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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八公山 1,193m)은 낙동정맥이 남하하다가 대구쪽으로 뻗은 가지줄기를 금호강에 풀어놓은 대구의 진산이다.
신라 오악(五嶽) 중 중악으로 대구시뿐만 아니라 경산시와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본디 공산(公山), 혹은 부악(父岳)이라고 불렸다.
삼국유사는 물론 산경표(조선 영조 때 편찬)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전도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나오면서 비로소 팔공산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그 내력이 분분하다.
양산 천성산에서 1,000명의 제자를 이끌고 수도하던 원효 스님이 8명의 제자만 데리고 팔공산으로 온 후 이들이 득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면서 신숭겸 등 8장수가 전사하여 생겨난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으니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이밖에도 여덟 고을에 걸쳐 있어서, 혹은 여덟 봉우리가 우뚝해 보여서 라는 견해도 있지만 신뢰지수는 낮아 보인다.
산자락이 워낙 넓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만들어진 얘기로 보인다.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군 사령부로 삼아 지휘한 곳이다.
동화사는 팔공산 남쪽 기슭에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세운 사찰로 창건 당시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심지대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桐華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절 입구에는 수목이 우거져 있고 사철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흐른다.
경내에는 1727년에 중건한 대웅전, 염불암을 비롯한 여섯 암자가 있다.
필자는 코스를 조금 바꿔 탑골에서 오르기로 하였다.
이 코스는 케이블카 터미널이 있는 신림봉을 경유, 낙타봉 전망대를 거쳐 수태골에서 오를 A팀들과 조우를 하게된다.
능선을 타고 오르기 때문에 조망이 탁월하고, 마사토에 듬성듬성 바위들이 널려 있어 氣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랬다.
팔공산은 거미줄처럼 얽힌 온산온길이 암반과 적당히 버무러져 기똥찬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산행코스: 동화문입구-탑골-신림봉 케이블카터미널-낙타봉-마애불-비로봉-동봉-염불암갈림길-염불암-임도-부도암-동화사-봉황문 매표소(5시간20분)
GPx 초록색 트랙이 동선.
9.6km에 5시간 20분 소요
고도표
'월간 山'지의 440명산 지도.
팔공산IC로 빠져 나와 동화사로 진입하면서 버스에서 바라본 비로봉의 시설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길은 울긋불긋 예쁘게 단풍든 길.
'봉황문매표소'가 있는 동화사 입구. 동화사는 매표소가 두 군데 있는데, '봉황문매표소'와 '동화문매표소'다.
차량이 동화사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동화문매표소' .
수태골로 향하는 버스를 세워 먼저 내렸다. 이곳은 팔공산분수대가 있는 동화사 삼거리.
이 지점의 이정표
버스 정류장의 노선 안내도
동화사와 갓바위 숲길 안내도
이정표
동화사로 들어가는 도로에서 안내도가 있는 좌측 탑골방향으로 진입하여...
탑골로 향한다.
등로는 탑차가 있는 곳.
입구의 이정표
곱게 물든 산길 옆 화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용수동사가 있었다는 '용두사지2'를 지나니...
산길은 그 흔한 돌계단이나 데크계단이 아닌 친환경 푹신한 오름길.
이정표 상의 지능인 깔딱고개.
이정표에선 동화집단시설지구(0.7km)와 케이블카(0.6km)의 거리가 1.3km인 셈.
능선길엔 서서히 암반이 나타나더니...
돌아보니 전망이 트이기 시작한다. 갓바위 방향 나무가지 사이로 환성산과 초례봉의 모습.
고개를 들면 팔공산의 주릉이 하늘금을 그린다. 좌측 옴폭한 곳에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의 시설물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동봉의 모습.
살짝 당긴 모습.
데크계단을 오르면...
'팔공산 컨트리클럽' 위로 인봉(노적봉)과 관봉(갓바위)인 듯하여...
살짝 당겨본다.
그 우측 뒤로 '가팔환초'의 환성산과 초례봉이 차례로 하늘길을 달린다. 그 뒤는 경산 청도쪽 방향.
기암을 에두르면...
데크계단을 만나면서...
케이블카 터미널에 올라선다. 케이블카 터미널이 있는 지점은 신림봉(820)
케이블카를 타고온 여행객들.
