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의 변천사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한지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둘어온 종이와 그 제조법은 상당기간 동안 중국의 그것을 모방하였으나 이때부터는 우리의 한지를 이룬다.
삼국시대의 고분 구조상의 결격으로 인해 식물질의 보존이 나빴기 때문에 제지기술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자료나 고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에 제지술과 종이가 2세기경부터 7세기 사이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할 때 북방과 남방은 서로 다른 경로에 의하여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함경도 지방 이북은 추워서 닥을 재배하기 마땅치 않지만 마포(麻布)는 비교적 용이하게 얻을 수 있고, 남쪽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닥 재배 적지로서 원료 조달에 문제가 없으며 품질 또한 좋기 때문에 고구려는 낙랑으로부터 주로 마(麻)를 사용하는 방법을, 백제는 닥(楮)을 사용하는 제법을 중국의 남부지방으로부터 전해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도 교주(交州) 등 남부 지방에서는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 모두 제지의 중심지는 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수요 계층도 수도와 인근의 귀족층 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종이와 그 제지법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문헌에서 신라 수도 경주를 의미하는 계림의 종이의 우수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제지법을 전한 사람은 고구려의 승 담징으로 때는 서기 610년 신라 진평왕 32년, 고구려 영양왕 21년, 일본 추고천황 18년 이다. 이것으로 7세기 경을 우리나라에서 제지술이 일반화된 시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제 (기원전 18년 ~서기 660년)
우리 한반도를 통하여 대륙 문물이 일본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는데 삼국 중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나라가 백제였다. 백제를 통하여 대륙 또는 우리나라 문물이 일본에 들어간 것을 보면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 10월조에 백제 성왕은 석가불 금동상 일구, 번개, 경론 등 불교를 전하였고, 백제의 왕인이 서기 185년에 일본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전했다. 이 책이 제지품이었다면 이 때가 서기 285년으로 채륜이 제지법을 발명한 후 180년이 경과한 뒤의 일로서 백제 고이왕 52년, 신라 유례왕 2년, 일본 응신천황 16년에 해당되므로 이때는 이미 우리나라에 제지술이 도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백제 고이왕은 서기 234~285년간 재림하였는데 동왕 13년(서기 246년)에 위의 유주자사 모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상방태자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함으로 한의 군민을 접촉하여 그곳 문물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고, 제지가 서기 105년에 이루어진 이래 화제가 이를 권장하였으므로 한의 군현인 낙랑에서도 종이 사용이 일반화 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낙랑과 접촉하게 된 백제에 제지술의 전래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고이왕 때는 모든 관제가 이루어지고 관등에 따라 복색을 정하기도 한 것을 보면 문물제도가 정비된 시기로 중국의 문을 통행하는 허가증이 많이 유입되었다고 본다.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에 역사책인 서기를 편찬한 것으로도 백제의 제지술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기원전 37년 ~서기 668년)
고구려는 끊임없이 중국과 접촉하였다. 특히 채륜이 제지술을 발명한 서기 105년에서 92년 후인 고국천왕 19년(서기 197년)에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망명하여 올 때 그 가운데 종이를 갖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명도전이 중국의 망명자들의 영향이라고 볼 때 당시 종이로 된 책자가 들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고, 때를 따라 기록하는 사람이 있어서 100권의 유기라는 역사책을 썼는데 영양왕 11년(AD 600)에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오권을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국초에 문자를 처음 사용할 때부터 어떤 사람이 기사 백권을 만들어 유기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국초, 즉 건국시부터 문자를 사용하였고,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기 백권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기가 종이인지 대나무쪽인 죽간인지 밝혀있지 않으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과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종이 책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종이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高句麗王貢上僧 曇微 法定 曇微和五經 目能作彩色及紙墨]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는 바와 같이 불도에 통하고 공예에 뛰어난 고구려 담징이 영양왕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제지법과 제묵법 및 채화법이며 맷돌의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바로 그 때가 일본 추고천황 18년이며 일기원 1270년이 되던 해로 단기 2943년으로 보면 서기 610년에 해당된다. 이처럼 고구려 승 담징이 알본에까지 전파하여 준 사기를 고려할 때 담징의 도일 전에 고대 우리나라에 제지 공업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앞서 언급한 고구려 종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7세기 이전의 종이인 [법화경]은 고해나 정선 과정이 상당히 잘 되어 있고 표백 상태도 매우 좋다. 따라서 대단히 발전된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정성들여 만든 종이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종이는 긴 섬유를 두들여 충분히 고해하여 균일하게 만든 한지이며 중국의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는 아니다. 일본에 종이를 전했다고 하는 7세기 초 전후까지는 중국의 제조법인 맷돌로 갈아서 만드는 법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후의 우리나라 종이는 그와 달리 긴 섬유룰 두들여(叩解)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온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제지법이다. 즉 7세기 이후부터 우리나라 종이의 주된 특성인 두껍고 질긴 모습이 드러나며 이것은 오늘날 한지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신라 (기원전 57년~ 서기 668년)
삼국중 가장 문화적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서기 545년 진흥왕 6년에 국사를 편찬하였다. 삼국유사 제 4권 원효불패조에는 종이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진덕여왕(서기 647년~)년대에는 종이연 이야기가 있다.
