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 물론 사람마다 - 충주와의 작은 인연이라도 있다면 인연에 따라 - 다를 것이다.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이들이 수안보 온천을 떠올리거나 남한강가의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탄금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경우 고향이 충주와 가까운 지역이면서도 충주 땅을 직접 밟아보긴 성인이 다 된 이후의 일이었으며, 초등학교 때에 교과서를 통하여 충주비료공장을 가장 먼저 머리 속에 입력시켜 시험 문제로 나온 것을 대하지 않았었는가 기억된다.
오늘날 충주 지역은 여러 어휘들이 떠올려지고 있다. 수도권의 수자원 공급과 홍수 예방 능력을 갖춘 충주다목적댐을 비롯하여 월악산국국립공원 등이 대표되고 있다고 하겠다.
충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지역이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각축이 심하였던 곳이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것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고구려 땅이 되었는가 하면,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바뀐다. 삼국의 어느 나라이건 상대를 제압하거나 침공하는데 이곳 충주 지역을 손에 넣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조선조에서는 남한강과 낙동강을 이어서 연결하는 조운의 중요 통로였다. 목계나루에 조창이 세워져 인근에서 거둔 세곡이 모아져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에 당도하였음은 물론이고, 경상도 지역의 세곡까지도 일부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의 조창에서 서울로 운반되었다.
충주는 옛날 서울에 이르는 주요 교통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삼로의 하나였다. 삼남지방에서 수도인 서울에 이르는 길은 크게 세 갈래가 있었다. 제 일 로는 전라도 지방에서 시작하니 목포에서 나주, 전주를 지나 천안을 거치고 수원을 지나 과천으로 이르는 길이었다. 제 이 로는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함양, 거창을 지나 김천, 상주를 거치고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 장호원, 이천을 지나 광주를 지나는 길이다. 제 삼 로는 부산의 동래 지방에서 밀양, 대구, 안동을 거쳐 죽령을 넘고 단양, 제천, 원주, 횡성, 홍천, 양평을 지나 서울로 들어 온다. 이상의 삼남대로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고속도로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통로 개념이 설정되면서 크게 변화 발전하였을 뿐이다. 이들 삼남대로는 서울과 지방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담았을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오랜 세월 만큼이나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 충주에 이르는 길목인 문경 새재와 관련되어 얽혀있는 애환이 담긴 설화들은 참으로 많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새재와 관련되는 이야기는 글의 뒤로 미루고 계속하여 충주의 지리적 이야기를 더듬기로 한다.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의 남한강가에는 국보 제 6 호로 지정된 「탑평리칠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정식 탑 이름 보다는 「중앙탑」이라고 널리 알려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이다. 이곳 지역민들은 이 탑을 중앙탑이라는 별칭 만큼이나 아끼고 있다. 중앙탑이라고 불리는 이런저런 유래담을 들어보면 통일신라시대 영토의 중앙에 세워진 탑이라는가 하면, 충주의 옛이름이 중원(中原)인 것과 같이 국토의 중앙이 이곳이라커니, 오늘날 우리 국토의 중앙에 해당된다커니, 심지어 국토의 횡단축인 경선으로도 한가운데라는 등 중앙부를 특히 강조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나는 중앙탑이 있는 이곳의 경관을 참 좋아한다. 이 탑이 자리잡은 토단 위에 앉아 바라보는 남한강의 유유한 흐름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지금은 이곳이 잘 정비되어 있고, 중원향토민속사료전시관과 남한강수석전시관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찾는 이들에게 심심치 않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늘 많은 이들로 시끌벅적한 모습은 아니다. 단체 관광객이 지나칠 때는 잠시 소란스러웠다가도 그들이 떠나면 이내 한적한 공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서 - 사실은 이곳 지역에서 숙박을 하게 될 때는 대부분 수안보 온천지를 찾기 때문이지만 - 새벽의 운치를 접해보지 못했다. 언젠가 일부러라도 꼭 이른 아침의 풍광을 만나 볼 것을 다짐하면서 잠시 상상의 새벽 그림을 그려본다. 강가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함께하는 동쪽의 일출이 엮어내는 모습은 누구나 쉽게 그려질 것이다. 거기에 국토의 중앙임을 뽐내며 우뚝 서있는 중앙탑이 함께하는 모습은 시인이 아니어도, 화가가 아니어도 한 소절 쯤의 글이나 한 폭의 스케치가 나올 법 하지 않을까!