전망대에선 중앙 옴폭한 곳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측 서봉, 그리고 우측의 동봉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이라고 한다.
중앙 가까운 능선 꼭대기는 낙타봉.
안부에 내려서면 염불암 갈림길.
데크계단을 오르면 낙타봉 전망대.
사방이 뻥 뚫렸다.
갓바위와 환성산 초례봉과...
낙타봉에선...
멀리 지리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던데...
조금 당겨보았다.
능선길에는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고...
우측 산자락 아래엔 나중에 내려올 염불암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
살짝 당겨본 염불암.
수태골 갈림길(철탑사거리) 이정표.
큰 벽돌을 쌓은 듯한 암반을 지나...
경사가 완만한 오름짓을 하면...
서봉 갈림길을 만나 동봉 방향으로 올랐다.
이 지점은 마애불(석조약사여래불)이 있는 헬기장. 비로봉엔 시설물들이 즐비하다.
'팔공산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八公山東峰石造藥師如來立像)' 전체 높이 6m.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높이 6m의 양각(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고, 불상이 새겨진 바위 자체가 거대한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반쯤 뜬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되었는데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두 볼은 살이 찐 편이고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어 온화하고 자비스러운 불심을 느낄 수 있으며 신체에 비해 얼굴은 좀 크게 표현되었다.
거대한 불상을 올려다보며 예불을 드리는 예배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귀는 길어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은 너무 짧아서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치 않다.
양손과 발은 모두 신체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크게 표현되었다.
오른팔은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지만 조각 수법은 고르지 못하다.
왼팔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려 외장(外掌 : 손바닥을 바깥으로 함)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이고 옷자락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뜨렸다.
단순한 옷주름만이 표현되었고, 법의 밑으로 직립한 두 발끝과 발가락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옷자락도 양팔에 걸쳐 넓게 늘어뜨려졌는데 마치 도포 자락을 연상케 한다.
이 불상은 손과 발에서 기형적 조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거대한 입상에 잘 조화되어 있는 옷주름이나 얼굴 모습 등의 조각 솜씨로 보아 경산시의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31호)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자료요약>
안내판
비로봉을 향하는데, 한 무리의 아줌마부대가 왁자하게 내려온다. 우리 일행들이다. 그 자리에 서시요.
시설물을 비켜돌아...
비로봉을 향한다.
철조망이 쳐진 북쪽으로 골프공처럼 생긴 시설물이 보인다.
경북 군위군은 팔공산 정상 비로봉(해발 1193m) 주변에 ‘하늘 정원’을 조성했다.
하늘정원은 행정구역상 경북 영천에 위치한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600여m 떨어진 곳에 4700여㎡ 규모로 조성됐다.
팔공산 전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 데크와 산책로, 화장실, 주차장 등을 갖췄다.
대구와 경북 군위·영천·경산 등의 경계 역할을 하는 팔공산에서는 비로봉이 가장 높지만 그동안 군사시설과 송전탑 등에 가로막혀 동봉까지만 갈 수 있었다.
하늘정원 뒷쪽 군위쪽에 마련된 주차장에서 잘 닦여진 데크를 따라 500m만 오르면 하늘정원에 쉽게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비로봉엔 ‘군위 11’로 적은 삼각점이 있고, 자연석에 ‘비로봉 1,193m’를 적은 글귀가 있다.
비로봉(毘盧峰)의 비로(毘盧)는 불교에서 ‘높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비로자나는 모든 곳에 두루 비추는 부처님 몸의 빛을 뜻하고,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을 뜻한다.
비로봉이란 이름에는 이 산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라는 뜻과 불교적 의미가 함께 내포돼 있다.
비로봉을 내려서면 데크 전망대가 있고...
이내 마애불이 있는 헬기장에 닿는다.
형님과 나는 이곳 마애불 앞에서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여러번 오른 동봉에서 기념사진.
산을 어디 높이로만 따지랴. 비로봉을 바라보는 동봉의 넘치는 기운.
기념을 했다.
암릉을 타고 갈길을 서두른다.
수능을 앞둔 지금쯤 기도객으로 인산인해가 되어있을 갓바위와, 환성산과 초례봉 능선.
추색으로 물드는 산하를 굽어보는 일행들.
기암과 주위 산경.
바위에 암팡지게 뿌리를 박은 강한 생명력.