최근 일본에서 정창원 보물 중 어떤 상자를 뜯어 수선하는데 그 상자안을 발랐던 종이 가운데 신라의 고문서인 종이를 발견했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라지의 보존 예이겠는데 일본 사람이 이를 원상대로 속을 발라 겉을 입혀 버렸다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신라의 경우는 이들 두 나라에서 각각 전수받은 기법을 통일 이후 백추지로 대표되는 계림지로 발전시켜 오늘날의 한지를 이루었다.
한지의 변천사 -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서기 668년~935년)
제지 중심지는 경주 지방으로서 여기서 생산하는 종이가 관용지의 수요를 충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추지가 국내외에 유명지종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국보 19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의 용지는 서기 751년 이전의 닥종이임이 고증되어 있으며 지질과 인쇄술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755년 사성(寫成)된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은 8세기 중반의 것으로 고해나 정선이 상당히 잘 되어 있고 표백 상태도 매우 좋아 대단히 발전된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정성들여 만든 종이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종이는 긴 섬유를 두들이는 고해를 하여 만든 한지이며 중국의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는 아니다. 경주의 고분에서 출토된 관의 옷칠 내장용 종이의 정교함으로도 당시의 종이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918년~1392년)
고려시대는 우리종이의 발전기였다.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원료, 생산자, 생산지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불교가 성행한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으로 인하여 사경이 많았고 여러 겹을 붙인 종이가 많았다. 따라서 두껍고 질기며 광택있는 종이를 선호하였고 이에 적합한 닥나무를 수급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지리적 조건이 좋은 지방에 지소를 설치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갖가지 원료를 사용한 특색있는 종이가 만들어졌다. 종이에 다듬이질을 했고 노란색이나 감색으로 염색을 한 가공지가 많았다. 고려지는 견인하고 광택이 나고 희었다.
정책
현종(1020~1038)이래 [팔만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의 간행이 몇 번 반복되었고, 정종(1035~1046)년간에 [양한서]와 [당서], 문종(1047~1182)년간에 각종 신간 서적의 출판과 각 지방 분산, 인종(1123~1146) 23년(1145)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 50권의 간행이 있었다. 닥의 재식을 장려한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수양도감 관할하에 원료 증산책을 관할케 하여 이를 권장하다가 명종 18년에 이르러는 이를 법제화하였고 민간의 제지업을 장려하였다. 정부기관으로는 지소를 두어 생산된 종이를 바치게 하였으며 여기서 일하는 장인들에 대하여는 관에 속해 있는 사람이나 민간인이나를 막론하고 별도의 호적에 편입하여 상당한 신분상 대우를 하였다. 돗자리와 유둔지을 맡아보는 관공서로 장흥고가 있었다.
11~12세기에는 제지와 출판이 왕성했다. 말기에 접어들어 국운의 쇠퇴로 종이 제조도 저조해 졌다. 지장들의 사회적 지위가 다시 후퇴하고 닥나무의 재배와 저피의 생산도 피폐해 졌다. 조선조 초기 태종 10년에 올려진 상소문의 “대저 민가에서 닥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2%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고려 말기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제지법
원료는 닥뿐만 아니라 등의 장섬유도 사용했다. 닥피를 삶는 과정에는 석회를 썼고, 씻는 과정에는 또다른 재료를 썼다. 도구는 증해솥, 표백조, 발을 사용했다. 발은 대발의 경우 한치 당 가치수가 30개, 엮은 실과 실의 간격은 한치 당 13가치, 엮은 실 간격도 1치2푼, 6치5푼, 8치 등으로 되어 있어 매우 다양했다.
다듬이질을 하는 방법을 도침법 또는 추지법이라고 하였다. 적당한 양의 수분을 고르게 먹인 다음 큰 망치로 두들겨 나가는데, 그 적당한 추공량을 가늠하는 일이야말로 장인들의 솜씨가 발휘되는 부분이었다.
