜? 가담할래, 우리 패에. 누나만큼 예쁘문 팔릴 거다 제법.”
누이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그 눈에 핑그르르 눈물이 어렸다.
“너 왜 점점 못돼만 가니?”
“흥. 잘 돼가는 사람들 난 부럽잖어!”
“어 머니가 너 때문에 울화병으루 다 돌아가시게 돼서두 좋냐!”
집에 한번 들르든지, 자기에게만 거처를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시종은 누이의 손을 홱 뿌리쳤다.
“공갈치지 말어!”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걸었다.
누나를 만나 용돈을 짜내는 건 좋지만 푸념이나 집안 얘기를 듣는 건 질색 이다. 실없이 센티해지려기 때문이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자, 엿보고 있던 상철과 순영이 슬며시 따라섰다.
“얼마니?”
“투 고주빠이(500환짜리 두 장).”
시종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상철과 순영에게도 심정이 통했다. 이 러다간 금명간에 만 환 정도의 군자금도 어려울 것 같았다.
“난 그럼 이 길루 진호한테 가볼래. 하다 못해 네초(시골서 갓 올라온 소년)라두 털어야 할 게 아냐.”
상철은 시종의 눈치를 보았다.
“또 센타(남의 주머니를 뒤져서 터는 일)야! 그까짓 잔돈 부스러기가 성에 차야지.”
그러나 당장 목돈을 노릴 데는 없었다. 몇 백 환이나 몇 천 환씩이라도 긁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시종은 상철이와 곧 헤어졌다. 순영이하고 걸으며 누이동생인 시옥을 충동해서 집의 돈을 말아낼 의논을 했다. 시옥을 만나자면, 점심시간에 학교로 찾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행여나 무슨 국물이라도 바라고 순영이와 가까운 거리를 한바퀴 돌고 나도, 아직 시간이 좀 이르다. 여학교 근처에 있는 조그만 음식집 에 들어가 앉아 기다렸다.
순영이 궁금한 낯으로 물었다.
“누이가 걱정하지 않어?”
“질색야, 아주. 아판(어머니)이 울화병으루 죽어간대두…….”
“정말일까?”
“공갈야!”
단언하고 시종은 입을 씰룩했다. 덜 좋은 얼굴이다.
시종은 죽어도 집에는 발길을 않기로 각오하고 있었다.
부친도 그때,
“오늘부터 넌 내 자식이 아니다. 다시 눈앞에만 얼씬해봐라.”
그냥은 안 두리라고 호통을 쳤다. 그처럼 절망적으로 격분한 부친을 시종은 처음 보았다.
그게 바로 구류를 마치고 시종이 경찰서에서 놓여나오는 날이었다.
윤 교장의 아들 근수는 돈으로 깡패를 매수해가지고 시종에게 복수를 계획했던 것이다. 시종이 진호와 함께 그날 처음으로 순영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제법 날쌔게 생긴 두 녀석이 별안간 앞을 막아섰다. 첫눈에 그자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뭐야.”
야무지게 기세를 보 였다.
“선보러 왔다. 네가 사람을 잘 친다기.”
저쪽에서도 도전적으로 나왔다. 포즈를 잡고서는 품이 한 놈은 와리바시(당수 하는 차)에 틀림없었다. 그래도 시종은 조금도 켕기지 않았다. 어떤 놈이고 일대일이면 자신이 있었다.
“인사가 드럽다, 자식아. 어디 파냐 너희들?”
진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놈은 일시에 몸을 날렸다. 시종은 자기 쪽으로 들어오는 한 놈의 발길을 피하며 번개같이 펀치를 넣었다. 상대방이 비틀거리는 틈에 사정없이 두 번째 주먹을 안기려는데, 시종의 볼에서 딱 소리가 났다. 모로 몸이 쏠렀다. 어느 틈에 딴놈 셋이 뒤에서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판국이 글러진 걸 직감한 시종은 재빨리 몸을 사리며, 아직 첫 번 놈과 겨루고 있는 진호를 낚아채가지고 뺑소니를 놓았다. 그자들이 근수에게 팔려 목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시종은 이를 갈고 앙갚음을 꾀했다. 근수 따위 하나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자기가 직접 나서지도 않고 진호와 상철을 시켜 다구리(몰매질)를 놓게 하고 숨어서 망을 보았다. 근수는 대번에 곤죽이 되어 뻗었다. 시종의 복수라는 건 이내 알려졌다. 근수는 전치 6주일의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시종은 만족하지 못했다. 근수나 윤 교장을 아예 죽여 없애든가, 그 집에 불을 질러버리든가 그래야 후련할 것 같았다. 자신보다도 부모나 가족을 생각해서 차마 그 짓은 주저되었다.
