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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여유 스크랩 (3) 성도(成都) 여행기
jose 추천 0 조회 56 09.08.19 21: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도(成都, 챙두)

성도는 사천성의 성도로서 인구 약 330만 명 되는 중국 서부의 중심 도시이다. 이 지역은 2000년에 시작된 중국의 서부대개발계획이 추진되는 가운데 중경과 함께 최근에 와서 더욱 약진하고 있다.

성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천성 일대에는 옛날부터 촉(蜀)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변방의 한 작은 제후국이었다. 서경(書經) 주서(周書)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방탕하고 포악했던 은(殷)의 주제(紂帝)를 토벌하기 위하여 동진하여 목야(牧野)에서 은나라 군사들을 쳐부수게 되는데 그때 연합군으로 참가하여 주(周)를 도운 나라가 여럿이 있었고 그 가운데 촉(蜀)도 들어 있다. 비슷한 내용이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촉의 역사가 멀리 은(殷)대에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촉의 시조는 잠총(?叢)이라는 왕이었고 그 부족은 누에를 수호신으로 하였다고 한다. 촉(蜀)이라는 한자는 바로 누에를 뜻하는 글자이다. 옛날부터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짰기 때문이다. 최근 성도에서 약 40km 떨어진 삼성퇴(三星堆)라는 곳에서 옛날의 성터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곳이 옛날 촉나라의 도읍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촉의 도읍이 성도쪽으로 옮겨온 것은 기원전 5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성도라는 이름은 주(周) 문왕(文王)의 조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흉노의 약탈을 피하여 일족을 이끌고 기산(岐山) 산록으로 와서 정착하고 마을과 성곽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이때 ‘일년성읍 이년성도’(一年成邑 二年成都)라고 다짐 한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주 무왕이 은을 멸망시킨 후 새로운 도읍을 건설했을 때 촉에서도 도성을 재건하면서 성도라 고쳐 불렀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촉은 제 12대 개명왕(開明王) 때에(기원전 316년) 서쪽에서 강성해진 진(秦)에 의하여 멸망되고 진으로 흡수되고 만다.

필자는 성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당국에서 관광산업을 일으켜 안팎의 사람들을 이끌려고 노력하는 것이 여기저기서 눈에 띤다. 저녁에는 이곳 명물의 하나인 야외극장에서 어께 맛사지도 즐기면서 입으로 불을 품어내는 마술, 가면을 쓰고 얼굴색을 변화시키는 변검(變瞼), 아크로밧트 등을 보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가 될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구채구(九寨溝) 장가계(張家界) 등으로 가는 여행객이 많이 늘었으며 따라서 성도를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특히 구채구에 가려면 반드시 성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한다.

성도에서 볼만한 곳으로는 무후사(武侯祠)와 두보초당(杜甫草堂)이 있다. 교외로 한 나절 나간다면 아미산(峨眉山)과 낙산 대불(樂山 大佛)에도 가 볼만 하다.

 

무후사(武侯祠)

무후사는 촉한(蜀漢)의 황제 유비(劉備)와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시는 사당이며 유비의 묘 바로 옆에 지어져 있다. 정문에는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금박 문자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이는 곧 공식적으로는 촉한 소열황제의 사당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문 옆 대리석 표석에는 무후사라 써 있다.

 

 

 

                                                                                     유비전   

                

       유비는 전한 경제(景帝)의 후예인지라 멸망한 한(漢)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221년 성도에서 즉위한다. 후세 사람들은 유비의 한나라를 그 전의 한나라와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촉한이라 부른다. 촉한은 한때 귀주 운남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게 되나 유비와 제갈량 사후에는 국력이 급격히 쇠락하여지고 위에 병합되고 만다. 이리하여 성도가 촉한의 도읍으로 있었던 것은 43년간에 불과하다. 유비는 사후에 소열황제라 불렸었다.