추지법은 한지가 긴 섬유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쓰기 때문에 지나치게 흡습성이 클 수 있고, 보푸라기가 이는 단점을 보완하는 것으로 면을 고르게하여 섬유간의 구멍을 메우고 광택이 있는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중국에서는 신라, 고려의 백추지, 경면지, 혹은 견지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것은 표백을 잘 하고 정성들여 도침한 종이의 미칭으로 7세기 중엽 이후 오늘날까지 한지의 일관된 특징이다.
[산림경제]에 기재되어 있는 추지법을 보면 “매양 마른 종이 10장에 물을 뿌려서 적신 습지 1장 위에 합쳐 놓은 다음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몇 겹으로 반복하여 쌓아 올린다. 100장이 되면 그것을 한 타로 하여 상위에 놓고 다시 그 위에 평평한 널판지를 올려놓은 다음 그 위에 큰 돌맹이를 지질러 놓아 하루 저녁 지나면 아래 위로 고르게 습기가 스며든다. 이때 큰 망치로 고르게 200~300번 두드리면 밑의 종이가 밀착하여 100장 중 50장 정도는 말라가고 50장 정도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다. 다시 마른 것과 습기가 있는 것을 서로 섞어서 겹쳐 쌓아 놓고 다시 200~300번 두드린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잠깐 쉬어 한 반나절 그늘에 말렸다가 다시 겹쳐 놓고 3~4번 두드리면 축축한 것은 한 장도 없게 된다. 이렇게 한 후에 종이의 끈기를 보아서 다시 다듬이돌에 놓고 3~5번 고르게 두드리면 빛나고 반질반질한 것이 기름종이와 거의 같아진다. 이 방법은 오로지 종이를 두드리고 서로 바꾸어 가면서 섞어놓는 공들임에 달려 있으며, 모름지기 손으로 익숙해지는 방법뿐이다." 이렇게 많은 일손을 들여 두들기는 것은 "종이에 광택이 나고 치밀해지기도 하지만 종이에 잔털이 일지 않아 글씨가 깨끗하게 잘 써지기 때문"이라 한다
종류
깨끗하고 단단하여 질긴 상화지, 얄팍하고 깨끗하고 매끄러운 것으로 부채등을 만들때 사용한 선자지, 두껍고 우피처럼 질긴 계문표지, 백색유연 하여 미인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백면지가 대표적인 종류이다. 경주, 예천, 풍기, 청도 등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생산되었다.
노화지는 경기도에서, 표전지, 봉본지, 부본지, 서결지, 표지, 수련지, 백봉지, 유망지, 세화지, 안지, 저주지, 저상지, 계목지, 초주지, 죽청지, 상류지, 시전지는 공주에서 생산되었다.
고정지, 황마지는 사찰에서 만들었다. 석추지, 견지, 아청지는 중국 역대 제왕들의 애호품으로 조선시대까지 생산되었다. 견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것인데 부역 대신에 바치는 것으로 이렇게 부른 것은 이 종이가 질기고 두꺼우며 광택이 나고 지면이 매끄럽기가 명주와 같기 때문이다. 백추지는 조직이 치밀하고 질기며, 두툼하면서도 면이 반질반질하고 광택이 나는 종이로 종이를 떠서 말린 다음 다듬이질을 하였다.
이밖에 상백지, 사혼지, 삼첩지, 견양지, 청자지, 금분지, 청지 등이 있었다.
쓰임
불서, 의서, 사서 등의 비롯한 각종 서적과 선물, 지폐에 쓰였다. 종이를 재생하여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종이가 귀하므로 각 도의 안렴사와 별감에 의해 공납을 빙자하여 민간에서 종이를 거두어 권문세가에 뇌물로 쓰이기도 하였다. 유둔지는 군인들이 싸움터에서 천막치는 재료가 되었다. 황지는 불경 간행에, 석추지, 견지, 아청지는 조공물로 쓰였다. 백추지, 경면지, 혹은 견지라 불리는 한지는 중국사람의 애장품 이었다. 송의 미불이나 명의 동기창(董其昌), 금의 장종(章宗)과 후기 청의 강희제(康熙帝) 등에 의해 서화용지로 즐겨 사용되었다. 그 외에 부채, 우산, 혹은 책표지 등 질긴 것이 요구되는 용도에 많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중국과의 교역에 필수품으로 사신들의 개인적인 예물로도 쓰였다.
유물
고문서, 서적, 회화 같은 것이 있으나 중기 이후의 것과 말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가장 오랜 것은 내양 동대사 도서관소장의 대안십년 수창원년 동이연판의 [화엄경 연밀초정]과 남선사 소장의 [고려장경]이 그 일부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철]도 비록 그 실물이 프랑스에 가 있기는 하나 이 시대의 문화 유산이다. 송광사 소장의 노비문서(지정 18년, 1358) 1통과 서장자 문서 등이 남아 있다.