탑평리칠층석탑이 통일신라의 상징적인 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영토의 각축장이었던 또 하나의 상징적인 유적이 인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이다. 탑평리의 인근 부락인 용전리에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나타내는 국보 제 205 호인 중원고구려비가 비각 안에서 보호되고 있다. 이 비는 발견되긴 1979 년의 일이었으나 그동안 모르고 있다가 예성동호회라는 이 지역 동호인 모임에 의해 고구려의 비임이 알려졌다. 충주의 다른 이름에, 특히 이곳 지역민들이 사랑하는 이름으로 꽃술예(蘂)자 성곽성(城)자 ‘예성’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 쓰였다.
중원고구려비는 마모가 심하여 비문을 모두 판독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내용은 고구려의 남하정책 시기의 정황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고구려 시기의 비석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 지방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오늘날 대하기 쉽지 않은 몇 안되는 고구려비 가운데 하나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물론 일반인들이야 비석의 비문을 읽어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주위에 별다른 볼거리가 없으므로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 옛 시절을 짐작해 보는 여유로움도 여행의 중요한 목적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충주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명소로 탄금대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으로, 임진왜란 때에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전사한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탄금대는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영월, 단양을 지나 충주로 흘러든 남한강과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을 지나 들어온 달천강이 합류하는 합수 지점에 있는 구릉이라고 하기에 가까운 얕은 산인 대문산의 별칭이다. 대문산으로는 잘 모르지만 탄금대로는 누구에게나 알려진 곳으로, 탄금정이란 정자 위에서 내려다 보는 합수머리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넓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잔뜩 우거진 소나무숲과 넓은 풀밭이 조성된 충주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꾸며져 관리되고 있다. 양 강과 어우러진 주변의 경치는 우륵과 같은 대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절로 흥취가 일어 노랫가락 한 수가 나올 법하다.
탄금대는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과 달리 슬픈 역사의 기록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력이 쇠잔해져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가야를 버리고 신라에 투항해 온 우륵은 진흥왕의 보살핌을 받아 왕명으로 이곳 충주에 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신라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륵의 깊은 속내를 짐작해 본다면 망국의 한을 가야금 가락으로 토해내고 있었음을 그려볼 때 한가롭고 정겨운 모습만이 그려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전장으로 비장한 결심을 하고 나선 신립장군의 가슴 속은 어떠했을까 짚어 봄은 어떨까! 국력은 한없이 쇠잔해져 있고 적에 대한 정보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왜란을 대하는 이나라의 이른바 기둥들은 참담하기 이를데 없었을 것이다. 왕명으로 삼도순변사가 되어 쳐올라오는 왜군을 막겠다고 나선 신립이지만 양쪽의 군세가 비교되지 안흔 상황에 어떤 희망을 갖고 나갔겠는가? 처음부터 비장한 각오로 죽음을 택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탄금대 배수진과 함께 신립장군은 말을 일러 장렬한 전사로서 군인의 길을 다했을 뿐아니라 흘러오는 대세에 한가닥의 희망도 있을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문경새재라는 지리적 요새를 물리치고 탄금대 배수진을 친 것이 작전을 잘못 세워 패한 것이라는 등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모양이나 당시의 우리 형세는 이래도 저래도 패하는 길 뿐이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에는 순리와 역리가 있다. 순리가 무엇인가. 물 흘러가는 대로, 자연의 이치대로, 진리가 가르쳐주는 길로 바르게 가는 것이 아닌가. 물이 거꾸로 흐르면 무엇이 되는가? 거꾸로 흘러갈 수 없음이 자연의 이치이다. 물길을 거꾸로 돌리겠다고 둑을 막는다면 그 물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가? 그렇지 않다. 옆으로 새어 나오게 된다. 마침내는 둑이 무너지고 큰 홍수를 만나게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치가 이와 같지 않은가. 옛말에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치산치수라 했다. 나는 이말을 일러 자연의 섭리를 어기지 말라, 진리를 따르라, 다시 말해 순리로 가는 것이 곧 정치라는 말로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이른바 치인(治人)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왜란이란 것이 일어나 신립장군이 스스로 목숨을 나라에 바친 것은 무엇인가? 누구에 의해 생겨난 죽음인가? 모두가 순리를 따르지 못한 이른바 정치인이라 부르는 이들의 세력 다툼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오늘날 우리네의 이른바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행태가 어떤가? 나는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봄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상기시키고 싶은 것이다.자신의 행동이 순리가 아닌 역리로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네들의 아집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여러 가지 유형의 고통을 겪고 있는가? 참으로 안타깝다.