시종은 물론 사건을 저지른 달음으로 집을 튀어나왔다. 윤 교장은 당장 시종을 잡아 대령시키라고 모친을 들볶았다. 시종의 모친은 윤 교장네 집에 줄곧 이틀을 꿇어 엎드려 울며 사죄했다. 시종의 부친은 여태 미결감에서 공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 교장은 마침내 시종을 당국에 고발하고 말았다. 경찰에서는 지명수배해놓고 의외로 사납게 나왔다. 닷새 만에 잡혔다. 그들 한 패가, 시 변두리의 어느 무허가 술집에서 계집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다. 변소에 가려고 일어섰던 상철이 별안간,
“쎄리(순사) 떴다 '’
날카롭게 외쳤다. 그들은 정신없이 뒷문을 차고 내달았다. 앞장섰던 진호가,
“자브(형사)다.”
질겁을 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마치 살인강도나처럼 소란한 속에 끌려갔다.
그들은 10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 석방되는 날 각기 보호자가 데리러 와 있었다. 시종은 얼굴이 반쪽이 된 모친의 뒤를 말없이 따라 걸었다. 집 앞에 거진 다 와서야 모친은 그동안에 부친이 보석으로 나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집에 들어가거든, 아버지 앞에 머리를 숙이구 사과해야 헌다. 그리구 암말 말구 아버지가 시키는 대루 해라.”
모친은 사정하듯 했다. 시종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친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고 그는 발길을 돌이켰다. 모친이 놀라 소매를 붙잡고 매달렸다. 시종은 뿌리치고 달아나려 했다. 모친은 힘에 겨워서 소리를 질렀다. 이내 부친과 누이가 쫓아 나왔다. 부친은 몹시 수척해 있었다. 한 손으로 시종의 덜미를 잔뜩 그러쥐고 대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부친은 시종을 뜰 복판에 메어꽂듯
하고,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발로 내리밟기도 했다. 모친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이만이,
“얼른 빌어. 잘못했다구 얼른 빌어!”
애가 다 했다. 동생들은 겁에 질려 소리를 내서 울었다. 시종은 입을 앙다문 채, 말 한 마디 없이 꼬박이 매를 맞았다. 그도 악이 받쳤다. 속으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보라는 생각이었다. 부친은 제물에 매질을 멈추었다. 숨이 찬 모양이었다.
좀 뒤에 부친은 시종을 잡아 일으켰다. 윤 교장네 집에 같이 가서 백배 사죄를 하고 용서를 빌자는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라고 시종은 생각했다. 그는 딱 버티고 선 채 응하지 않았다. 부친은 새로이 골을 내며 완력으로 잡아끌었다. 시종은 기를 쓰고 버텼다.
“이 녀석아, 우리가 뉘 덕으루 사는 줄 아냐. 배은망덕할 셈 이냐!”
모친도 울상이 되어 떠밀 었다.
“윤 교장이 우리 할아비예요! 아버지하구 어머니나 어서 실컷 그 악질 위선자 밑에서 죽도록 종 노릇을 하세요!”
시종은 참다 못해 내뱉었다. 담박 부친의 주먹이 또다시 날았다. 이제는 자식이 아니다, 눈앞에서 썩 없어지라고 부친은 고함을 질렀다. 시종은 주저하지 않고 집을 나와버렸던 것이다.
윤 교장과 근수에 대한 복수심과 함께, 시종은 부모까지도 밉고 추잡해 보였다. 저렇게도 인간이 비굴할 수가 있을까 하고 시종은 어이가 없었다.
기다리던 학교의 점심시간이 왔다. 시종은 순영을 시켜서 시옥을 데려오게 했다. 얼마 뒤에 중학교 2년생인 시옥은 순영을 따라 가게 안에 들어섰다. 반가움과 무서움이 얽힌 눈으로 시옥은 오빠를 살며시 마주 보았다.
“오빠.”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시옥은 감정을 담뿍 담아서 불렀다.
