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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김진효 학교장
<큰그릇> 500호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
용산고 33대 교장 김진효입니다.
용산고 동문 소식지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500호 발간은 단순한 횟수를 넘어 지난 반세기 동안 용산고 동문이 함께 써 내려온 굳건한 우정과 사랑의 결실입니다.
더욱이 이번 <큰그릇> 9월호 500호 발간이 올해 9월 9일 용산고 개교 80주년과 맞물려 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재학 시절 교정에서 나눈 추억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힘든 순간에도 서로를 응원해 온 마음들이 모여 오늘의 <큰그릇>을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동창회보 <큰그릇>은 4만여 용산 동문의 소중한 기억을 이어 주는 다리이자, 앞으로 더 큰 꿈을 함께 그리는 나침반이 되리라 믿습니다.
<큰그릇> 500호를 맞아 그동안 애써주신 박만흠 사무총장님을 비롯한 편집진과 모든 동문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큰그릇>이 용산고의 자부심과 따뜻한 연대를 널리 전하는 명품 동창회보의 전통을 이어 계속 발전해 가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용산고 동창회보 <큰그릇> 500호 발간을 용산 교육 가족 모두와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 역시 <큰그릇> 500호와 개교 80년이 되는 이 시점에 용산고 가족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큰그릇 3
<큰그릇> 500호 발간 축하메세지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첫 발간 후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큰그릇>의 내용이 나날이 발전하여 소식지에 그치지 않고 교양지로서의 역할까지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동창회장과 사무국 그리고 편집위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3회 동창회장 박돈서
용산 동문을 날줄로 또 씨줄로 이어주는 동창회보 <큰그릇> 500호 발간을 4만 동문과 함께 축하합니다. 특히 9월 9일 개교 80주년을 기념하는 시절에 500호 발간을 하여 그 의미가 뜻깊다고 하겠습니다. 그간 고생한 편집위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큰그릇>이 계속 이어가 1000호 발간을 기대합니다. 진심으로 500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전 총동창회장 19회 이세용
자랑스러운 배움의 터전에서 이 나라의 큰 그릇으로 성장한 용산고 동문을 이어주는 동창회보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사랑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온 <큰그릇> 500호까지 애써주신 박만흠 편집위원장과 편집위원 및 관계자 여러분께 애독자로서 감사드리고 <큰그릇>이 용산고 졸업생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세대와 세대를 잇는 따뜻한 소통의 장이 되어 계속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전 학교장 조영상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사람도 오랜 陶冶의 과정을 거쳐야 큰 사람이 되겠지요. 동창회보도 <큰그릇>이고, 학생들 학습자료집 이름도 <큰그릇 교재>입니다. 용산고 학생들이 사회의 큰 그릇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하며, 아울러 <큰그릇> 500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1학년 부장 정상오
용산고 동창회보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500번의 걸음마다 용산의 역사와 동문들의 추억, 그리고 모교를 향한 사랑이 차곡차곡 새겨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소중한 마음이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이어져 <큰그릇>이 용산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오래도록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용산고등학교 학부모회장 배안나
안녕하십니까? 항상 모교의 발전과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보내주시는 선배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교와 동문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동창회 소식지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용산고 79대 학생회장 이성언
4큰그릇
각 회 총무이사 한 줄 축하 메시지
“500호를 맞이한 <큰그릇>! 용산고 동창회의 자랑. 축하합니다.” 3회 이윤호
“용산의 발자취를 편찬한 <큰그릇> 500호 발간을 경축하며 그간 출간을 위해 자료 수집과 원고 편찬에 공헌한 편집위원들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6회 이태균
“<큰그릇> 500호 발간을 8회 동문 모두가 축하하고 축하합니다. 500호를 이끌어온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큰그릇>이여 영원하라!” 8회 박충정
“축하의 마음을 담아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동문들의 뜻깊은 기록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9회 이동섭
“<큰그릇> 500호를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소원합니다.” 10회 최영일
“<큰그릇> 만수무강 하여라.” 11회 이기정
“500호라는 자랑스런 역사를 쓴 편집위원들과 동창회장 모두에게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12회 류명현
“<큰그릇> 500호 발간을 축하하며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13회 김길송
“백악의 정기가 남산으로 뻗어내린 곳에 자리잡아 장엄한 위력을 가지고 창공에 둥실 떠오르는 역사와 전통의 대용산고 전무후무한 4만 동문의 자랑스러운 <큰그릇> 500호 발간을 정말 축하합니다.” 14회 고동근
“용산의 자랑 <큰그릇>! 500호 발간을 격하게 축하드리며 4만 동문을 한마음으로 이어주는 역할에 15회 전 동문은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15회 전영렬
“용산고의 큰 자랑. 경축 <큰그릇> 500호.” 16회 한경수
“<큰그릇> 500호를 맞이하는 용고의 위용, 1000호를 向하여 계속 전진할 것이다. 용산고여 영원하라.” 17회 김윤진
“<큰그릇> 500호의 영광스러운 발자취와 1000호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18회 동문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응원합니다.” 18회 김주호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또한 대용산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19회 정광필
“<큰그릇> 500회 발간을 축하하며, 그간 긴 세월 출간을 위해 애쓰신 여러분들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0회 유재성
“500호를 맞이한 <큰그릇> 영광스러운 발자취에 21회 동기 모두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축하와 감사를 보냅니다.” 21회 윤재근
“용산고 100주년’을 맞이하며, ‘<큰그릇> 740호’ 발간도 기원합니다.” 22회 최세영