      공명은 생전에 무향후(武鄕侯)에 책봉된 바 있고 사후에는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받았으므로 보통 무후사(武侯祠)라 하는 것은 제갈량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른 곳 예를 들면 공명의 묘가 있는 면양(眄陽) 정군산(定軍山)에도 무후사라는 사당이 있다.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중정이 있고 좌우로 세 개씩 비각이 서 있다. 오른쪽 첫 비각에는 소위 삼절비(三絶碑)라는 당나라 때 비가 모셔져 있다. 이것은 평소 제갈량을 특히 숭배하던 당 나라 명재상 배도(裴度)가 비문을 짓고 유공탁(柳公琸)이 휘호하고 노건(魯建)이 조각한 제갈공명의 업적을 칭송한 비인데 문장 글씨 조각 세 가지가 다 뛰어나다고 하여 삼절비라 부르는 것이다.

        이문(二門)에 걸린 편액은 명량천고(明良千古). 유비가 현명하고 어진 것이 영원히 빛난다는 뜻인 듯한데 명(明)자를 날 일(日)자 대신 눈 목(目)자 변으로 쓴 것은 유비의 밝은 눈이 제갈량을 알아보고 군사(軍師)로 삼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 문을 지나면 양편으로 촉한의 개국에 공헌한 28명의 무장과 문신의 초상화와 소상이 줄 지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 유비전(劉備殿)이 있다. 유비전내에는 2대 황제 유선(劉禪)의 다섯째 아들 유심(劉諶)이 시립하고 있는데 이는 후세 사람들이 유심의 충절을 높이 보기 때문이라 한다. 유심은 촉한이 멸망할 때 위(魏)군에 투항하려는 황제 유선에게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그 뜻이 받아지지 아니하여 자기 처자와 함께 자결한 자이다. 유비전 동쪽으로 관우전(關羽殿)이 접해있으며 서쪽에 장비전(張飛殿)이 배치되어 있다.

 

 

 

 

                                                     제갈량전

 

      유비전을 돌아 뒤로 들어가면 작은 과청(過廳)이 나오고 그 뒤에 (諸葛亮殿)이 나온다. 제갈량전은 그 앞의 유비전 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지어져 있다. 정면에 명수우주(名垂宇宙) 즉 "그 이름 우주에 길이 남아 있다"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내에는 소위 제갈건(諸葛巾)이라고 하는 독특한 관을 쓰고 깃털부채를 들고 있는 제갈량의 좌상이 있다. 삼국지에 묘사된 그대로이다.

      제갈량전 앞 양 기둥에 걸려 있는 대련(對聯)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소개하려고 한다.

오른 쪽 기둥에는  能攻心則反側自消 從古知兵非好戰 이라는 글귀가, 그리고 외편 기둥에는    不審勢卽寬嚴皆誤 後來治蜀要深思 라는 글이 각각 걸려 있다. 이를 풀이하면 “능히 마음을 공략하여 얻으면 반대편은 스스로 사라질 것이며 고래로 병법을 제대로 아는 자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으니라. 세상 돌아가는 운세를 제대로 읽지 못할 때는 관용도 엄함도 모두 잘못으로 되고 말지니 뒤에 촉지방을 다스리는 자는 이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니라.”

     이것은 청(淸) 나라 말기 사천염차사(四川?茶使)로 와 있었던 조번(趙藩)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글을 짓고 휘호한 것이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은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던 남만(南彎)을 진압하고 그 수령 맹획(孟獲)을 사로잡아 정중히 대우하여 놓아주기를 일곱 번 하는데 그 때야 비로소 맹획이 스스로 촉에 복종하기를 서약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번은 이것을 바로 ‘공심’(攻心)이라 표현하고 제갈량의 전략에 빗대어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관을 비판한 것이다.

     즉 당시 청나라는 정정이 불안하였고 이 지방에서도 농민과 종교세력들이 종종 반란을 일으켰는데 순무(巡撫)(민정 군정을 담당하는 지방관)로 와 있던 잠춘선(岑春?)이라는 자가 이를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사람들의 원성을 크게 사고 있었다. 조번은 이러한 탄압정책에 반대하여 이 대련을 쓴 것이다. 마침 그 순무는 젊었을 때 조번에게서 글을 배웠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을 본 잠춘선은 한때 자기의 스승이었던 조번을 파직하기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화가 나도 매우 났었던 것이 틀림 없다.