아직도 쉬 떠나지 못하는 일행들은 그들이 쉽게 오르지 못하는 곳(1,000m 고지)임을 알고 있는 듯.
주능선을 조금 더 진행하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우측 염불암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염불암 갈림길의 이정표.
좌측 계곡으로 낙엽을 쓸며 쏠려 내려가는 길은 양진암으로 가는 길.
데크계단을 밟고 오른 후...
뒤돌아본 모습은 염불.
잘 닦여진 등로.
염불봉에서 0.6km를 내려오자 만나는 이정표에서 염불암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는 뒤따라오는 이병두 고문님의 컨디션과 염불암의 마애불 등 문화유적을 살피기 위한 것.
동화사 부속 사암(寺庵)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염불암(念佛庵)이 우측으로 내려다 보인다.
염불암은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 듯,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정면 3칸 맞배지붕의 극락전 앞 유리관 속에 보관되고 있는 청석탑.
청석탑(靑石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3단으로 높직하게 이루어진 화강암 지대석(地臺石) 위에 탑신(塔身) 없이 옥개석(屋蓋石)만 층층이 포개져 있는데, 옥개석의 크기로 보아 탑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 정상부의 상륜(相輪)은 옥개석과 재질이 다른 돌로 만들어진 점으로 볼 때, 원래의 것이 아니고 결실된 후에 다시 만들어 얹었음을 알 수 있다.
검푸른 빛깔의 네모꼴 점판암으로 만든 옥개석은 현재 열 개가 남아 있으나 본래는 몇 층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래쪽 3개층과 맨 위층을 제외하고는 옥개석의 파손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크게 부서져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낙수면(落水面)마다 돌을 괴어 놓았다.
각 옥개석은 두께가 얇고 수평이며, 각 면은 직선 처리하여 다소 경직되어 보이지만 네 모서리를 살짝 반전시켜 어느 정도 날렵한 맛을 느끼게 한다.
이와같이 검푸른 빛을 띠는 청석으로 자그마한 다층탑(多層塔)을 조성하는 예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해인사의 원당암 청석탑이라든가, 김제 금산사 경내의 청석다층탑 등은 이의 좋은 예들로, 이 염불암청석탑 역시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완전한 형태가 아니어서 정확한 형식을 알 수 없지만, 옥개석의 완만한 체감률과 적당한 비례감으로 안정감을 주는 고려탑으로 추정된다.<자료요약>
안내판
정면 3칸 맞배지붕의 염불암 극락전과 그 우측 옆의 삼각뿔 암반에 조성된 마애불.
계단을 밟고 올라 '동화사염불암마애여래좌상 보살좌상(桐華寺念佛庵摩崖如來坐像─菩薩坐像,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을 살핀다.
높이는 여래좌상 4m, 보살좌상 4.5m. 염불암 경내에 우뚝 솟은 암석의 서·남면에 얕게 부조되었으며, 서면의 여래좌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남면의 보살좌상은 관음보살(觀音菩薩)로 추정된다.
선으로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윤곽을 나타내고 있는 이 두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4.5m인 남쪽면 '관음보살(觀音菩薩)'상은 옷이 길게 흘러내려 양 무릎이 노출되지 않고 있다.
부채꼴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코와 입 사이가 짧아서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평행으로 들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꽃줄기를 잡고 있다.
서쪽면에 새겨진 높이 4m의 여래좌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연꽃이 새겨진 화려한 대좌(臺座) 위에 앉아있다.
얼굴은 네모나며,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대좌의 높이에 비해 양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균형은 잡히지 않고 있으나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복부아래에만 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비록 선으로 새겼지만 대좌의 정교한 수법이 주목된다.<자료요약>
팔공산동화사염불암극락전중건비를 살피고...
'염불암극락전중건비'
안내판
청석탑 안내판
염불암을 뒤로하고 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선다.
‘입차문래(入此門來)와...
막존지해(莫存知解)라고 쓰여진 돌기둥이 있다.
'이 문에 들어올 때에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어라’라는 뜻. 더 나아가...
무해공기(無解空器) 알음알이 없는 빈 그릇이라야
대도성만(大道成滿) 크나 큰 도를 가득 이루리라.
부도 한 기를 만난다.