“<큰그릇>은 고등학교 동창회보라고만 보기엔 수준이 높다. 사실에 바탕을 둔 기사와 스트레이트 문장은 깔끔하다. 동문의 다양한 에세이는 필자의 직관이 글을 끌고 가면서도 밀도 높은 긴장감을 이룬다. 기본을 다하면서도 매력적인 편집으로 시선을 잡는다. 매달 표지부터 광고까지 빠짐없이 읽는 이유다.” 23회 박주양
“선후배를 잇는 든든한 다리, <큰그릇> 500호 발간을 축하합니다.” 24회 김동헌
“자유와 관용을 듬뿍 담은 <큰그릇> 큰 발자취를 축하합니다.” 25회 임광택
“용산인의 영원한 가교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세월을 넘어 우리의 마음을 이어준 이 소중한 다리가 앞으로도 찬란히 빛나길 소망합니다.” 26회 조민호
“용산의 기상과 동문 소식을 담아온 <큰그릇>! 전통의 500호 발간을 온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500호의 중후한 발걸음. 용산의 미래는 계속됩니다.” 27회 이정로
“500회를 넘어 1000회로 <큰그릇>은 계속된다.” 28회 박창현
“빛나는 500호의 발자취를 밑거름 삼아 더욱 찬란하게 빛날 동문회보 1000호를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29회 천인성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작에 기여한 편집위원 동문의 온 정성과 열정이 500호라는 큰 결실을 맺었습니다. 앞으로도 동문의 자부심과 우정을 이어주는 든든한 소통의 장으로 더욱 번창하기를 기원합니다.” 30회 오동규
“용고 4만의 자랑, 자부심 <큰그릇>! 500호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용고 파이팅!” 31회 이언구
“너의 자랑이 무엇인가? 용산고등학교 입학이요. 너의 큰 자랑이 무엇인가? 용산고등학교 졸업이요. 너의 가장 큰 자랑이 무엇인가? <큰그릇>으로 하나되는 선후배와 동기들이 엄청 많다는 것입니다.” 33회 이철근
“<큰그릇> 500호라는 숫자에는 용산고의 발자취가 담겨 있습니다. 언제나 동문의 소식에 귀 기울여 온 <큰그릇>의 걸음을 응원합니다.” 34회 안명환
“80년간 4만 동문이 한발 한발 한땀 한땀 정성을 기울인 <큰그릇>, 우리 용산의 큰 그릇에서 인류의 꿈을 키우는 큰 그릇으로 발전하길 기원합니다.” 35회 송용근
“<큰그릇> 500호를 벅찬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영원히 4만 동문을 이어주는 크고 튼튼한 그릇으로 남아주길 기원합니다.” 36회 김태용
“500호 담은 <큰그릇> 더욱 큰 그릇으로1000호를 향해 나아갑니다. 축하합니다.” 37회 윤상철
“4만 용산인의 가치를 잇고 미래를 여는 소통의 중심, <큰그릇> 500호 발간을 38회 동기 모두의 마음을 담아 축하합니다.” 38회 양일우
“용산고의 역사와 전통을 담아 온 <큰그릇> 500호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선후배 동기 분들의 자부심과 우정을 이어주는 든든한 소통의 장으로 더욱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42회 민윤홍
“자랑스런 우리의 용고! 용고의 위상이 <큰그릇> 500호 발간으로 더 높아갑니다. 그동안 고생하시고 노력하신 선후배님들 감사합니다!” 44회 장무경
“동문의 추억을 잇고 새로운 역사를 써온 <큰그릇> 500호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46회 김상협
“용산의 빛나는 순간마다 늘 함께했던 <큰그릇> 500호를 넘어 1000호를 향해 더욱 힘차게 도약하기를 응원합니다.” 48회 한승대
큰그릇 5
<큰그릇> 500호 특집
동창회보 <큰그릇>이 걸어온 길
광복 후1946년 9월 9일에 문을 연 용산고등학교는 올해 후암동 같은 교정에서 개교 80주년을 맞이했다. 배출한 동문은 무려 40,972명. 그동안 동문들을 하나로 이어준 소식지 용산고등학교 동창회보 <큰그릇>은 <용산고 동창회지>라는 제호로 1970년 4월 처음 발간되었다. 이후 <큰그릇>은 56년 동안 동문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발간되어 2026년 9월 지령 500호를 맞았다. 한때는 매월 1만 8천 부를 발간하는 저력을 보여주며 전세계 22개국 동문에게까지 배포되었고 고교 동창회보 중 유일하게 월간 발행을 고집하며 최장수 지령을 자랑하는 <큰그릇> 그 500걸음 역사를 간략하게 들여다 본다. <편집자 註>
<용산고 동창회보지>에서 매월 발간하는 <큰그릇>으로
용산고동창회 소식지인 <큰그릇>은 1970년 4월 김종양(1회) 동창회장과 김원혁 간사장 주도로 <용산고 동창회지>라는 제호로 4-6배판 총 22쪽으로 구성된 창간호 발간으로 시작했다. <용산고 동창회지>는 당초 격월 발간을 목표로 삼았으나 편집진을 구하지 못해 간신히 다음해 5월 같은 형식으로 2호를 당시 대학생이었던 박철수(18회) 이순영(20회)이 발간했다. 이후 박철수 이순영 동문의 군 입대로 편집진을 구하지 못해 발간을 하지 못했던 동창회보는 4회 태기엽 간사장이 모교 문예반원들을 접촉하여 1976년 6년 만에 복간되어 3호부터 <용우회보>라는 제호와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회보는 부정기적으로 발간되었고 간신히 29회 박만흠 동문과 모교 문예반 출신들이 동원되어 13호까지 이어갔다.
1984년 8월 제호를 <용산고등학교 동창회보>로 바꿔13호~15호를 발간했던 동창회보는 마침내 1986년 2월 16호부터 당시 동창회장 장치혁(4회) 동문 주도로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동창회보 월간 정기발간을 시작하였다. 예산과 편집인력을 확보한 동창회는 처음으로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임홍빈(13회) 위원장과 김용진(31회) 동문이 지금의 4-6배판 16쪽 분량 동창회보를 만들었다. 이어 이배근(13회) 동문이 신임편집위원장으로 합류하면서 10년간 동창회보는 꾸준히 질적성장을 이루었다
1992년 10월 편집위원회는 동창회보 제호를 교가에서 따와 <큰그릇>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동문의 관심과 지원 광고수입 등의 예산 지원과 탄탄한 편집진을 갖추며 꾸준히 발전해온 동창회보는 정상영(6회) 총회장이 취임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사재를 털어 동창회 전산화시스템을 만들어 동기회에서 배포하던 회보를 개인 발송제로 바꾸고, 졸업생은 물론 모교 재학생과 교직원에게도 배포하였다. 이후 표지도 컬러로 바꾼 <큰그릇>은 이양섭(8회) 총동창회장 시절인 1994년 6월부터 해외 22개국 700여 명 동문에게 해외발송을 시작했다. 그후 디지털세상에 맞춰 2008년 홈페이지에 웹사이트 <큰그릇> 웹과 인쇄물로 <큰그릇> 발행을 병행하여 2026년 9월 현재 웹구독 약 19,000명 책자형 인쇄물은 18,000부에서 6,000여부로 현저히 줄어드는 추세이다.
용산인 무보수 자원봉사자 힘으로 500호
오늘날 <큰그릇>이 최고 동창회보로 자리잡기까지 많은 동문의 재능기부와 헌신이 있었다. 특히 <큰그릇>처럼 오롯이 졸업생들 무보수 자원봉사 동문 힘으로 운영하며 최장수 지령으로 회보를 발간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초기 <용산고 동창회지>를 발간할 때에는 편집진을 구하기가 어려워 부정기적으로 간행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1986년부터 편집위원회가 구성이 되며 대거 전문인력들이 재능기부를 자원하며 안정적인 발간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모교 문예반 출신 박만흠(29회) 김용진(31회) 주지엽(31회) 박현섭(32회)과 박태석(32회)이 주도하며 발간했던 동창회보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신문기자 출신 고 홍 의(12회) 동문이 편집진에 합류했고, 문화예술인 윤세일(14회) 이청승(14회), 박옥걸(15회) 정수남(15회) 이이재(28회) 동문 등이 가세하여 자원봉사로 <큰그릇>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이배근(13회) 동문은 10년간 편집회의를 이끌며 <큰그릇>의 꾸준한 성장과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여기에 전문편집인 출신으로 20년간 자문위원으로 교정·교열에 봉사한 고 백옥현(6회) 동문과 10여 년간 편집장을 맡아 용산 사랑을 실천한 소설가 고 김 신(20회) 동문, 디자인학과 교수 정상근(30회) 동문 등이 합류해 <큰그릇>은 알찬 구성과 세련된 모양세를 더하게 되었다.