평가
기록을 보면 이수광의 [지봉유설] 권 19 복용부기용에 “온주(溫州)의 견지는 희며 단단하며 매끄러워서 고려지와 같다."라 하였다. 이것은 고려지의 질이 우수하여 중국에서 으뜸가는 좋은 종이를 고려지에 비유한 것이다. 고려판 [사분율]이라는 불서는 '한 책이 15~16 가지의 종이로 되어 있다'하여 지종의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그 종이를 시주한 이의 이름이 장장이 적혀 있는데, 그 종이의 질이 대단히 아름답다 한다. [성호사설]에는 [옛부터 전해오기를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는 잠견지와 서수필로 난정첩을 썼다."]고 한다.
[문방사고]에는 “진나라 왕희지의 서란정 서문에 누에고치로 만든 종이를 중국에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 종이이다"와 [高麗紙 以綿繭造成 紙白如綾 堅靭如帛 用以書寫 發墨可愛 此中國所無 亦奇品也]라 하여 "고려지는 누에고치로 만들어서 능같이 희고 백이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이 잘 받아들여서 사랑스럽다 하고 이것이 중국에는 없는 것이니 진품이다."는 기록이 있고, 송나라 조희곡이 지은 <동천청록(洞天淸錄)>에는 "고려지는 면견(綿繭)으로 만들었는데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는 명주와 같아서 먹을 잘 받으니 사랑할 만하여 이는 중국에 없는 것이니 역시 기품이다. 면견 또는 잠견(蠶繭)으로 난정첩을 썼다는 것도 이 고려지를 가리킨 듯하다."라 기록되어 있다. 면견이란 풀솜을 뽑는 허드레 고치로 중국인이 고려지가 광택이 나고 질겨서 누에고치로 만든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舊皆 朝鮮所出之紙 爲繭造至 乃知以杵爲之 但製造工耳 予嘗以水識之 而知其然]이라 하여 명 동월이 불로서 이것을 태워보고 그것이 식물섬유임을 발견한 뒤에야 비로소 견지임을 알고 풀렸다 한다.
서청의 [흑룡강외기] 권 6에 중국인들의 종이는 주로 대섬유지가 많아 강도에 아쉬움이 있어서 두껍고 튼튼한 우리 종이를 선호한 그들은 특히 창호지에 기름을 발라 썼는데 겨울에 끼었던 서리가 녹아 그 위에 물이 흘러도 끄떡없어서 좋다고 하였다. 송나라 손목이 지은 <계림지>에는“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 부른다"라 했다. 영정 때의 학자 한치윤의 저서인 해동역사에도 백추지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송나라 한자창의 시에 “왕경이 나에게 선물로 준 삼한지라는 종이는 비계를 끊어 놓은 듯이 반질반질한 빛이 책상에까지 비치고"라 했고, [청장관전서 상엽기]에 “금 나라 장종(章宗)이 고려 청자지에 글을 썼으며 홍무(洪武) 2년에 송영등이 [원사(元史)]를 편집하고 고려 취지를 택해서 표지를 했느바 두가지는 모두 지금의 아청지이다."라 했고, [패사(稗史)]에 말하기를 “온주(溫州)의 견지는 희며 단단하며 매끄러워서 고려지와 같다."했다. 또한 북송의 동유는 [부훤야록(負喧野錄)] 권하에서 “고려지는 촉의 냉금과 비슷하여 치밀하며 빛난다."라고 하였고, 정계는 [삼유헌잡식(三柳軒雜識)]에서 “온주의 촉지는 깨끗하고 희며 매끄럽기가 고려지와 흡사하다"라고 좋은 종이를 고려지에 빗대었다.
한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종이는 묵광을 잘 받고 필태가 좋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질겨서 반드시 찢어지지 않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서위가 말하기를 고려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직 철후한 것이 좀 좋다. 좋지 않다고 보는 것은 다듬이 질을 안하면 거칠어서 글을 쓰기가 어렵고 다듬이 질을 하면 지면이 너무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굳어서 먹을 받지 않는 까닭이며 고로 중국의 좋은 종이만 못하다."라고 결점이 지적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지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역대의 제왕들이 즐겨 고려지를 사용하였고 시인묵객들도 고려지를 애용하였다는 사실로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고려지가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1392년~1910년)
조선조 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완성기이다. 통제기관의 설치, 원료와 기술의 다양화, 용도의 대중화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문물제도 개혁과 문화적 관심으로 태종 때 국영 조지소를 설치하여 관영화하였고, 닥으로 만든 돈인 저화제도의 정착에 고심하는 등 제지공업의 중흥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세종때 조지소를 조지서로 개칭하여 역대 왕은 이 조지서를 통하여 당시 급격한 수요증대에 따른 원료의 조달, 종이의 규격화, 그리고 품질 개량을 연구·도모하였다.