탄금대 배수진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신립의 마지막 선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수진을 쳐야만 했던 상황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음을 역사의 아픈 교훈으로 삼고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탄금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잘 보존해야 한다. 더불어 우륵의 아픈 가슴과 신립의 절망을 우리는 되씹어 보면서 탄금정에서 갖어보는 명상은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지 않게 될까 자못 여행자의 자세를 바로 잡아본다.
충주가 휴양지로 떠오른 것은 수안보온천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온천하면 수안보를 떠올릴 만큼 그 명성을 날렸다. 불과 몇십 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 온천 휴양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의 곳곳에 이른바 온천탕이 대규모 시설을 자랑하면서 생겨나고 있고 성업중이다. 시추 기술의 발달로 지하 100m, 200m 등을 쉽게 파들어가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웬만한 곳이면 쉽게 온천수를 찾아내게 되었다. 특히 요즈음의 서비스업종의 실태는 무엇이든 대규모 매장을 갖추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이른바 구멍가게라고 하는 것은 대형 마트니 백화점 앞에 지탱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슈퍼를 하나 차려도 초대형이어야 하고 목욕탕 조차도 이젠 동네 공중 목욕탕의 왜소한 시설로는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전국의 곳곳에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는 초대형 목욕탕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언제부터 우리 나라의 목욕 문화가 이렇게 급변하였는지 모르겠다. 이제 수안보의 온천지로서의 성가도 옛날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것도 물의 흐름과 같이 세태의 변화가 아니겠는가.
수안보 온천의 경우는 착정시추하여 물을 끌어 올린 것이 아니라 땅표면에 자연 용출된 것이 발견된 온천이다. 온천의 수질은 알칼리성 온천이며 수온은 43∼53。C에 이른다. 수안보온천은 『고려사』에도 기록이 보이는 오래된 온천이며, 지금과 같이 온천지로 발전하기는 1885 년에 노천식 욕조가 설치된 이후라고 하며, 일제 시대에 온천공 굴착이 이루어져 온천지로서의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수안보 온천의 발견에 대하여 구전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문둥이 거지가 이곳의 들에 쌓아놓은 짚더미 속에서 한겨울을 보냈는데 논 가운데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이 솟음을 발견하고, 그 물로 목욕을 하였는데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충주의 수안보 온천이 이름난 휴양지가 되면서 부근에 있는 미륵리의 절터가 관광 코스 중 하나로 관심을 끌게 되었고, 특히 월악산의 국립공원 지정과 충주호의 건설로 충주권이 관광 지역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면서 적잖은 이들이 미륵리절터를 찾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안보온천에서의 휴양이 여행의 목적지가 되고 미륵리절터는 수안보에 온 김에 잠시 들러보는 코스가 되고 있다. 아니면 월악산 등산이 주요 목적이 되면서 수안보온천과 미륵리절터가 부수적인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정반대이다. 미륵리절터를 찾으면서 온천이나 월악산국립공원 내의 다른 코스를 잠시 들러 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는다.
우리 나라에 폐사지는 참으로 많다. 폐사지를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폐사지에 들려 보아야 볼꺼리가 별로 없는 곳이 대부분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유적 답사가 가장 큰 취미인 나는 폐사지 찾는 것을 즐겨한다. 이런 폐사지 가운데 충주의 미륵리는 나에겐 이상하리 만큼 반가움을 안겨준다. 대개의 폐사지는 지난날의 번성했던 모습은 무너져 황폐화되고 간간히 건물 터나 탑이나 부도 한두 기 등 석물이 조금 남아있을 만큼 텅비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허함을 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충주의 미륵리절터도 마찬가지 이련만 나는 텅빈 느낌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 살아있는 듯한 충만감 또는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이를 대하는 느낌이다. 폐사지나 복원되지 못한 사적지를 찾아 다니는 여행은 그대로 다른 맛을 준다.