    제갈량전의 왼쪽에 있는 연못을 지나면 서쪽으로 유비능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흔히 혜능(惠陵)이라고 부르는 유비능은 당초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며 뒤에 유비의 네 부인 중 유선의 어머니인 감(甘)부인과 촉으로 들어 와 얻은 오(吳)부인을 합장하였다고 한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강남의 오(吳)를 정벌하러 갔다가 이릉(夷陵)에서 대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장강 중류 백제성 영안궁(永安宮)에서 병사하였다. 장무(章武) 3년(서기 223년) 4월 24일의 일인데 유해는 성도로 옮겨져 그해 7월 혜능에 안장되었다.

 

전출사표 

 

    무후사에는 제갈공명이 유비사후 중원지방을 회복하기기 위해 제 2대 황제 유선에게 출병을 건의하는 소위 출사표(出師表)가 새겨져 있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 건의서가 제출되었기 때문에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로 구분되어 있다. 그 글씨는 실로 기품이 있고 또 힘이 넘쳐 나 사람들은 흔히 남송(南宋)의 장군 악비(岳飛)의 필적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악비의 필적이 아니라는 설이 더욱 유력하다. 악비는 북방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금(金)나라와 끝가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강화를 주장하는 진회(秦檜)에 의하여 투옥 살해된 사람이다. 남송의 도읍 항주에 가면 서호(西湖)변에 악비묘(岳飛廟)가 있다.

 

                                                漢昭烈皇帝(劉備)陵

 

 

두보초당(杜甫草堂)

 

당나라 때 유명 시인 두보(杜甫)가 성도에 온 것은 장안에서 불우한 관리생활을 청산한 뒤 나이 마흔 여덟일 때였다. 건원 2년(759년). 말단 관리생활로 말미암아 지쳤고 궁핍했던 두보가 유랑하던 중 안주할만한 땅을 찾아 이곳 성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약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이 때 두보가 살았던 그 자리에 지금 두보초당을 재건해 두고 있다.

 

 

두보초당

                                                       

 

잠시 두보의 일생을 살펴보자. 두보는 낙양 근처 황하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 공현(鞏縣)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두한(杜閑)은 지방관리로서 뒤에 현령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조부 두심언(杜審言)은 측천무후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두보는 이백(李白) 왕유(王維) 등과 함께 성당(盛唐)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두보는 일지기 관직에 나가고자 애를 많이 썼으나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뒤늦게 어렵사리 얻은 종팔품의 관직도 때마침 일어난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유지할 수 없었으며 한때는 장안에서 반란군에 잡혀 감금생활을 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그러다가 숙종(肅宗)때에 좌습유(左拾遺)라는 종팔품상의 벼슬을 다시 제수 받아 황제의 근시로서 일한지 일 년만에 지방관리로 좌천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이것은 고지식한 두보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다가 오히려 황제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두보는 관리생활을 접고 유랑의 길로 들어서게 되며 감숙성 진주(秦州) 동곡(同谷)을 거쳐 성도로 오게 되었다.

 

 

두보의 흉상

 

성도에서 두보는 외척의 도움으로 완화계(浣花溪)라는 강가에 우거(寓居)를 마련하게 된다. 성도에 있는 동안 두보는 시도 쓰고 밭도 갈고 낚시도 하면서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행복하고 여유 있는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 뒤에 평소 두보를 아꼈던 후견인 엄무(嚴武)라는 사람이 절도사로 성도에 오게 되자 일시 그를 도와 자방 관리로 일도 하게 되지만 이듬해 갑작스런 엄무의 사망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게 된다.

두보는 성품이 곧아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두보의 시 중에는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 권력층의 착취와 비리를 고발하고 질책하는 글이 많다. 특히 젊었을 때 쓴 시 가운데는 이런 우국시(憂國詩)가 많다. 두보가 남긴 시는 대략 1450여수에 달하는데 그 중 성도에서 지은 것이 410여수나 된다고 한다. 전체의 약 3분의 1 가량이 이곳에서 써졌으며 여기서 썼던 시들은 그 내용도 온화하고 문학적으로도 성숙된 것이 많다고 사람들이 평가한다.