'동화사 부도암 부도(桐華寺 浮屠庵 浮屠, 문화재자료 제34호)이다.
부도는 사리나 유골을 모신 곳.
이 부도는 바닥돌과 몸돌, 지붕돌을 갖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크기가 작다.
이러한 부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것으로 이 부도는 부재석의 구성이 단조롭고, 지붕돌의 모서리가 없어졌으며, 그 모습이 투박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측 아래로 부도암의 모습이 보인다.
임도삼거리에 닿았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양진암(0.6km)과 내원암(0.5km) 가는 길.
이 지점의 이정표.
양옆으로 돌담이 반듯한 부도암으로 조금 올라본다.
노랗게 물든 가을 단풍과 묵언(默言)에 든 부도암.
부도암 표석.
낙엽을 쓸고 물길을 낸 계곡.
동화사 주차장에 닿았다. 하산시간이 15:30이면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우측으로 가면 동화문으로 대형버스도 운행이 가능하고, 좌측으로 가면 봉황문으로 차량통행이 불가하다.
나는 봉황문으로 이동하며, 형님은 우측 동화문 방향으로 가서 차량이 있는 케이블카주차장으로 가시라고 했다.
동화사 경내로 들어가면서 돌아본 모습.
대웅전으로 방향을 잡고...
화려한 오색등으로 장식된 봉서루(鳳棲樓)
봉서루엔 이름과 달리 온통 용(龍)들의 세상이다.
동화사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하여 대웅전이 봉황의 머리이며 봉서루가 꼬리, 봉서루 앞 커다란 바위 위 세 개의 둥근 돌이 봉황의 알이란다.
오래전 바위 아래 있던 세 개의 둥근 자연석이 분실된 이후 새롭게 올려 두었다고 한다.
봉서루를 들어오면 날렵한 팔작지붕의 동화사 대웅전.
돌아보면 또다른 편액인...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1595년부터 동화사에서 활동했던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 이 절을 영남 지역 승병의 총본부로 사용했다.
승군은 다른 말로 치군(緇軍)이라고도 한다.
치(緇)가 승려들의 옷을 뜻하는 한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남치영아문은 '영남 지역에 설치된 승려 군영의 문'을 의미하고, 이 현판이 봉서루에 걸려 있는 것은 동화사가 임진왜란 중 영남 지역
승군 본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진품은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낙관엔 ‘을축(乙丑 1925) 초동(初冬) 달성후인서(達城後人書)'라고 쓰여있다.
호가 석재(石齋)이며 본관이 달성(達城)인 서병오(徐丙五)선생 1862(철종 13)∼1935)은 영남출신으로 일찍이 군수를 지냈다.
대웅전 축대 아래에는 한 쌍의 괘불대(掛佛臺)와 노주(露柱)가 나란히 있다.
* 노주는 선원(禪院)의 경내에 있는 석제 또는 목제의 기둥을 말하는데, 등롱(燈籠:수레에 켜는 등)과 함께 선가(禪家)에서 비정(非情:생명이 없는 존재)을
가리키는 비유어로 많이 사용된다.
절마당 한복판에 오도카니 자리한 삼층석탑은 비지정 문화재.
세련된 멋은 없지만 갖출 건 다 갖췄는데, 무슨 이유로 비지정 문화재일까?
그리고 대웅전 뒷뜰을 바라본다. 이 뒷뜰엔 40kg의 금괴가 묻혔다고 알려진 곳.
탈북인 김씨가 “북한의 양아버지로부터 ‘6·25 때 피란을 가면서 팔공산 동화사 대웅전 뒤뜰에 금괴 40㎏을 기름종이에 싼 뒤 알철모에 담아 묻었다’고 하였다.
조건부 발굴 허가가 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산신각(山神閣)과 좌측 뒤로 조사전(祖師殿)이 보인다. 조사전엔 동화사 창건주 극달화상과 역대 조사들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기도객들을 따라 합장,
대웅전 문살무늬를 살핀다.
예쁘고 곱다.
한 쌍의 괘불대(掛佛臺)와 노주(露柱).
대웅전 앞 화분 사이의 배례석에 눈길이 간다.
불교 행사에 사용되는 일종의 판석으로 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려놓는 판돌로 그 앞에서 자리를 펴고 배례한 것으로 보인다.