오늘날의 무분별한 복원 공사로 인하여 사적지가 훼손되거나 주변 경관을 망쳐놓은 곳을 볼 때는 짜증이 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화가 나기도 한다. 여행의 여러 테마 중에서 문화유적 답사의 목적은 옛 자취를 찾아 그 시대의 숨결을 맡아 봄으로써 오늘의 나를 찾자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그런데 복원 작업을 한답시고 시대의 흔적을 시멘트로 덮어 버리는 우를 범한 곳이 우리 나라 안에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차라리 손을 대지나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손을 대서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게 한 곳이 너무도 많다. 우리의 국가 기관의 잘못된 행정 제도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 나라에는 권력 앞에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재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에 문화재 전문가가 얼마나 있는가? 문화를 모르는 일반공무원이 핵심 부서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상은 우리의 정부 부서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부서의 최고 책임자인 장관이 해당 부서의 일을 전혀 모르는 정치인이 임명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으며, 또 그 자리에 얼마나 앉아 있기나 했는가? 전문성은 철저히 배제되고 인맥 중심으로 얽힌 정부의 관료 구조이고 보니 어느 부서의 일이고 장기적이고 전문적인 계획으로 추진되는 일이 드물 수밖에 없다. 전시 행정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문화재 복원 같은 일은 국가 사업의 우선 순위에서 항상 뒤로 밀려 왔고, 그나마 이루어지는 공사도 계획성이 결여된 막무가내식이었으며, 복원 공사를 할 때만 요란했지 사후 관리는 엉망이요, 심지어 사후 관리 예산 조차 배정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폐사지를 찾는 여행이 좋은 이유는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나에게는 그렇다. 폐사지에서 유적 답사 여행의 참맛을 보게된다.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는. 위에 든 이야기와 같이 시멘트복원으로 짜증스러움을 겪느니보다는 차라리 몰라서, 돈이 없어서 어떻든간에 손대지 않아 그나마 훼손 당하지 않은 것을 대하는 것이 즐겁다.
미륵리절터를 찾아가는 길을 수안보 온천리에서부터 찾아보자. 수안보 온천관광단지에서 문경 방향으로 난 3 번 국도를 따라 2㎞ 정도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이 문경으로 가는 3 번 국도이며 왼쪽 길은 미륵리를 지나 월악산 송계계곡으로 빠지는 597 번 지방도로 이다. 597 번 도로를 가다 사문리에서 월악산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작은 고개를 넘는다. 이 고개가 지릅재이다. 지릅재를 다 내려가면 양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송계계곡,덕주사로 가는 길이고 직진으로 수백 미터 가면 미륵리 절터가 나온다. 절터의 뒤로 가면 문경시 관음리로 넘어가는 하늘재라는 고개를 만나게 된다. 미륵리절터는 이 지릅재와 하늘재의 중간 쯤에 자리잡고 있다. 미륵리절터 이야기에 앞서 절터가 위치한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이 장면에서 우리 나라의 교통의 변천 모습을 잠시 살펴보자는데 있다.