“너, 내일 학교 올 때 핀(돈) 좀 타갔구 와.”
시종은 한껏 위엄 있는 음성과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얼마나?”
모기 소리만하게 물었다.
“만 환만. 만 환이 좀 모자라두 된다.”
시옥은 절반 울상이 되어 잠잠히 있다가,
“집에선 모두들 오빠를 위해서 기도하구 있어. 오빠가 얼른 회개하구 돌아오라구.”
엉뚱한 말을 하고 눈물이 핑그르르 어렸다. 시종은 과장적인 너털웃음을 웃어넘겼다.
“나보다두, 차라리 꼰대 (부친)나 아판을 위해서 기도하라구그래. 윤 교장네 종살이를 면하게 해줍시사 하고……. 그리구, 장로요 교육가의 가면을 쓰구 거룩한 체하면서 뒷구멍으루 협잡이나 밀수를 일삼는 그 윤 교장 따위나 얼핏 지옥으루 데려갑시사 하구 기돌 드리라구 해. 알겠어!”
시종은 또 한바탕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시옥은 그러한 오빠와 순영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내일 만 환만 타갖구 올 거 잊지 말어. 알았지?”
“뭐라구 달래, 그렇게 많은 돈을…….”
“아, 학교서 가져오랜다면 되잖어. 한 주일 뒤엔 도로 갚아줄 테다. 그 대신 책임지구 해 와, 만 환만.”
시옥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오빠와 순영을 말없이 또 번갈아 보았다.
“1주일 만에 오빠가 도로 갚아준대지 않어. 나두 보증 설게.”
순영이 달래듯 거들었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기다리마. 만일 내 부탁을 어기면, 양갈보루 팔아치우구 말 테다.”
시옥은 그 말을 제일 겁냈다. 그런 짓을 못할 오빠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게다. 시종은 전에도 그런 말로 시옥을 위협해서 돈을 끌어내게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에 시옥은 풀이 죽어서 학교로 돌아갔다.
3
전찻길에서 갈라져 들어오는 길이 곧바로 내다보이는 조그만 빵가게에 시종과 상철은 밖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거기에 똘마니를 빌리러 갔던 진호가 돌아왔다.
“온 아니꼬워서. 3천 환이 돈이냐면서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구 자식 마구 으스대는 거야. 그래 혈 수 있어, 달래보다 못해 2천 환 더 썼지.”
그들은 혜란을 기술적으로 낚기 위해서 딴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그래서 약간 통하는 어느 패에게 똘마니의 후원을 청했던 것이다. 왕초에게 5천 환을 쓰고, 똘마니 하나 앞에 천 환씩 예산을 세웠던 것이 벌써 2천 환이나 초과된 셈이다.
“내 참 드러워서. 얼른 우리두 똘마닐 둬야겠어.”
진호는 몹시 비위가 상한 모양이었다.
“그래 어딨니, 그것들.”
“인제 두 녀석이 곧 쫓아올 거야.”
참말 10분도 채 안 되어서, 열대여섯짜리 두 녀석이 나타났다. 시종은 그들에게 작전을 자세히 설명해 들려주었다.
반 시간이 좀 지나서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혜란의 모양이 창 너머로 내다보였다. 본시 한적한 갈림길이긴 하지만, 마침 근처에는 딴 행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종은 두 놈에게 눈짓을 했다. 두 놈은 이내 밖으로 나갔다. 책가방을 들고 얌전히 걸어 올라오는 혜란이 앞에 심술궂게 떡 막아섰다. 그리고 비위 좋게 지분대기 시작했다. 혜란의 얼굴이 새칩해졌다. 결음을 멈추고 잠시 사내 녀석들을 노려보다가 뭐라고 쫑알거리고 비켜 가려고 했다. 한 녀석이 덥석 혜란의 손을 잡았다. 혜란이 날카롭게 욕설을 펴부으며 손을 홱 내리쳤다. 그 통에 책가방을 떨어뜨렸다. 한 놈이 그 책가방을 발길로 특 걷어찼다. 딴 놈이 그것을 성큼 집어 들고, 혜란이 걸음씨를 흉내내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약이 바짝 올라 얼굴이 빨개진 혜란은 가방을 뺏으려고 쫓아갔다. 그러나 한 놈이 중간에서 짓궂게 자꾸만 방해를 놀았다. 이때다. 계획대로 진호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여기서 악한을 퇴치하고, 연약한 소녀를 보호하는 기사가 되는 것이다. 진호는 물론 불량소년의 뒤를 쫓아갔다. 한 놈은 달아나버리고 한 놈이 그의 손에 붙들리는 것이다. 진호는 그놈의 따귀를 갈기고 머리를 쥐어박고 땅바닥에 메어꽂았다. 그리고는 책가방을 주워서 먼지를 턴 다음, 점잖은 태도로 혜란에게 건넸다. 혜란은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받았다. 똑바로 진호를 보았다. 물론 그 표정 에는 감격의 빛이 넘쳐흘렀다.