2020년대 들어서 디지털 매체 부상으로 인쇄 매체 발행부수는 줄었으나 회보 초기 편집진인 박만흠(29회) 정상근(30회) 박태석(32회) 동문을 위시한 신문 교열기자 출신 박인호(27회) 자문위원과 한국승(31회) 이광표(39회) 조정현(40회) 윤병영(40회) 천상욱(42회) 동문이 지금까지 <큰그릇>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박만흠(29회) 동문은 재학시절인 1977년 동창회보 3호를 시작으로 직장 지방발령 기간을 제외하고 동창회보 편집위원으로 5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 <큰그릇> 500호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이다.
큰그릇 지킴이들 왼쪽부터 역대 편집위원장 故 홍 의(12회) 이배근(13회) 故 김 신(20회)
20회) 현 편집위원장 박만흠(29회) 역대 자문위원 故 백옥현(6회) 현 자문위원 박인호(27회)
알찬 내용과 아낌없는 후원으로 <큰그릇>을 오늘날까지
지령 500호를 맞은 <큰그릇>은 총 350만 부 이상을 발행한 것으로 집계된다. 400호 이후 500호까지 <큰그릇>을 알찬 동문회보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신 동문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제호는 서예가 김충기(3회) 동문이 무상으로 제공했고, 표지는 고 이근배(15회) 채호선(27회) 동문이 촬영한 사진과 나비연구소 김진오 소장, 국립수목원 정재민 박사,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네이버지식백과에서 구입해서 사용했으며, 정영길(32회) 동문이 그린 문인화 등이 무상으로 제공되어 표지로 사용하였다.
장기간 인기를 끈 연재물로는 ‘반대가 진리다’(김상대 7회)는 무려 100회를 게재했고, 이형구의 건강상식(이형구 11회), 양재헌의 행복여행(양재헌 20회), 이택순의 역사기행(이택순 21회), 번안가요 읽어주던 남자(정우성 22회), 황재순의 아!그렇구나(황재순 22회), 최성호의 왕릉이야기와 한옥이야기(최성호 26회), 김세봉의 고전산책(김세봉 28회), 행인일기(윤재웅 31회), 한국인 행복보고서(채정호 31회), 이준환의 편의점 이야기(이준환 36회) 등이 1년 이상 연재를 통해 삶의 지혜와 다양한 지식을 깨닫게 해주었다.
또한 400호 이후 <큰그릇> 발간에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준 2, 3, 4면 컬러광고를 게재한 동문으로 KCC(정상영 6회 정몽진 30회) 이화공영(최삼규 10회) 우진산전(김영창 11회) 말타니(이세용 19회) 동방에프티엘(정영준 20회) 고려당(정재호 21회) 국순당(배중호 22회) 제스파(김태주 22회) 생그린(성백원 23회) 범창모산(김창식 25회) 도스코(이우춘 26회) YK건기(채호선 27회) 을지재단(박준영 28회) PXG(신재호 29회) 선의의료재단(문영기 29회) 풀란이앤지(서동석 29회) 세림(이석주 30회), KCC글라스(정몽익 31회) 사보이호텔(조현식 38회 조정식 40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도 500회가 넘는 인터뷰 기사와 200회가 넘는 동문모임 탐방기사, 동문기고들이 <큰그릇>을 꽉 채워왔다.
큰그릇 9
500호 특집 | 용산고 80년 약사 1 한국사 고비마다 앞장선 용산 동문
용산의 문이 열리다
1946년 9월 9일 개교한 모교가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개교 80년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용산고 80년 약사를 의미 있는 부분을 모아 연재한다. 학창 시절 소중했던 기억을 되살려 보는 반갑고 즐거운 연재가 되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註>
개교 당시 교모와 교기와 명동 시공관에서 학생회가 개최한 제1회 예술제 안내 팸플릿
광복 이전의 용산고
일본인들이 서울에 그들의 중등교육기관을 세운 것은 1910년 5월에 일본인 거류민단에 의하여 개교한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가 처음이다.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 조선주둔군이 지금 미8군 자리에 진주하자 후암동 일대는 자연스럽게 일본 군인 가족들이 모여 사는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일본인 자제 교육을 위해 1917년 4월 1일 5년제 용산공립중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한국인 중등교육기관이었던 고등보통학교가 4년제였던 것과 비교하면 식민지 교육과 차별화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경성중학교에는 일본인 고급 관리들의 자제가 다녔고 용산중학교에는 고급 장교의 자제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러한 구분이 생긴 것은 구 용중 개교 이후 몇 년이 흐른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초창기 용산중학교를 다녔던 신태식(구 용중 6기)은 “당시 용산중은 관립이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300명을 뽑아 1등부터 150등까지는 경성중학교에 보내고 나머지를 용중에 보내어 당시 용중생들은 부끄러워 모자를 감추어 들고 다녔으나 후쿠시마 교장 부임 후로 용산중학생이 경성중학생보다 단연 동경제대 합격률이 높아져 으스대고 다녔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1917년 개교한 용산공립중학교는 일본인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인 학생의 입학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내선일체 정책과 어긋난다 하여 극소수의 한국인 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여 개교 이듬해부터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인 학생은 1923년 구 용중 제2에 박영균, 김의영 2명을 시작으로 1945년 25기 9명까지 한국인 학생은 83명이 졸업하여 재학생 1천 명 중 한국인 학생은 10명 내외로 소수였다.
구 용중 동문들의 회고에 의하면 학업과 운동 경기 면에서 경성중학교와 항상 경쟁 관계에 있었다. 경성중학에는 총독부 고급 관리 자제가 많았고, 구 용중에는 조선 주둔군 고급 장교 자제가 많아 교풍에 차이가 있었다. 용산중에는 유도와 검도가 필수과목이어서 지금의 사관학교와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경성중학과 용산중학 사이에 매년 정기적으로 야구 시합이 열려, 지금의 연고전을 방불케 하는 열기를 띠었다.
1931년 가을 목조 건물이었던 본관이 불타 1932년에 본관을 당시로서는 최신식 시설인 스팀 난방 시설로 건축하고 바닥은 만주에서 들여온 나무로 시공했으며, 국내 최초로 중학교에 수영장을 만들어 많은 부러움을 샀다. 그 위치는 지금 수영장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한편 이 시기 특기할 사항은 지금 경동고등학교 전신 욱구공립중학교가 1940년 4월에 우리 용산공립중학교 기숙사를 빌려 개교하여 학교 건물과 시설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1년 남짓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이다
용산의 개교
광복이 되자 그동안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어온 용산은 서울시가 접수하여 일시적으로 폐쇄시켰다. 1945년 9월 17일 미군정청 학무국 지시에 의해 각급학교가 개교 되었으나 용산은 미군이 차지하고 있어 개교가 지연되었다. 1946년 5월에 용산 터에서 개교한 경기사범(지금 국립 서울교육대학교) 초대 교장 김용하(1946.9.9~1947.6.30)에게 1946년 8월 7일 자로 용산중학교 교장을 겸하도록 하여 1946년 9월 9일 첫 입학생(현재 3회 졸업생) 250명(남학생 200명, 여학생 50명)과 15명 교사진으로 개교하였다.
당시 미 군정청 학무국에서 용산중학교를 미국식 남녀공학 시범학교로 지정하여 남학생 4개 학급 50명씩 200명과 여학생 1개 학급 50명을 8월에 모집하고 미국식 학제에 따라 신학기를 9월 초로 잡아 개교를 계획하였으나 3천여 명 응시생이 몰려들어 남학생 1학급 50명을 증원하여 입학생을 선발하여 개교하였다.
