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 총사령관 최용건은 개전 3일만에 수도서울을 점령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국군6사단(김종오대령)이 강력히 저항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최용건은 동부전선과의 전진속도를 맞추기위해 3일간 서울에서 재정비를 하기로 했다.
(7일만에 부산까지 점령 미군이 참전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겠다던 속전속결의전략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격분한 김일성은 전격적으로 총사령관을 김책으로 교체하고 북한군은 7월1일이 되서야 한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것이 탈북해온 '태영호' 국회의원이 밝힌 북한의 6.25개전초의 공식 기록이란다.
한편 6월28일, 29일, 30일 금쪽같은 3일동안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할 수 있었고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가서 반격을 준비했다.
한편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유엔16개국 연합군을 결성했다.
개전 첫날 적의 탱크에 속절없이 패퇴하는 국군의 상황을 보고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6월25일 밤10시에 수도를 대전으로 천도하고 다리를 끊어 전병력을 한강남쪽에 방어선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문득 2차대전때 덩커르크 철수작전이 떠올랐다. 연합군 34만병력을 바다건너 영국으로 퇴각시켰고 4년후 그 병력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싶었다.
만약 이 대통령이 민심에 따라 서울사수를 지시했다면 우리 국군은 서울시내에서 적탱크에 궤멸되었을것이고 전쟁내내 유엔군만으로 전투를 수행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겠지 싶다.
또한 김일성의 속전속결은인구의 70%가 농부이며 소작농이 주류인 대한민국에 인민군이 쳐내려와서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면 남한에서 봉기가 나고 남침에 가세 할거란 기대였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은 개전 한달전인 1950년 5월까지 남한의 토지개혁을 완료 정작 6.25때는 대한민국에 소작농이 없었다. 가을걷이의 30%를 5년간 세금으로 내면 전답 문서를 갖게 해준 이승만정권을 믿고 농부들이 목숨걸고 조국을 지킨것이다.
이승만은 6.25전쟁의 탈월한 책사요 영웅이었다..
시대를 앞선 절묘하고 과감한 판단이 대한민국을 살린것이다..
'등산26'에서 호국보훈의 달 6월산행으로 이승만대통령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오전10시 동작역 3번출구를 빠져나와 산꼭대기까지 닿는 계단으로 산등성이에 올라섰다. 쾌청한 날씨에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발아래로 펼쳐지는 한강을 내려다 보며 70년전 이 근처 어딘가 참호속에서 빼앗긴 서울시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우리네 아버지 삼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호국영령들에게 감사해본다.
벗들과 한잔하며 추억 쌓자고 제주도에서 날아온 양순재원장, '등산26'에 빚이 있다며 달려와서 점심값치르고 씨익웃던 태극기집회대장 이효선, 우리의 국부 이승만대통령께 좋은 술올리겠다고 맑은술 걸러온 임기욱총장.. 따듯한 마음과 마음이 모인 우리는 그날도 산행하며 행복했습니다..
여인수, 이수호, 임기욱,
김희진, 김남조, 양순재,
조원근, 박 철, 정봉섭,
김재인, 신준호, 이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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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선, 신규환, 노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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