우리 나라의 남쪽 지방 특히 영남지방에서 서울에 이르려면 중간에 가로 막고 있는 태백·소백산맥을 넘어야 한다. 백두대간의 험준한 준령을 넘지 않고는 서울에 이를 수가 없다. 지금이야 교통기관의 급속한 발달로 지리적인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옛날의 교통 형편은 결코 쉬운 여정을 즐길 형편이 아니었다. 특히 옛적부터 우리 정부에서는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교통의 편리성에 대한 고려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어찌보면 교통면에서는 오히려 정체성을 고수해야 했다. 국력이 강하지 못한 작은 나라이다 보니 교통로의 발달은 외적의 침입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위대한 업적이 당시에는 빛을 볼 수 없었던 것이 그 단적인 예가 된다. 교통로의 발달보다는 국토의 요소요소에 산성을 축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그래서 우리 나라를 산성의 나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개방적인 면이 강한 경우도 많이 있지만 또 어느 면에서는 폐쇄성을 강하게 나타냄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나는 문화의 폐쇄성의 단적인 예를 한옥 구조에서 내외벽과 전형적인 마을 구조에서의 고샅이라고 하는 마을길을 들고 있다. 우리의 한옥은 구성면에서 내외벽이란 것을 두어 대문을 열었을 때 대문 안쪽이 곧바로 보이지 않도록 설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집안의 구석구석을 남에게 쉬이 드러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좌 또는 우로 한 번 꺽어 돌아야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취락 구조면에서 볼 때의 고샅이라고 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을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고샅이라고 하는데 이 길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다. 고샅으로 마을길이 얼기설기 얽혀 있으므로 하여 취락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은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주는 아기자기함 내지는 훈훈한 정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고샅이라고 하는 좁고 긴 통로를 둔 까닭을 알고 보면 씁쓸함과 함께 언제나 나약함 속에 지내온 우리의 옛 모습이 연상되어 기분이 유쾌하지 못하다. 고샅을 둔 까닭이 위급함이 찾아왔을 때 급히 피난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벌자는데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잠시 새었지만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교통로의 발전을 억제한 것이라든가 산성 중심의 방어적 전술 체제를 국토 방위의 개념으로 설정해야 했던 우리의 지리적 환경 요인은 여하튼 씁쓸함을 갖고 있음이 사실이다. 요즈음 모 광고방송을 대하면서 우리네의 방어적 자세의 생활 모습을 곰곰 짚어본 적이 있다. 광고 문맥이 ‘한 번도 침략한 적이 없다는 우리 역사를 난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그 말에 공감하려는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 시간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결코 외국을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외침을 끈기로 막아내었다고 배웠다. 과연 이것이 꼭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우리 국토가 갖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를 수없이 들어왔고, 오늘날의 국내,국외와 연결된 정세를 살펴볼 때도 역사의 되풀이가 계속되고는 있지만, 방어적인 자세가 아니라 공격적인 대담성을 보여 왔다면 우리 역사는 어떤 모습을 오늘날 보이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야기를 지릅재로 돌아와 교통로의 변화를 살피기로 한다. 국토의 중앙부를 횡단하는 3번국도는 문경에서 이화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고 있다. 소백산맥을 넘어 서울에 이르는 길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는지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길이 이곳 문경-충주 사이의 길이다. 소백산맥을 넘는 길로 가장 먼저 생긴 고개가 지릅재이다. 한자어로 계립령이다. 문경 관음리에서 하늘재(한훤령)를 넘고 다시 지릅재를 넘어 충주에 이르는 길이 삼국시대에 열렸다. 계립령 다음에 열린 고갯길이 영주와 단양을 잇는 죽령이고, 문경새재로 널리 알려진 조령은 조선시대 초에 열렸다. 임진왜란을 겪을 무렵에는 조령이 주요 통로였다. 이화령은 현대의 모습이다. 이제는 이화령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화령 아래로 터널이 뚫려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재, 지릅재로 이어진 최초의 교통로는 거리를 단축시키는 조령의 개통으로 그 용도를 다하고 폐기되었으며, 조령은 이런 변화를 이화령에 넘겨주고 역사의 산물로, 관광 코스로 변모하였으며 이제 이화령도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서는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나는 미륵리절터에 오면 반가움을 안겨 주는 듯 하다고하였다. 폐사지가 주는 쓸쓸함이나 스산함, 텅빈 공간의 느낌이 이곳에서는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가 반겨주는 듯한 안온함 마져 느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누가 반가운 마음이 들게 하였을까? 