한편 개교 직전에 학교 이름을 ‘용문중학교’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1946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2면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 용산중학은 이번에 교명을 용문(龍文)중학으로 고쳐 남녀 초급중학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원서 접수 기일은 16일까지이고 모집 인원은 여자 50명 남자 150명이라고 한다.’
용산의 첫 입학생이 되는 3회 졸업생들은 입학시험풍경을 황량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학교 본관과 대부분 시설은 미군과 경기사범이 사용하고 있었고, 그나마 목조 교사(일제 당시 기숙사)에도 책상과 걸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필기시험 장소인 교실은 청소조차 되어 있지 않아 수험생들은 시험을 치르기 전에 먼저 청소부터 해야 했다. 빈 교실과 강당을 쓸어내고 그 바닥에 백묵으로 줄을 그은 다음 그 자리에 앉아서 필기시험을 치렀으니, 흡사 조선시대 학동들이 과거시험을 치르는 풍경을 연상시켰다.
1947년 7월 1일 제2대 양만영(1947.7.1~1949.12.7) 교장이 부임했다.
신임 양만영 교장이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학업 분위기 조성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모교 본관을 차지하고 있던 경기사범 이전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남녀공학은 학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1학급 여학생들을 수도여중 등 다른 여중으로 전학시켰다.
그리고 1개 학년뿐인 학교 규모를 갖추기 위해 1947년 8월 1학년 신입생(4회) 선발고사가 끝난 후 3, 4학년 편입생 선발고사를 치러 입학 및 편입을 통해 학생수가 1학년(4회) 5학급 350여 명, 2학년(3회) 250여 명, 3학년(2회)은 4학급 200여 명, 4학년(1회)은 3학급 180여 명이 되었다. 이로써 용산은 비로소 중등학교로서의 명실상부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용산을 상징하는 배지가 마름모꼴 안에 ‘용중’이라는 글귀가 들어간 것을 사용하였는데 경기중고등학교와 비슷했다. 양 교장은 새롭게 용산을 상징하는 배지가 필요함을 느껴 박득순 미술 선생에게 의뢰하여 현재 사용하는 용산 고유의 배지를 만들었다.
푸른색 바탕에 Y자와 펜촉, 그리고 흰 줄로 이루어진 용산의 배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①먼저 Y자를 가로지른 두 줄의 흰선은 백의민족인 우리 민족혼을 뜻한다.
②푸른색 바탕은 무궁한 진리를 뜻하고 그 위에 예리한 펜은 진리를 탐구해 냄을 뜻한다.
③Y자형은 굳센 두 팔로 굳건한 신체를 단련함을 뜻한다.
양만영 교장에 이어 1949년 부임한 제3대 원흥균(1949.12.8~1950.11.28) 교장은 부임 이듬해에 6·25가 터졌으므로 실질적으로 학교를 운영한 기간은 반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원 교장은 재임 중 교가 제정과 홍익인간 기념비 건립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절과 2절 그리고 후렴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가 가사는 ‘이 나라 이 겨레의 큰 그릇 되고’라는 구절에 요약된다고 하겠다. 특히 ‘자유와 관용을 깨우치도다’라는 구절은 큰 그릇이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덕목을 함축하고 있어서 현재도 많은 동문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이 교육법에서 6·4·2·4의 새로운 학제를 선택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고 또 한 번 학제 변동을 겪어야 했다. 또 미군정 시대부터 건국이념이었던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교육이념으로 채택하였다.
안호상 문교부 장관의 교육 정책에 적극적이었던 원흥균 교장은 자신이 직접 쓴 붓글씨를 음각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비를 건립하였다 뒷면에 ‘단기 4283년 1950년 6월 1일 교육법 실시 기념’이라고 설립 일자가 새겨진 ‘홍익인간(弘益人間)’ 비는 오늘날까지 용산고등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정면 정원에 위치하고 있다.
최고의 대입 성적 신화를 창조한 1회 졸업생
1950년 5월 5일 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용산중 4학년에 편입했던 170여 명의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졸업생 대부분은 김일성의 학정을 피해 월남한 학생들이었기에 이들의 학창 생활 어려움을 생각하면 1회생들의 졸업은 감격 그 자체였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1950년 4월에 치러진 대학 입시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명문대 입학률에서 단연 전국 최고의 합격률을 기록한 것이다
개교 당시 여러 면에서 용산중은 서울중학과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 후 한국인 학교로 1년 먼저 문을 연 서울중학 1949년 첫 졸업생들이 대학 진학률에서 전국 최고의 수준을 보이며 일거에 명문 중학교로 위상을 차지하자 용산의 교사와 학생들은 크게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1회 졸업생들은 ‘경기, 서울을 이기자!’라는 것을 목표를 삼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했다. 1회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두고두고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라 되리라는 강한 책임감이 모두에게 열심히 공부해 좋은 전통을 남겨야 한다는 목표가 되었다.
당시 연세대학교가 가장 먼저 합격자를 발표했다. 용산은 30여 명이 응시하여 거의 다 합격하였고, 이어서 발표된 고려대학교에서도 거의 다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합격자 발표가 있었는데, 이때를 안해균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응시했던 서울법대에는 250명 모집에 1,200여 명이 지원하여 5 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이었습니다. 그런데 용산은 21명 지원에 20명이 합격했나 그래요. 전국 최고의 합격률이었죠. 수험표를 받을 때, 처음이 용산이면 다음이 타학교, 그리고 다시 용산 다음에 타학교, 이런 식이었는데 나중에 발표할 때 보니까 전부 용산, 용산, 용산 이렇게 나왔어요. 그 때 발표가 저녁 7시 반쯤이었는데 우리들은 스크럼을 짜고 서울대학교(당시 동숭동 소재)에서 학교까지 교가를 부르며 행진했고… 전부가 다 울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1회로서 모교에 자랑스러운 전통을 세웠다는 점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그런 성취감에서 울었지요….”
1회 동문들은 선배 없는 서러움을 입시장에서 느꼈다고 했다. 입시장에 내걸린 각종 플래카드와 격문들 중에 용산의 이름으로 내걸린 응원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맏형의 책임감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당시 170여 명의 졸업생 중에서 130여 명이 소위 명문대라 일컫는 서울대, 연대, 고대에 지원하여 100여 명의 합격자를 냈으니 거의 8할에 가까운 합격률이었다. 이렇게 1회는 용산이라는 이름을 명문 고등학교로 우뚝 세웠던 것이다.
개교 후 첫 졸업식이 되는 6년제 용산중학교의 제1회 졸업식은 그 해 5월 5일 오후 5시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원흥균 교장은 이 자랑스러운 제자들을 위하여 두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그 첫째는 170여 명의 졸업생들에게 초등교육 준교사 자격증을 준 것이고, 그 둘째는 졸업 선물로 안성맞춤인 백동 수저 한 벌씩을 주었다.