“앞으루두 조심하세요. 고 깍정이 녀석들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진호는 의젓이 주의를 주고 담담하게 발길을 돌려 걸어가버렸다. 혜란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이러한 광경을 시종 빵가게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종과 상철은 얼굴을 마주 보고 빙그레 만족한 웃음을 웃었다.
무풍지대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난 소녀일수록 올가미에 걸리기 쉬운 법이다. 노상 새침해 보이면서도 혜란은 극히 단순했다. 의외로 쉽사리 기울어져왔다.
그 뒤에 진호는 계획적으로 수삼 차나 거리에서 혜란을 만났다. 물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듯이 꾸몄다. 그때마다 혜란은 걸음을 멈추고 진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웃을 듯 말 듯 하면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의 표시를 했다. 진호도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점잖게 한번 뻥긋 웃어 보이고는 담담히 지나쳐버렸다.
“문제 없다 요건!”
진호는 속이 간지러웠다. 그러한 보고를 들은 시종과, 상철과, 순영은 손뼉을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자, 인전 익었지. 건드리면 영락없이 꼭지가 뚝 무너날(이어서 맞춘 자리가 어긋날) 거야.”
순영은 고소해 못 견디겠다는 눈치다.
“남두 다 너 같은 줄 알어. 요건 나한테 두 번 만에 떨어졌으니까. 논다니는 별수 없어.”
상철의 말에 순영이 패뜩했다.
“넌 뭐야 자식아. 시애비하구 붙어먹구 싸갈긴 자식.”
“요년이!”
제일 아픈 자죽을 건드리는 바람에 상철도 울컥해서 순영에게 덤벼들었다. 순영도 지지 않고 대들어 할퀴고 물어뜯었다. 시종과 진호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그들은 혜란을 포획하기 위한 최후의 전략을 짰다. 완력을 발동할 필요조차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없는 교외로 혜란을 유인해 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장소는 뚝섬으로 정했다.
토요일 오후, 벚꽃이 한창일 무렵이라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의 오금이 근질거릴 시기다.
시종, 상철, 순영은 뚝섬의 한쪽 가장자리에 진을 치고 앉아서 진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호는 벌써 두 시간이나 전에 혜란을 데리고 나타났어야 했을 일이다. 아마도 혜란이 녹록히 말을 듣지 않는지도 모른다.
저녁때가 거진 되어서야 진호는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혜란이 그 곁을 얌전히 따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패는 서로 눈을 꿈쩍거리며 만족하게 웃었다.
진호는 그들이 앉아 있는 근처를 모르는 체하고 지나갔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장소로 혜란을 데리고 점점 멀어져갔다.
상당한 간격을 두고 세 사람도 그 뒤를 쫓았다.
진호와 혜란은 움푹한 장소에 자리잡고 앉았다.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눈에 진호의 머리만이 보일락말락했다. 그들은 소리를 죽여가며 진호와 예란이 자리잡고 있는 근처에까지 접근했다. 거기서 지형을 이용해가지고 눈치채지 않게 그들도 앉았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주위가 어슴푸레해왔다.
진호와 혜란이 사이에 극도의 긴장 상태가 나타났다. 혜란이 질린 소리로 뭐라고 내쏘고 발딱 일어서려고 했다. 순간 진호의 억센 손아귀가 혜란을 도로 잡아 앉혔다. 혜란의 숨찬 비명이 들렸다.
시종은 주위를 살폈다. 가까운 거리에는 딴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다. 안심했다.
조금 뒤에 세 사람은 살근히(‘살며시’ 의 방언) 일어섰다. 그림자처럼 그들은 진호와 혜란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에게는 똑같이 잔인한 쾌감이 독한 술처럼 가슴을 짜르르 적셨다. 그래도 여자라 그런지 순영이만은 주춤거리며 뒤로 한 발짝 처졌다.