아무래도 석굴 법당에 모셔진 입상의 석불 부처님이실 것이다. 아니, 나는 불자가 아니다. 아직 부처님의 자비의 말씀이 나의 가슴에 감격스럽게 벅차오르는 어떤 기쁨을 맛본 적이 없다. 불경을 제대로 대하지 못하였으니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를 반기는 이가 부처님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이곳의 석불입상을 대할 때마다 분화장을 한 듯 하얀 미소의 저 부처님 얼굴, 눈을 감은 듯 살짝 뜨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반겨 주시는 그 모습이 어머니가 자식을 맞아주시는 모습 그대로인 듯 하다. 나는 그 어머니의 자애하는 마음을, 부처님의 그 끝없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슴에 품었을, 나를 반기는 이는 이 불상을 다듬은 불심 깊은 석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부처님의 천진난만한 듯한 아름다운 미소가 석수의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듯 이곳의 석불입상의 저런 아름다운 조각은 본디 이런 아름다운 심성을 갖고 있는 이가 아니면 그 혼을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예술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석불입상이 모셔진 이곳의 건축 양식은 몇 가지 점에서 색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석불입상은 머리에 갓을 쓰고 있지만 처음에는 갓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굴법당에 모셔진 불상이기 때문이다. 경주 석굴암과 같은 석굴 형태는 아니다. 건물의 기단, 벽체에 해당하는 곳은 돌을 쌓고, 지붕 부분은 목조 건물을 달아내는 부분 석굴 형식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을 세웠던 주추의 흔적이라든가, 감실을 두어 불보살을 넣어둔 것, 건물의 전실과 후실로 구분되어진 자취 등 목조 건축물의 여러 곳에 잘 나타나고 있다. 돌을 쌓은 것도 정교하게 잘 다듬어 쌓은 것인데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자연석을 쌓은 듯 하다. 이는 화재로 인하여 법당이 불타 없어지고, 화력에 의해 돌이 갈라지고 트고, 그 후 비바람에 오랜 세월을 지났던 이유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불두 위의 갓은 뒷날 후대인에 의해 씌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석불입상을 자세히 보면 불두 부분만 유난히 희고 몸체 부분은 화재의 흔적이 있다. 그래서 불두 부분만 후세에 다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불상의 전체는 크게 6 부분의 바윗덩어리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기단이 있고 몸체가 4 부분, 갓이 또 다른 돌을 사용한 것이다.
미륵리에 절을 세운이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 6·25전쟁이 끝난 후라고 한다. 따라서 기록이 남아있는 것도 없고, 무엇하나 속시원히 규명할 자료가 없이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세웠다고 한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면서 이곳에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망국의 태자가 무슨 힘이 있어 큰 공력을 들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전설이란 것이 항상 그렇듯이 애틋하고 재미있게 구성된다.
석불입상이 보통의 경우와 달리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향은 송계계곡이다. 송계계곡에는 덕주사라는 작은 절이 있고, 월악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보물 제 406 호로 지정된 규모가 매우 큰(높이;13m) 마애여래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마의태자의 동생인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하는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즉 마의태자가 세운 석불과 덕주공주가 세운 마애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석불의 앞으로 팔각석등, 오층석탑, 돌거북, 당간지주 등이 일직선을 이루고 배치되어 있으며, 일직선상에서 비켜나 동쪽으로 사각석등이, 서쪽으로 보주탑이라 불리는 둥근돌 조각이 너른 암반 위에 놓여 있다. 폐허가 된 절이지만 이렇게 여러 석물이 다양하게 남아있어 이 절이 개창된 이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에 힘입어 많은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석물들은 현장에 본래부터 있었던 돌을 그대로 다듬어 완성한 것이라는데서 또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보물 제 95 호로 지정된 오층석탑은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지대석과 기단석으로 삼아 그 위에 탑을 조성한 것이기에 안정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체감율이 떨어지고 다소 육중한 듯 하며 아름다운 조형미는 못미치는 느낌을 준다.
오층석탑에서 앞으로 나오면 비신은 없어지고 비좌만 남아있는 돌거북이 있다. 비좌의 크기가 매우 크며 비좌로 보아 비신의 규모도 컸을 것이나 남아있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준다. 이 돌거북도 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다듬어 만든 것이다. 비좌를 다듬은 솜씨는 정교하지 못하나 웅대하고 전진적인 느낌을 준다. 재미있는 것은 돌거북의 등에 새끼 거북이 두 마리가 간략묘사로 새겨져 있는데 마치 어미의 등을 오르는 새끼인 듯하여 다듬은 석수의 재치가 엿보여 잔잔한 재미를 보태준다.