절문을 나서면서 돌아본 옹호문((擁護門) * 옹호(擁護)란 중생과 불법(佛法)을 돕거나 감싸서 지키는일. 주련엔
擁護聖衆滿虛空(옹호성중만허공)~허공을 가득 메운 옹호성중(擁護聖衆)이여
都在毫光一道中(도재호광일도중)~모두가 부처님의 지혜의 도리 중에 있도다.
信受佛語常擁護(신수불어상옹호)~부처님의 말씀 잘 간직하며 늘 옹호(擁護)하고
奉行經典永流通(봉행경전영유통)~경전(經典)을 받들어서 길이 유통(流通)케 하네.
인악대사(仁嶽大師 1746~1796)의 속성은 李씨, 본관은 성산(星山), 諱(휘)는 義沼(의소), 자(字)는 자의(子宜), 법호를 인악이라 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달성 인흥촌(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인흥촌, 고려때 유명한 仁興寺(인흥사)가 있던 곳)에서 태어났다.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하다 1796년(정조 20)에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향년 51세, 법랍 34세로 입적한 비는
지금 동화사에 세워져 있으며 저서로는 '인악집(仁嶽集)', '화엄사기(華嚴私記)', '금강사기(金剛私記)',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등이 있다.
봉황문으로 내려가는데, 길 좌측으로 석탑과 비각, 그리고 우뚝한 석기둥인 당간지주가 보인다.
석탑은 균형도 맞지않고 모든 게 언배런스하다. 아마도 석탑의 잔재들을 모아서 형체를 만들은 성 싶다.
이 건 또 무얼까?
천장비석(天藏秘石). 하늘이 감추고 돌을 숨겨 두은 곳(?) 이쯤되면 식자우환( (識字憂患)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大邱桐華寺幢竿支柱, 보물 제254호)는 높이 3.1m, 너비 0.76×0.34m.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말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는 당간은 없어지고 두 기둥만이 66cm 간격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쪽 면에는 모서리를 깎고 중심에 세로로 능선을 조각했다.
기둥의 꼭대기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었으며, 기둥의 중심부는 안쪽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3면에 1m쯤을 살짝 들어가게 새겼다.
기둥의 위와 아래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는 네모난 모양이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다.
당간을 받치던 석재가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경쾌한 맛은 없으나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자료요약>
인악대사비각과 당간지주.
인악대사비명. 인악당(仁嶽當)은 조선 시대 고승 인악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이다.
인악대사비는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으로 조각한 것이 다른 비석들과는 대별된다.
이것은 동화사가 봉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은 1808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안동 김씨 김희순이 짓고 썼는데 왕희 지풍의 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하다
그 밖에 나란히 세워진 비석들.
당간지주 안내판
내려서서 돌아본 인악당과 당간지주.
아스팔트 진입로에 휑하니 선 일주문이 여행객을 배웅한다.
일주문 기둥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자 입은 절로 벌어졌다.
그리고 “저 끝없는 허공에 부처님이 계시네(無盡虛空有佛存)”라는 시 구절이 나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과연 부처님은 반공(半空)에 떠 있는 것 마냥 바위의 높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숭엄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높은 곳을 택했다고는 하지만 그 높이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정도였다.
전체높이가 5m는 족히 됨직한 바위벽의 윗부분을 택해 부처님을 조성했다는 것은 존엄한 분을 위한 예경(禮敬)의 마음을 넘어 하늘, 곧 허공에 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더구나 탁월한 것은 부처님 앉으신 연화좌 아래를 구름이 떠받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눈앞의 부처님이 계신 곳이 허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불교신문에서...>
안내판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 보물 243호)은 동화사 봉화문 입구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臺座)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자료요약>
절문을 나선다.
동화사의 입장료.
봄철 산방기간에 금지사항이 있어 뒷풀이를 위하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전원 탑승!
그리고 도착한 이 자리.
- 인생 -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눈물 같은 소주를 마시며/ 잠시 슬픔과 벗할지언정
긴 한숨은 / 토하지 않기로 하자
아롱아롱 꽃잎 지고서도/ 참 의연한 모습의
저 나무들의 잎새들처럼/ 푸른빛 마음으로 살기로 하자
세월은 / 훠이훠이 잘도 흘러
저 잎새들도 / 머잖아 낙엽인 것을.
<정연복(鄭然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