그들은 계획대로 무난히 현장을 덮칠 수 있었다. 혜란은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딴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얼른 눈치채지 못했다.
상철이 그 꼴을 굽어보며 사정 없이 “히히히히” 하고 소리내 웃었다. 순간 혜란이 눈을 떴다. 동시에 절망적인 비명이 새어 나왔다.
혜란은 사력을 다해 진호를 떠밀었다. 그러나 혜란은 완전히 기운이 빠져 있었다.
진호가 허리춤을 고쳐 매며 부시시 일어났다. 그들은 구면이면서 우연히 만난 듯이 알은체를 했다.
“너 아주 멋지게 노는구나!”
시종의 말에,
“너무하잖어!”
진호가 볼멘소리로 노상 거북한 듯이 게정거렸다(불평을 품은 말과 행동을 자꾸 하다). 시종은 한 달음 더 다가서며,
“아니, 이거 혜란 씨 아냐!”
눈을 흡뜨고 놀래 보였다. 그 한 마디는 혜란의 가슴팍에 비수를 꽂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고개를 돌려 시종을 쳐다본 혜란의 얼굴은 금시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혜란은 이내 고개를 무릎 사이에 푹 묻어버렸다. 혜란의 전신은 그대로 땅속에 빨려들 듯이 오그라들었다. 가느단 소리로 어깨를 추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흥, 울 걸 왜 그랬담!”
순영이 심술궂게 비꼬았다. 순결을 신주단지 위하듯 하고 있는, 소위 얌전한 규수들에게 품어온 맹렬한 질투와 반감의 표현이었다.
혜란의 울음소리가 거의 잦아질 때쯤 해서, 시종과 진호 사이에는 미리 계산된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난 정말 놀랬다. 점잖은 교회 장로님이요, 교육가인 윤 교장네 아가씨가 진호 너하구 이렇구 이럴 줄은 참말 몰랐어.”
“너들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해줘 응. 만일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면, 혜란 씨는 말할 것두 없구, 명망 높은 그 가문이 뭐가 되겠니!”
진호는 진정으로 사정하듯 했다.
“너희들은 저쪽에 좀 가 있어.”
시종은 상철과 순영을 저만치 비키게 하고 나서,
“글쎄, 야 혜란 씨의 장래나 그 집안의 체모를 생각해서 발설 않겠지만 쟤들이 잠자쿠 있을까 몰라. 더구나 상철이 형은 신문기자 아냐!”
물론 모두가 혜란이더러 들으라는 수작들이다.
“네가, 좀 잘 부탁해줘. 만일 신문에라두 났다간 이건 아주 큰일이야.”
“그러면 앞으론 너희 둘이만 좋아 지내지 말구 우리하구두 자주 얼려줘야 한다!”
“비밀만 지켜준다면 건 얼마든지.”
“그리구 말야 재들에게 우선 돈을 좀 멕여 두는 게 졸 거다. 아무리 단단히 부탁해두 그냥은 안심이 안 돼. 그렇지만 한 뭉치씩 먹구나면 책임이 있으니까 절대루 발설 못할 거다.”
“그두 그래.”
진호는 혜란의 귀에다 입을 대고 뭐라고 소근거렸다. 혜란은 잠자코 손수건에 싸들고 있던 돈을 내주었다.
“자, 우리 둘이 톡톡 털어서 7천 환 있다. 이걸로 적당히 해줘!”
그 말에 시종은 화를 발끈 내는 척했다.
“임마. 우릴 양아친(거지) 줄 알아. 아 한 여자와 가문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는 판에 7천 환이 뭐야 7천 환이. 난 책임 못 질 테니 어디 너희 맘대로들 해봐. 신문에 대문짝같이 사진이랑 나구 떠들썩해두 원망은 말어.”
진호가 당황히 시종의 소매를 붙들었다.
“얘, 이러지 말구 말해봐. 을마나 있으면 되겠니?”
“아 10만 환 안짝두 돈이야?”
“10만 환?”
진호는 깜짝 놀래 보이고 나서,
“이거 봐. 우릴 살려주는 셈치구, 5만 환 정도로 찰 좀 봐줘. 혜란 씨나 내나 어디서 10만 환이란 대금을 만드니.”