초등교육 준교사 자격증은 실업률이 높던 당시 상황에서 혹시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못했을 경우에 취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려는 원 교장의 배려였다. 원 교장은 이관섭 문교부 사범교육 과장과 협의하여 몸소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배부하고 이관섭 과장을 초빙하여 강의를 받은 후 자격증을 받게 했다. 또한 졸업식에는 원 교장 부임 후 모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던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이 참석하여 일일이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수여하여 제1회 졸업식은 더욱 뜻깊고도 자랑스러운 자리가 되었다
큰그릇 13
인터뷰┃백승원·19회·팝 아티스트
가족 3대가 함께 한 특별한 연주회
팝 아티스트 백승원 동문(19회)은 꾸준함과 성실함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4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성실하게 이어왔고, 은퇴 후에는 색소폰을 잡아 20년 가까이 갈고닦았다. 그리고 마침내 전문 연주자인 두 며느리와 음악을 좋아하는 손주들까지 함께하는 가족 연주회를 두 차례나 열었다.
한 가지를 시작하면 쉽게 놓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사람. 백승원 동문을 만나 그의 긴 시간 속에 자리한 ‘끈질김’의 의미를 들었다. <편집자 註>
가족 3대가 함께 만든 무대
지난 8월 8일 서울 강남구 학동 삼익아트홀에서 색소포니스트 백승원 동문을 중심으로 가족 3대가 함께한 특별한 연주회가 열렸다. 미국 Berklee College of Music 출신인 큰며느리는 피아노를, 뉴욕 Peabody Conservatory of Music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작은며느리는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미국에 사는 손자와 손녀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취미로 시작한 바이올린으로 Boston Philharmonic Youth Orchestra 단원이 되어 무대에 섰다. 여기에 작은 손녀는 할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서겠다는 마음으로 6개월 동안 플루트를 열심히 연습해 이날 연주를 선보였다.
각자 자리에서 음악을 이어온 가족들이 한 무대에 모였다. 서로 다른 악기와 세대가 하나의 음악으로 어우러진, 말 그대로 가족이 함께 만든 특별한 공연이었다.
백 동문은 10년 전 2016년 삼성동 베어홀에서 <백승원 색소폰 연주회>를 열었다. 그전에도 2009~2010년 둔내 성우리조트 공연을 비롯해 2011년 SBS LOVE FM <최백호의 낭만시대> 아마추어 색소폰 콘테스트에 참가했고,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오크밸리 Summer Festival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그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경력보다 ‘꾸준히 해왔다는 사실’이다. 노루표페인트 그룹에서 30여 년을 근무하고 계열사 대표를 끝으로 은퇴한 그는 평소 음악 듣기를 좋아했다. 은퇴 후 색소폰을 시작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처음부터 전문 연주자를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어느덧 20년이 되었고, 결국 가족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뜻깊은 결실로 이어졌다.
서울로 올라와 용산고를 다니며
“저는 용산고 다닐 때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백 동문은 학창 시절을 그렇게 회상한다. 논산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호남선 밤 열차를 타고 본가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이 혹시 올까 싶어 매일 저녁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이불 속에 묻어두곤 하셨다고 한다. 집으로 올 아들을 위해 차려진 따뜻한 밥 한 그릇. 백 동문에게 그 밥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로 남아 있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은 긴 인생길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지탱한 힘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는 여섯 살 터울 둘째 누나 보살핌을 받았다. 누나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자취방을 마련해 동생을 뒷바라지했고, 결혼한 뒤에도 몇 년 동안 신혼집에서 동생과 함께 지내며 보살폈다고 한다.
부모님의 사랑과 누나의 헌신. 어린 시절 자신을 믿고 기다린 가족의 마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백승원 동문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둘째 누나에 대한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백승원 동문이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의외로 간단하다. “끈질기게 노력하십시오. 노력하려는 마음 자체가 재능입니다.” 그는 회사도 끈질기게 다녔고, 색소폰도 끈질기게 연습했다.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40년 가까운 직장 생활과 20년 색소폰 연습, 그리고 두 번의 가족 연주회!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단어는 어쩌면 ‘끈질김’인지도 모른다.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는 것. 그리고 계속하려는 마음 자체가 재능일 수 있다는 것. 백승원 동문이 후배들에게 남기는 말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끈질기게 노력하십시오.”
글 천상욱·42회·편집위원
이택순(21회)의 역사 기행 14: 아무르강을 따라 우리의 얼을 찾다
황태자의 세계순방, 니콜라이 개선문 1
오늘 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지 스베트란스카야 거리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 개선문’ 탐방이다. 성하의 계절 녹음이 짙게 깔려 나뭇가지에 가려진 개선문이 보인다. 마치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이슬람 여인처럼 숨김과 은둔의 미를 보여준다.
러시아 정교의 비잔틴 전통 양식과 유럽형의 아치로 이루어진 이국적인 유라시아의 이 건축물은 어떤 역사의 스토리를 담고 있을까?
이 개선문의 정식명칭은 ‘니콜라이황태자 개선문’으로 1891년 러시아 니콜라이 황태자 세계 순방과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니콜라이 황태자(1868-1918)’는 알렉산드르 3세 황제의 아들로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이 개선문도 몰락한 황제의 운명과 같이 혁명 세력에 의해 1930년대 철거되었다가 2003년에 복원된 것이다.
1891년 봄, 니콜라이 황태자 나이 23세 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봄의 햇살이 들기 시작하자 황태자는 아버지의 권유로 유라시아 순방에 돌입한다. 황태자로서 외교 및 견문을 넓혀 세계정세를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동시에 제국의 변방인 시베리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시베리아 횡단 철도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보려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의도였다.
이 순방은 약 6개월이 소요되는 대도전이었다. 19세기 말의 세계정세 지리적 교통 여건을 감안하면 거의 탐험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기차와 마차를 타고 흑해 연안의 오데사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 흑해 함대의 순양함으로 갈아타고 지중해로 나아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방문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다. 함대는 홍해와 인도양을 거쳐 인도, 스리랑카, 태국, 말라카 해협, 베트남,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이 경로는 러시아 발틱 함대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할 계획 항로였으나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 운하 통과가 거부된 단축 항로이기도 하다. 러일전쟁 시 발틱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하여 쓰시마에 도착하여 수개월의 시간과 전력 허비로 일본 함대의 제물이 된 것이다.
황태자의 순방은 곡절이 많았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본 고베로 입항해 교토의 인근 오쓰 시를 방문 중 일본 측 경비경찰관으로부터 칼로 피습을 당하는 사고(오쓰사건)를 당한다. 니콜라이 황태자가 중상을 입어 러일 간에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다. 당황한 일본 측은 메이지 천황이 의료진을 대동하여 군함으로 들어가 직접 문병하고 사과하며 전쟁의 위기를 넘겼다.
일본 순방 후 함대는 동해를 항해하여 제국의 동쪽 변방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다. 러시아의 황태자가 극동 영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것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개혁 군주로 불리는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1855년-1881년 재위)때 쟁취한 동방의 치세를 보게 된다. 청나라(중국)로부터 아무르강(흑룡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연해주) 광활한 영토를 쟁취했다. 러시아 영토가 태평양과 일본, 조선 국경까지 확장되는 대단한 치적을 확인한 것이다.
황태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역사적인 시베리아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하고, 이를 기념하여 니콜라이 2세 황태자 개선문을 건립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아무르강(흑룡강) 연안을 배를 타고 이동하며 이루쿠츠크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5개월 만에 귀환한다.