미륵리절터를 답사하면서 덕주사를 자나치기에는 섭섭함이 있다. 미륵리절터에서 한수 방면으로 5㎞ 정도를 가다 오른쪽으로 덕주사 입구를 따라 1㎞ 쯤 들어가면 덕주사가 나온다. 앞서 이야기한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절의 규모는 작고 초라하나 월악산의 산자락에 자리잡아 주변 풍광이 좋고 한적하다. 이곳에서 월악산 정상 쪽으로 약 30 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애불이 둘러봐야 할 유적이다. 더불어 덕주사 입구 조금 못미친 곳에 있는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도 시간이 되면 잠시 살피는 것도 의외의 소득이 될 것이다.
하늘재에서 지릅재로 이어지는 길이 열린 이후부터 새재 길이 열려 쇠퇴하기 이전까지 매우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으면서 미륵리절터를 중심으로 문화 흔적이 산재되었을 터이지만 오늘날 그 중심권이었을 미륵리 조차 폐사지 이상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옛 것을 다시 찾아보자는 작은 움직임이 있어 지릅재에서 하늘재를 넘어 문경 관음리로 이어지는 도보 여행이 의미있는 여행 코스가 될 것 같아 한적한 여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충주 여행에서, 특히 수안보온천 방향으로 길을 잡았을 때 꼭 잠시 들러 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 단호사이다. 건국대학교 충주 캠퍼스 인근의 단월동에 있는 작은 절이다. 도로변에 있는 단호사는 경내에 들어서면 충주시청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500여 년된 소나무가 멋진 모습으로 맞이한다. 내가 이곳을 찾은 2001 년 여름에는 천불전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곳의 약사전에는 보물 제 512 호인 단호사철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철불을 대하면서 부처님도 심술궂은 때가 있으신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갖게 된다. 우리가 절집에서 대하는 불상의 모습은 근엄함 또는 인자함 또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아늑함 등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의 철불좌상은 얼굴에 살이 두둑하고 감은 눈의 눈꼬리는 올라 갔으며 눈두덩도 튀어나와 있고 입은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문 모습이 어찌보면 화난 모습이고 달리보면 심술부릴 궁리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 나라에서 철불이 조성된 것은 나말여초에 선종이 널리 자리잡게 되면서 부터이다. 통일 신라의 불교는 왕실 중심의 화엄종을 근본으로 하는 교종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통일신라 말기로 오면서 진골 왕통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며 왕실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한다. 절대 왕권이 상실되자 지방의 곳곳에서 호족 세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신분 차별이 엄격했던 신라 사회에서 최상층으로의 진입하는 길이 막혀있던 육두품 이하의 귀족층이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많이 떠났었다. 장보고 이후 신라가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당나라를 찾는 유학생, 유학승이 특히 많았다. 유학승들이 귀국하면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선종을 들여온다. 선종에서 부르짖는 교외별전불립문자직지인심견성성불(敎外別傳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은 새로운 세력 기반을 잡으려는 호족 세력에게 더없는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여진다. 신라 왕실의 주도 이념인 화엄사상은 귀족 중심의 사상이었다. 누구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니 일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나말 당나라에서 돌아온 유학승들이 선종을 들여오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호족 세력은 그들의 정신적 이념으로 삼고자 그들과 손을 잡고 융숭히 맞이한다.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도 호족 세력의 연합 내지 결집이라는 틀 속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당시의 정세 속에서 호족들은 자신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력과 무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다. 무력 기반을 갖추다 보니 무기 생산이라는 것은 필수 사항이고 따라서 철을 다루는 제련 기술의 발달을 가져오게 된다. 호족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상적 이념을 체계화하고 경제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로 대형 철불을 조성하여 자신의 세력 결집의 도구로 전시 효과를 노리려 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나말려초에 철불이 많이 주조된다. 충주 단호사의 철불도 이런 당시의 흐름과 함께 조성된 것이다.