“그래. 친구지간이니 할 수 없다. 그리구 혜란 씨두 모르는 사이가 아니니까. 그럼 5만 환은 언제 되는 거야.”
진호는 혜란이와 조그만 소리로 또 속닥속닥 의논을 했다. 쉽사리 합의가 안 되는 모양이라 시간을 끌었다. 이윽고 진호는 시종이 곁으로 와서,
“내 일은 일요일 이니까, 모레 저녁 때루 해. 6시 정각.”
“장소는?”
“어디가 졸까?”
“그 빵집에서 기다리지.”
약속을 어기면 폭로해버린다는 위협조의 말을 남기고, 시종은 돌아서서 유연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가에는 복수자의 냉소가 싸늘하게 번졌다.
4
그들의 아지트인 상철의 외조부네 집 구석방에 모여 앉아, 그날 밤 네 사람은 신중한 토의를 거듭했다. 초점은 혜란을 어느 정도 믿느냐 하는 문제였다. 혜란이 집에 돌아가서 모든 사실을 부모 앞에 실토해버린다면 낭패인 것이다. 그리되면 섣불리 약속 장소에 접근했다가는 큰일인 것이다.
그들은 우선 버스 정류장까지 혜란을 바래다주고 돌아온 진호의 의향을 들어보기로 했다.
“부모나 세상에 알려질까봐, 지독히 겁을 내는 걸 보문, 사고는 없을 것 같어.”
혜란은 정말 탄로나지 않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진호에게 애원하듯 당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5만 환도 수단껏 장만해보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 혜란이 지나치게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 도리어 불안하기도 했다.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이라든지, 태연하지 못한 혜란의 거동을 가족이 눈치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진호 역시 비밀을 지키라고 굳게 다짐을 두기는 했지만, 만일 부모가 조금이라도 의혹이 생겨서 따지고 든다면 끝까지 버텨낼 만한 배짱이 혜란에게 있을 성싶지 않았다.
“결국 나두 장담을 못하겠어.”
진호는 마침내 그런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변법을 쓰기루 하자! 호락호락 빵간(유치장이나 감방) 신세를 진다는 건 말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그들은 행동의 신중을 기하기로 한 것이다.
잠시 토론한 결과 제2의 작전은 세워졌다.
월요일 오후 5시. 순영을 시켜 혜란의 집에 전화를 걸게 했다. 혜란은 이내 전화기 앞에 나왔다. 진호가 전화를 바꾸었다.
“5만 환 어떻게 됐어요?”
혜란은 조그만 소리로 되었노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말입니다. 토요일 오후에 늘러 갔던 그 장소루 돈을 갖구 곧 나와요. 사정이 있어 장소를 바꿨어요. 시간은 6시에서 6시 반 사이. 만일 약속을 어기면 내일 아침 신문에는 모조리 폭로가 될 판이요. 알았죠.”
혜란은 꼭 가겠노라고 보기 소리만한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시종을 선두로 일단 네 명은 곧 뚝섬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똑같이 낭만적인 흥분이 벅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부 활극에 나오는 갱단도 될 수 있었고,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이도 될 수 있었다.
이윽고 뚝섬에 다다른 그들은 섣부른 짓은 하지 않았다.
놀러 나온 남녀의 모양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들도 함부로 약속 장소에는 접근하지 않고, 소풍객처럼 멀리 떨어진 강변을 스적스적 거닐었다. 그러면서 눈치만 살폈다.
6시가 10분쯤 지나서다. 저쪽 변두리를 혼자 걸어오는 여자의 모양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여전히 거닐면서 그쪽을 주시해 보았다. 약속한 장소 쪽으로 점점 다가가는 걸 보니 혜란임에 틀림없었다.
“어떡혈까?”
진호가 빙긋이 웃고 세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음.”
시종은 신음하듯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들 시종의 입을 쳐다보았다. 시종은 말없이 아득히 넓은 강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펐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씩 네댓 패의 소풍객이 눈에 띄었다. 얼굴은 물론, 더러는 복장이나 남녀의 구별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먼 거리에들 흩어져 있었다. 오목한 자리에 앉아서 머리만 감실감실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하구 둘이 가자. 상철이하구 순영인 슬슬 걸어서 골프장 근처에 가 기다려.”
시종은 돌아서 걸으려다 말고,
“저자들 조심해야 한다.”