지금의 초당이 복원된 것은 극히 최근 즉 1997년의 일이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후 안팎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다.

초당의 경내는 꾀 넓은 편이다. 그 안에는 대나무 소나무 오동 매화 복숭아 등 여러 가지 나무들로 욱어져 있으며 조용한 산책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초당 왼편으로 팔각의 정자가 하나 있고 그 옆 시멘트 둑 넘어 운하 같은 물길이 있다. 옛날의 완화계인 것이다. 초당 옆 두보기념관에는 두보의 동상이 서 있다. 바싹 마르고 예리하게 보이는 그 동상의 이미지는 두보의 성품과 사람됨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두보초당 경내에는 아리다운 여인의 상이 하나 있다. 어떤 여인인가 하였더니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두보가 떠난 뒤 완화계 초당은 새로 부임한 절도사 최녕(崔寧)이 사택으로 접수하고 그의 현지처 임(任)씨로 하여금 거처하게 했다. 열심한 불교신자였던 임씨는 이곳에 범안사(梵安寺)라는 작은 사찰을 열었는데 뒤에 이 지방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임씨의 이 사찰을 근거로 하여 성도를 지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리하여 지방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완화사(浣花祠)라는 작은 사당을 건립했으며 최근에 와서 다시 그녀의 소상을 세우게 된 것이라 한다.

 

 

아미산(峨眉山)

 

성도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160 km 나가면 아미산이라는 불산(佛山)에 이른다. 이 산은 중국 4대 불교 명산의 하나로서(다른 세 곳은 普陀山 九華山 五臺山) 옛날부터 선경(仙境)으로 불려온 곳이다. 이 산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골자기마다 맑은 물이 풍부히 흐르고 있어서 경치가 좋기로 이름 나 있다. 그리고 산속에는 보국사(報國寺) 만년사(萬年寺) 등 아홉 개의 큰 절이 있으며 작은 사찰까지 합하면 약 70 여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고 한다. 제일 높은 정상은 만불정(萬佛頂)이라는 봉우리로서 해발 3099 m.

     우리 일행은 만년사 주차장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만년사로 올라갔다. 만년사는 해발 1020 m의 산위에 자리 잡고 있다. 4세기에 창건된 아미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이 절에는 흰 코끼리를 타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이 있으며 이 때문에 보현사라고도 불린다.

 

절 앞마당에는 백수지(白水池)라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옛날 이 연못가에서 승려 광준(廣濬)이 비파를 타고 이태백(李太白)이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찰을 한번 돌아보고 백용동(白龍洞)을 거처 하산하여 보국사(報國寺)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원숭이들이 산다는 계곡 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는데 비취색의 골자기에 맑은 물이 콸콸 흐르는 것이 역시 비경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원숭이는 한두 마리밖에 볼 수 없었다. 만년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가마꾼들이 많아 부인들은 모두 가마를 타고 내려 올 수 있었다. 가마 삯은 그리 비싸지 않으나 내려와서는 상당한 팁을 함께 줄 각오를 해야 한다.

 

                                                아미산 만년사

 

 

낙산 대불(樂山 大佛)

 

아미산에서 성도로 돌아오는 길에 낙산(樂山) 대불(大佛)을 가 볼 수 있다. 낙산은 조그마한 시골 도시로서 대도하(大渡河)와 청의강(靑衣江)이 만나 민강(岷江)으로 흐르는 교차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과거부터 이 강들이 범람하여 주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당나라 현종(玄宗)황제 시대 이곳 능운사(凌雲寺) 주지 해통(海通)은 수해를 막기 위해 절 뒤편 강가 절벽에 대불을 조각하기로 마음먹고 이 불사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후 90년에 걸쳐 공사를 하여 대불을 와성하기에 이른다.

높이 71m 너비 29m 의 이 대불은 암벽의 붉은  사암을 파고 조각한것인데 1200년을 하루 같이 민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대불의 발등에 올라 가 기념 촬영을 하는데 대불의 완전한 모습은 앞의 강에서 배를 타고서나 촬영할 수 있다.

 

 

                                                       낙산 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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