단호사의 길 건너에는 병자호란의 충신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어 잠시 들러 볼만하다.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서는 국보 제 197 호로 지정된 청룡사터보각국사부도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곳의 답사 여행 코스를 충주권에서 떼어내어 원주권에 묶어 하나의 코스로 권하고 싶다.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등과 함께 묶어 폐사지 답사 코스로 맥을 이어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충주의 문화유적 답사 코스에 넣어 이야기를 엮는다. 장호원에서 충주 방향의 국도 38 번 도로를 타고 오다 남한강을 만나는 목계나루터에 있는 목계교를 건너 바로 왼쪽으로 난 원주행 길을 따른다. 소태 농협 앞 삼거리에서 원주시 부론면으로 가는 599 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면 소태면 소재지인 오량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부론면 거돈사지로 가게 된다. 오량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소태초등학교를 지나 조금 가면 왼쪽으로 청룡사 표지판이 나오고 약 1 ㎞ 정도 가면 주차장에 닿는다. 현재의 청룡사는 작은 절인데 주차장 위로 난 길로 조금 들어가야 하며 청룡사터는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산 속으로 난 숲속 길이기에 주차장에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표지판이 있는 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면 먼저 청룡사 위전비(位田碑)가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종형 부도 한 기와 석재들이 보호 난간 안에 있고 그 위에 우리가 찾는 보각국사부도를 만나게 된다.
보각국사 혼수는 고려말의 고승으로 조선이 건국하던 1392 년에 청룡사에서 입적하였다. 그러므로 보각국사부도는 여말선초의 양식이라 하겠으나 이전의 고려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보 제 197 호인 보각국사부도는 일반적인 부도의 원형을 따른 팔각원당형 부도가 갖고 있는 구조를 그대로 갖고 있다. 팔각 지대석과 복련, 앙련이 돋을새김된 하대석을 갖추고 있다. 몸돌도 팔각을 이루고 있으며 배흘림 수법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옥개석도 목조 건축의 구조를 꾸며 넣었으며 상륜부가 온전히 남아있다.
부도의 뒤에는 보각국사부도비가 있다. 비좌와 비신만 있고 이수 부분이 없는 것이 색다르다. 보각국사부도비는 보물 제 658 호로 비문은 권근이 짓고 승려인 천택이 썼다.
부도의 앞에는 보물 제 656 호인 사자석등이 있다. 지대석이 사각이고 하대석이 일반 석등과 달리 사자상이다. 보통의 경우 복련 무늬의 하대석이나 이곳 석등은 사자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한 위에 간주석이 사각으로 세워지고 상대석은 앙련으로 꾸며져 있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다.
이곳 청룡사터의 답사는 어찌보면 허탈함을 느끼기도 한다. 부도의 면면을 살피거나 석등, 부도, 부도비가 한 줄로 늘어선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큰 절의 위상을 그려본다. 한 나라의 국사를 지낸 고승이 입적할 당시의 모습은 얼마나 시끌벅적 하였으랴마는 지금은 모두가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국보로 지정될 만한 가치를 지닌 부도를 찾아보기 위해 간간히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쌓여서 오솔길이 생겨난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볼 때 고승의 높은 덕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말없이 이어오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청룡사터 답사는 원주권으로 묶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여주 고달사터→원주의 흥법사터, 법천사터, 거돈사터→충주 청룡사터로 이어지는 이른바 남한강 줄기를 따라가는 폐사지의 답사는 옛 거찰들의 흔적도 조금은 찾을 수 있겠지만 부도의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색다른 테마 답사가 되어진다. 이들 코스를 돌면서 원종대사(고달사), 진공대사(흥법사), 지광국사(법천사), 원공국사(거돈사), 보각국사(청룡사) 등 고승들에 대한 높은 덕을 기려보는 것도 또 하나의 커다란 소득이 된다. 모두가 한결같은 이나라의 대덕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위인들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How cooooo----oooool the text is!
동해푸른바다님, 미투~~`산내음님,어쩜 요롭코롭 조목조목 충주을 쉽게 재미나게 이야기 해 주시다니,이 정하나로 !~ 지루한지도 모르고 신명나게 끝까지 단 숨에 읽어 답니다.증말 좋은 자료,감사합니다.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