턱으로 소풍객들을 가리켰다.
혜란은 어느새 약속 장소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며 서 있었다.
시종은 진호와 나란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들은 소풍객들을 피하여 걸었다.
시종과 진호가 다가가니까, 혜란은 외면을 하고 저쪽으로 돌아섰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용케 나왔구려. 별일 없었어?”
진호가 바싹 다가서서 위로하듯 했다.
“이거…….”
혜란은 들고 있던 신문지 뭉치를 진호에게 건넸다.
“혜란에게만 수고를 끼쳐 미안해. 그렇지만 인제는 혜란이만 조심하면 우리의 비밀은 탄로나지 않을 테니 안심해요.”
진호는 돈 몽치를 시종에게 건네면서 ,
“자, 5만 환. 이걸루 잘 부탁해.”
짐짓 그랬다.
“염려말어.”
시종은 신문지를 헤치고 500환권 5만 환 뭉치를 안주머니에 간수했다. 그리고 상철과 순영이 궁금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같이 가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권했다.
시종이 앞장을 서고 진호와 혜란이 뒤를 따랐다. 혜란은 줄곧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풀이 죽어서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골프장 가까이에 와서다. 앞쪽에서 두 놈팡이가 술집 계집 같은 색시를 사이에 세우고 시시덕거리며 엇비슷이 걸어오고 있었다. 시종과 진호는 그들에게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단순한 건달패로만 보였다.
그게 탈집(탈거리)이었다. 그자들은 형사였던 것이다. 두서너 간 간격을 두고 서로 어기채고(서로 방향이 어긋나게 걸치거나 지나치고) 나섰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동정을 뒤쪽에 느끼며 시종이 몸을 돌렸을 땐 이미 늦었다. 숨이 칵칵 막힐 지경으로 억센 팔뚝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시종과 진호는 어이없게도 이렇게 해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그들은 고랑을 찬 채 똑같이 혜란을 노려보았다. 혜란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저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혜란이 잘 기억하구 있어. 목숨을 걸구 이 은혜는 기어이 갚을 테니!”
시종은 독기를 품은 음성으로 야무지게 내뱉었다. 진호도 무어라고 내쏘았다.
“이 자식, 잔말 말구 가, 어서.”
시종의 뒤통수를 얼얼하도록 형사가 쥐어박았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가가 있는 한길 쪽으로 끌려 나왔다. 몰려드는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서 걱정스레 따라오고 있는 상철과 순영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시종은 5만 환 몽치를 살짝 전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속이 탔다.
한길 어귀에 근사한 자가용 차와 두 대의 지프 차가 멎어 있었다. 시종은 움칠하고 놀랐다. 자가용은 낯익은 윤 교장의 차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 곁에는 거대한 윤 교장의 얼굴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곁에는 윤 교장의 그림자처럼 시종의 부친이 붙어 서 있었다. 분노와 절망으로 부친의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시종은 이때처럼 허수아비 같은 부친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연민 대신에 그는 부친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시종과 진호는 그 길로 지프 차에 실려 서로 연행되었다. 형사 주임 앞에서 시종은 윤 교장과 부친을 잠깐 만났다. 윤 교장이나 부친은 형사 주임과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이, 이놈을 아주 엄벌해주시우. 그냥 두었단 나중에 대역(大逆)할 놈이오. 이 은의에 반역하는 놈 같으니…….”
노기에 찬 윤 교장의 얼굴은 시종을 잡아먹을 듯이 푸르락거렸다. 한편 부친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또한 윤 교장 앞에서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는 듯이 시종에게 덤벼들어 마구 치고 차고 했다. 형사 주임이 얼른 뜯어말렸다.
“이놈을 아예 극형에 처해주슈. 애비의 권리루서 요구하는 거요.”
부친은 씨근거리며 악을 쓰듯 했다.
“너, 아버님이나 윤 교장님께 드릴 말이 없느냐?”
형사 주임이 침착한 말씨로 물었다. 시종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대해서 통할 수 있는 말이라곤 단 한 마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사에게 끌려 그 방을 나오면서 시종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냉랭하게 웃어버렸다.
“저, 저, 저놈 좀 봐…….”
뒤에서 펄쩍 뛰는 윤 고장의 목소리도 이제는 도리어 유머로 들렸다.
-끝-
2016년 11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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