그가 귀환 중 아무르강(흑룡강)에서 바라본 만주 대륙은 러시아에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을까? 극동 순방은 그의 안목을 동방으로 향하게 한 것만은 분명하다.
러시아의 19세기 말 외교 전략 ‘유럽의 균형 유지, 아시아로 팽창’과도 부합하는 방향이었다. 당연히 아시아 신흥 강국 일본과는 충돌하는 지정학적 위험을 내포한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큰그릇 17
AI 이야기 4 호모 에이아이언스(Homo AIens) 천상욱·42회
문학소녀였던 그대, 이제 작사가가 될 차례입니다
아직도, 그날의 문장을 기억하십니까?
동문 사모님! 아직도 문학소녀인 당신의 소중한 감정이, 아름다운 감성이, 소리가 되어 세상에 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AI로 가능해졌으니, 그냥 해보자는 게 아닙니다. 꼭꼭 숨겨둔 문학소녀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자는 겁니다. 그 공간이 음악입니다. 교복 안주머니에 시를 적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일기장 귀퉁이에 가사 같은 문장을 남기던 밤도 있었을 겁니다. 그 문장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리를 갖지 못했을 뿐입니다.
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작사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작곡까지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멜로디의 뼈대를 잡고 Suno가 그 위에 살을 붙입니다. 단편영화 〈주파수(Frequency)〉에 들어간 삽입곡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곡의 방향과 감정선을 잡고, Suno와 여러 번 주고받으며 다듬었습니다.
완성된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게 정말 나온 건가 싶었습니다. 악보를 볼 줄 몰라도, 건반을 칠 줄 몰라도, 머릿속에만 있던 멜로디가 실제 소리가 되어 나왔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만든 곡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음악 댄스 단편영화 〈반짝이는 내가 될 거야(I Will Shine)〉의 삽입곡입니다. 이 작품은 지금 제작이 잠시 멈춰 있습니다.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시작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곡은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작품보다 노래가 먼저 태어난 셈입니다. 작사만 하던 사람이 작곡까지 하게 된 건, 제가 갑자기 음악을 잘하게 되어서가 아닙니다. 머릿속에만 있던 멜로디를 꺼낼 도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문학소녀였던 당신에게도, 지금 그 도구가 있습니다.
Suno, 무엇인가요?
Suno는 텍스트를 입력하면 가사, 멜로디, 보컬, 반주가 모두 들어간 완성된 곡을 만들어 주는 AI 음악 생성 서비스입니다. 악기를 다룰 줄 몰라도, 악보를 읽을 줄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필요한 건 하고 싶은 이야기뿐입니다.
시작하는 법
① suno.com에 접속해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 무료 가입이며, 매일 일정량의 무료 크레딧이 주어져 하루 여러 곡을 만들 수 있습니다.
② 왼쪽 메뉴의 ‘Create’를 누르면 두 가지 모드가 보입니다.
○Simple 모드: 곡의 분위기를 한두 문장으로 설명하면, AI가 가사와 멜로디를 알아서 만들어 줍니다. 처음 써보는 분께 권합니다.
○Advanced 모드: 가사를 직접 쓰고, 곡의 스타일까지 지정합니다. 이미 써둔 글이 있는 분, 자신의 이야기를 곡에 그대로 담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③ Advanced 모드를 쓴다면 두 칸이 나옵니다. ‘Lyrics’에는 가사를, ‘Style’에는 원하는 음악 스타일을 적습니다.
○Style 칸 예시: “잔잔한 어쿠스틱 발라드, 여성 보컬, 감성적인 분위기”
○Lyrics 칸에는 [Verse], [Chorus], [Bridge] 같은 구조 표시를 넣고 그 아래에 가사를 씁니다. AI가 이 표시를 곡의 이야기 흐름으로 읽어냅니다.
④ 한국어 가사가 어색하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쉼표와 마침표를 넣어 호흡을 조절해 보세요. 발음이 어색하다면 Style 칸에 ‘또렷한 한국어 발음’이라는 취지의 문구를 추가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⑤ 완성된 곡은 두 개의 버전으로 나옵니다. 둘 다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쪽을 고르면 됩니다
가사에도 맥락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직접 쓴 시가 있거나, 일기가 있거나, 예쁜 메모를 가지고 계신다면 그걸로 가사를 만드시면 됩니다. 만약 새로 가사를 만들어야 한다면, 지난 호에서 배운 콘텍스트 엔지니어링이 여기서도 그대로 쓰입니다. “슬픈 노래 가사 써 줘.”라고 요청하면? 평범한 결과가 나옵니다. 대신 이렇게 써보세요. (3)~(6)은 각자에 맞춰서 적으시면 됩니다.
(1) 너는 작사와 작곡의 20년 이상 된 전문가야.
(2) 나는 Suno로 작곡하기 위해, 가사가 필요해.
(3) 나는 국어 교사로 20년을 일했고,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어.
(4) 대학 시절 문예반에서 쓰던 시가 아직도 노트에 남아 있어.
(5)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답장을 쓰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
(6) 잔잔하고 담담한 톤으로, 눈물이 아니라 미소로 끝났으면 좋겠어.
(7) Suno의 Advanced 모드에 사용할 수 있게, [Verse], [Chorus], [Bridge] 등의 구조 표시도 부탁해
당신의 진짜 이야기가 들어가는 순간, 그 곡은 아무도 만들 수 없는 곡이 됩니다.
오늘 해볼 것
노트나 일기장, 혹은 기억 속에만 있는 그 시절 문장 하나를 떠올리세요. 그리고 suno.com에 접속해, Simple 모드에서 이렇게 말해보세요.
“나는 ___했던 사람이야. 그 시절 나에게 남기고 싶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 ___한 분위기로.”
완성된 곡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이 노래, 내가 만든 게 맞나요?
문학소녀였던 그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갖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그 소리를 가질 차례입니다.
다음 호에는 Raw 아이디어가 어떻게 AI 안에서 숙성되는지, 그리고 도구와 나 사이의 관계가 왜 결과를 바꾸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천상욱(42회) 영화감독·작가·작사가·공연 연출·사회, AI를 활용한 창작과 비즈니스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세봉의 고전산책 51: 김세봉·28회·(사)유도회 한문연수원 교수
목이 강한 낙양령과 귀먹은 정랑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동선(董宣)이라는 강직한 관료가 있었다. 그는 권세가 앞에서도 결코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가 낙양령(洛陽令)으로 재직 당시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공주(湖陽公主)의 노비가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노비가 공주의 권세를 믿고 공주 부중(府中)에 숨어 있어 관원들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다. 동선은 공주가 외출할 때를 기다렸다가 공주의 수레를 가로막고 공주의 앞에서 노비의 죄상을 호되게 꾸짖은 뒤 그 자리에서 즉시 노비를 격살(格殺 : 무기 따위로 쳐서 죽임)하여 법을 집행하였다.
공주는 바로 환궁하여 광무제에게 자신의 분함을 하소연하였고, 광무제 또한 대로(大怒)하여 동선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자 하였다. 동선은 머리를 조아리며 한마디만 하고 죽겠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성덕(聖德)으로 중흥(中興)을 하셨는데 종을 방치하여 양민(良民)을 죽이게 하신다면 장차 무엇으로 천하를 다스리시겠습니까? 신은 매를 맞을 필요가 없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주십시오.”라면서 즉시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니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다.
광무제가 환관을 시켜 동선을 붙들어 말리고,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 공주에게 사과하게 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광무제가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려 했지만 동선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공주는 광무제에게 “평민[白衣] 시절에는 도망자나 죄인을 숨겨주어도 관리들이 감히 문 앞에 오지도 못하더니, 이제 천자가 되어서는 한 가지 명령조차 위엄 있게 시행하지 못하시냐?”고 한탄하는 지경이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며 말하길, “천자는 평민 때와 같지 않다”고 하며, ‘목이 뻣뻣한 현령[強項令]’에게 나가라고 명령하고 오히려 30만 전(錢)을 하사하니 동선은 이를 모두 아래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부터 호강(豪强: 권세가와 호족)들의 기세를 꺾고 공격하니 떨며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선에게 붙은 별명이 목이 뻣뻣하다는 강항령(強項令)과 누운 호랑이라는 뜻의 와호(臥虎)였다.
동선은 74세의 나이로 관직에 있던 중 사망했는데, 집에 남은 재산이 대맥(大麥: 보리) 몇 자루와 부서진 수레 한 대뿐이었다고 한다. 광무제는 이 소식을 듣고 “동선이 죽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청렴했는지 알겠구나”라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귀감을 삼을 만한 인물로 조언수(趙彦秀)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그는 조선 명종(明宗) 때 명신(名臣)이다. 자(字)는 백고(伯高)이니 아마도 형제 중 맏이로, 높을 고(高)자를 쓴 것은 이름자의 빼어날 수(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호(號)는 신선당(信善堂)이라고 했으니 그의 이름과 자호(字號)만 보아도 빼어나고 착한 것을 추구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조언수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있을 때의 일화다. 이조 정랑은 정5품에 불과하지만 문관(文官)의 인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직책이다. 오죽하면 선조(宣祖) 초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발생하였을 때 이조 정랑 자리를 가지고 다투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이조의 당상(堂上)이 결원이 생기자 어떤 장관이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천거한 일이 있다. 그러자 그는 일부러 못 들은 척하였고 아무리 강압을 하여도 절대 응하지 않았다. 그 장관이 농으로 말하기를, ‘정랑이 귀가 먹었는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도 어지간히 대가 셌던 모양이다.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가 나름대로 자기의 직분을 훌륭히 지킨 점에 대하여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목이 강한 낙양령 동선과 귀먹은 정랑 조언수처럼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는 공직자가 지금엔들 어찌 없겠는가마는 어디 가뭄에 콩 나듯 해서야 되겠는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모두 그들처럼 공정한 자세로 임해야 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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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결연, 장학기금 협찬 동문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학력증진비로 장학금 지원 지속
형제결연 장학금 2026.8.16~2026.9.15
14회 김신원 150,000원
2026 형제결연 장학사업 참여 안내
•2026년 신규 1계좌 180만 원(분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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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문은 개인 수표 이용(Pay to: Yongsan High School Alumni Scholarship Foundation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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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1만 원 이상) 참여도 환영합니다.
모교발전금 모금 지속 2026.8.16~2026.9.15
8회 이범재 1십만 원(합계 18,000,000원)
11회 이신덕 1십만 원(합계 12,600,000원)
19회 이호성 2십만 원(합계 32,000,000원)
54회 조철현 5만 원(합계 200,000원)
2026학년도 2학기 동창회 장학생 선정
(학재-인성) 3학년 우성원 박지민, 2학년 남궁호 김원이 (중용회-모범) 3학년 박서준 노태영, 2학년 김태원 박리명, 1학년 장준원 김연승
(민영우-성적) 3학년 이재우 김태영 김준회 (김영훈-성적) 2학년 김주빈 정현석 최우진 (김종률-성적) 1학년 김주환 (정용승 지성) 2학년 김사헌
(말타니-성적) 3학년 김대환, 2학년 유호준, 1학년 김서준 (에이원-성적) 3학년 임승현
(중용회-성적) 3학년 오지섭 박상헌 권의희 이서준, 2학년 홍승기 이창현 김민재 김서후, 1학년 최예준 윤준용 현동건 (정감어린-성적) 1학년 김재민
(장학재단-성적) 3학년 김호영 최진호 오정우 왕민욱 이재상 신명호
2학년 김진성 하선우 신재경 오태규 황이우 김노아 정민재
1학년 장연우 방윤후 이시헌 함윤호 조용준 이건오 이윤우 명로찬 김유현
(전임 학생회장) 3학년 위정찬 (이한수 장학생) 학생회장 2학년 이성언, 학생부회장 1학년 정나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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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소식
24회 동창회 이사회
24회 동창회 정기이사회가 지난 8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양재 갈비사랑에서 15명 이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동문 친목 증진과 한 해를 뜻깊게 마무리 하기 위한 하반기 주요 행사로 ‘24룡 가을소풍’ 행사를 10월 21일(수)에, ‘정기총회’를 11월 24일 오후 6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진1
회장 추윤호 010-5225-3520
총무이사 김동헌 010-6355-6070
27회 동창회 남산 소풍
올해 졸업 50주년을 맞은 27회 동창회에서 지난 9월 5일 토요일 1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행사로 남산 소풍을 진행하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동대입구역을 출발 남산을 거쳐 모교에 도착한 동문은 모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정감어린 식당에서 오찬을 하였는데 사장님이 옛 인연으로 소갈비로 대접하여 모두 큰 박수로 고마움을 표했다.
회장 이광진 010-8721-0262
총무이사 이정로 010-4788-9295
쌍용회 9월 정기모임
용산구·마포구 지역 동문 친목 모임인 쌍용회 9월 정기모임이 지난 9월 15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 김가이가 식당에서 8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즐거운 시간을 만들었다. 이날 김상훈 회장은 인사를 통해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동문 모두 좋은 결실 맺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인사하고 함께 힘차게 건배를 외쳤다.
회장 김상훈(31회) 010-8846-7018
총무 임종택(38회) 010-5395-0849
용한회 9월 정기모임
강동·송파·하남시 지역 동문모임인 용한회 9월 정기모임이 지난 9월 8일 화요일 오후 6시 30분 강동구 성내동 보성갈비에서 18명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날 모임에서 고동근 회장은 인사를 통해 “곧 추석이 다가옵니다. 모두 즐거운 일 많이 만드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인사하였고 참석회원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사진4
회장 고동근(14회) 010-8772-7269
총무 한재호(41회) 010-3356-6770
역우회 충남 부여 여행
역도부 출신 동문 모임 역우회에서 지난 9월 17일 9명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충남 부여 백제고도 사비성 여행을 통해 백제 문화의 일미라는 금동향로의 아름다움과 전시 유물 감상을 통해 백제 문화와 역사를 느끼고 마지막 일정으로 백마강 유람선에 탑승하여 역우회원 간 우정을 다지는 시간을 갖고 각자 일상을 열심히 살고 송년회에서 다시 만날 것을 다짐했다.
부회장 서증석(23회) 010-3334-8497
총무 박진호(37회) 010-9633-1212
토론토 동문회 가을 야유회
캐나다 토론토 지역 동문회 2026년 가을 야유회 행사가 지난 9월 5일 토요일 노스욕 인근 G.Ross Lord Park에서 37명 동문 및 가족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참석 동문 및 가족들은 오랜만의 반가운 만남에 기뻐하고, 각자 동문 소개와 선후배 건강을 기원하며 집행부에서 마련한 풍성한 바비큐 파티로 즐거운 하루를 만들었다. 사진6
회장 임영진(23회) 416-476-5077
총무 오제성(34회) 647-575-2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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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뒤집는 트럼프의 협상 전략’ 펴내
김 경(33회) 동문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에서 수십 년간 활동하며 다양한 국가와 기업을 상대로 고난도 협상을 수행해 온 비즈니스 협상 전문가 김 경(33회·이노바 인터내셔널 아시아지역 사장) 동문이 도널드 트럼프의 협상 방식을 분석하고 이를 실전 협상 전략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책 <판을 뒤집는 트럼프의 협상 전략>을 펴냈다.
김 동문의 책은 트럼프를 찬양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승리의 알고리즘을 철저히 해부하여 우리의 무기로 만들기 위한 실전 지침서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약점을 화려한 브랜딩으로 감추고, 상대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데이터의 허점을 송곳처럼 찌른다. 상대가 데드라인에 쫓겨 피를 말릴 때, 자신은 마러라고에서 여유롭게 골프를 치며 상대를 지치게 만든다. 예측 불가능성을 무기로 삼아 상대의 시나리오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는 과감함으로 주도권을 쥐어 짜낸다.
트럼프의 승리 알고리즘을 해부해 단순히 미국식 성공학을 읊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체면과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의 비즈니스 판에서 트럼프식의 거친 전략이 어떤 충격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정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한국형 전술로 최적화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분석해 트럼프의 협상 전술을 10가지 결정적 원칙으로 압축했다. 또한 트럼프의 협상 전술인 프레임의 지배와 심리적 교란, 압박의 기술, 주도권 유지, 거래의 완성 기술을 사례와 더불어 분석했다. 김 동문은 책을 통해 질문한다. “협상은 기술이 아니라 구조다. 상대가 만든 게임에서 플레이어로 뛸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설계한 판으로 상대를 초대할 것인가?”라고.
개교 80주년 기념 총동창회 바둑대회
•일시: 10월 9일(금요일) 09:00~17:00
•장소: 모교 강당
•주최: 총동창회 •주관: 총동창회 기우회
•참가 방식: A조: 각 회별 3인 1팀(팀 수 제한 없음)
B조: 각 회별 3인 1팀(팀 수 제한 없음)
C조; 각 회별 3인 1팀(팀 수 제한 없음)-아마 6급 이하
- 개인 참가자는 대회 당일 혼성팀 편성 후 대회 참가 가능
- 친선 대국 가능(친선 대국석 다수)/지도 및 다면 대국
•참가비 및 참관비: 15,000원/인
대회 참가자 및 참관자 모두에게 기념품이 제공됩니다.
•참가 신청: 회장 허경일(27회·010-9907-9889)
총무 김원석(32회·010-6234-4470)
개교 80주년 기념 총동창회 테니스대회
•일시: 10월 9일(금요일) 09:00~17:00
•장소: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테니스장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155(석수동)
•주최: 총동창회
•주관: 31회 테룡회
•참가 방식: 2인 1조 복식 경기
•참가 신청: 이현순(31회·010-6284-1642)
김성일(31회·010-5141-4632)
*대회 참가자 및 참관자 모두에게 기념품이 제공됩니다
총동창회 사무총장 모집
총동창회 사무총장으로 근무할 동문을 찾습니다. 창의적인 생각과 우수한 역량을 갖춘 동문의 많은 지원을 기대합니다.
자격 요건: 용산고등학교 졸업생
채용 절차: 1차 서류 심사, 2차 면접 후 최종 합격
제출 서류: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자기소개서에 사무총장 근무 시 각오 포함
접수 기간: 2026.10.1.(목)~2026.10.15.(목) 17:00까지
서류전형 발표: 서류 접수 후 1주 내외
서류 접수처: 총동창회 사무국 방문 접수에 한함
서울 용산구 두텁바위로 60 용산고 비룡관 1층
기타사항
1. 서류 심사 발표 및 면접 일자 통보는 합격자에 한해 개별 안내합니다.
2. 장애인 및 국가보훈대상자는 관련 법규에 의거하여 우대합니다.
3. 제출 서류의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합격이 취소됩니다.
용산고등학교동창회
용산고등학교 동문 축구단(YOSC) 신입 회원 모집
파란 운동장 위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땀 흘릴 동문 여러분을 찾습니다!
실력에 상관없이 축구를 사랑하고 동문 간 우정을 나누고 싶은 동문이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부담 없이 오셔서 즐겁게 공 차는 즐거움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모집 대상: 용산고등학교 졸업생(나이 무관, 초보자 환영)
<동문 축구단 모임 내역>
일시: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 4시
장소: 모교 운동장
회비: 월 2만 원(음료 제공 및 구장 대여료 사용)
회장 이강춘(52회·010-8871-5260) 총무 김성주(52회·010-8806-4232)
선후배가 함께 만드는 즐거운 주말 매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2026년 2학기 장학증서 수여식
2026년 2학기 장학증서 수여식
총동창회 2026년 2학기 장학증서 수여식이 지난 9월 8일 화요일 오후 4시 10분 모교 강당에서 개최되어 선발된 장학생 60명에게 장학증서가 전달되었다.
이날 장학증서 수여식에는 신재호(29회) 총동창회장, 김수득(26회) 동문장학재단 이사장, 김상희(16회) 학재장학회 회장, 연성호(38회) 중용회 사무총장 외 동문, 정감어린 정영분 대표 및 김진효 학교장과 선생님, 학부모들이 참가하여 장학생들을 축하하였다.
장학증서 수여 후 신재호 동창회장 축사와 김진효 학교장 격려사에 이어 장학생을 대표하여 위정찬(3학년·학생회장) 군이 ‘장학생의 다짐’을 하고 모두 함께 교가 제창으로 장학증서 수여식 행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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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리에 개최된 개교 80주년 기념 음악회
개교 80주년을 자축하는 ‘서울교육가족 및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용산고등학교 개교 80주년 기념음악회’가 지난 9월 9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시교육청 대강당에서 700여 명의 동문·재학생·교사·학부모·서울시 교육가족 및 지역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음악회는 김진효 학교장 인사, 정근식 교육감 축사, 신재호 동창회장 인사에 이어 Y-Glee합창단(26회) 공연을 시작으로 가요와 국악, 백합합창단(수도여고 동문)의 우정 출연, 성악, 기악 연주 무대를 거쳐 용산동문합창단 공연이 이어졌으며 끝으로 교가 제창까지 3시간 여를 품격 있는 음악과 함께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물했다. 이날 진행은 김재원(37회) 아나운서가 맡아 수고해 주었다.
이번 무대는 서울시교육청 용산 신청사 이전을 환영하고, 지난 80년을 이어온 용산 동문 후배 사랑과 함께 그 후배들이 다시 다음 세대를 응원하는 전통을 이어가 새로운 100년을 향한 동행과 도약을 다짐하기 위한 뜻깊은 음악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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