수공업 중 제지생산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경·외장 중 지장수의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제지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지된 것으로 보이는 태지가 본격적으로 초조되었고, 미려한 종이를 만드는 노력이 관·민 모두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는 그 용도가 많아 우리나라의 전국에 걸쳐 생산되었다.
닥나무가 종이의 기본 원료였지만 원료의 다양화로 당시의 종이를 검사해 보면 실질적으로 닥만을 사용한 것은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식물은 모두 종이의 제조가 가능하므로 갖가지 원료가 사용되었고, 기타의 종이는 오히려 단순화된 경향도 있었다.
보편적인 서사재료는 물론 서적, 창호, 모자, 병풍, 우산, 장판, 혼서용, 장례용, 서화용, 저화, 갑의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종이가 응용되고 일상 용품화되어 사용자도 다층화되었다.
우리나라 전 시대를 통하여 종이는 가장 두께가 얇고 품질이 매우 좋았다. 하얗고 광택있고 질겨서 서적 등의 용도에 적당했다. 그러나 긴 섬유 때문에 보푸라기가 일어나거나, 도침을 했을 경우에는 너무 매끄러워 붓이 미끄러지는 폐단도 있었다.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종이를 하사받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현재의 종로 1가에 위치한 육의전의 하나인 동·서 지전이나 그밖에 여러 곳에 위치한 종이를 상위에 놓고 팔아 이름 붙인 지상전 또는 지필묵연을 함께 파는 필방에서 구입하였다.
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종이 품질은 고려조의 성가를 이어받아 세종시대까지는 손색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후까지도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세종조 이후의 종이 생산의 관영화와 적극적인 증산책은 초기에는 발전하는 듯 하였으나 폭발하는 수요, 원·명·청대로 이어지는 혹독한 조공지에 대한 압력, 여러차례 전란으로 점차 자발적인 창조성이 위축되고 획일화 경향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닥원료의 부족으로 짚·보리·갈대 등의 부원료 혼합으로 품질은 저하되었다. 제지술의 전통은 임진란을 기점으로 서서히 하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소의 연이은 환난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바닥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장에 대한 보호 육성없이 혹사시켜 훌륭한 제지술의 전통은 기술적 퇴보를 자초했다.
말기에 이르면 태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가공지는 거의 없이 중국과 일본의 종이가 수입되어 많이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정책
제지업을 중요시하여 닥나무 밭을 만들게 하고 닥나무 재배를 시켰다. 경제적인 종이의 사용과 양질의 종이 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에 “요동 사람 신득재가 화지(華紙)를 만들어 바치니 득재에게 쌀과 면포를 하사하고 지공(紙工)에게 전습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에서 양질의 종이를 제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세종 때는 지품의 개량을 위해 왜지법을 전습하고, 왜닥를 도입하였다. 세조년간에는 명의 사신으로부터 중국의 제지법을 배워 종이를 만들었고, 성종년간에는 지장을 북경에 파견하여 중국의 제지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세조 3년 및 4년에는 각 도에서 경지(經紙)를 모아 해인사장경을 인쇄하였다. 성종 6년 [성종실록]에 의하면 일찍이 지장 박비로 하여금 북경에 가서 중국의 제지법을 배워 오도록 했다. 중국 및 일본 제지술의 도입은 조선초기 책지의 품질 제고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은 모든 면에서 사회의 피폐를 가져왔다. 문화시설이 파괴되고 명으로부터 유입되던 각종 원료도 중단되자 국내 모든 수공업이 침체되기 시작했다. 지물 생산을 담당하던 조지소의 기능이 마비되니 지장도 흩어져 국가에서 요구하는 지물을 생산할 수 없었다. 강대국에 의한 공납지의 요구는 도가 지나쳐 한지 농가에 가혹한 짐이 되었다.
병자호란(1636 )으로 조공지 헌납에 대한 압력이 가증되었다. 사대 외교의 필수품 이었던 표전지와 자문지 외에 각종 조공지의 제조를 피폐된 농가와 조지서에서는 감당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찰에서 종이 생산을 주로 하여 숙종 26년에는 국가 수요량의 절반을 전국의 사찰이 담당하였다.
제지법
초기 종이는 다양한 직물을 사용하여 세종년간에 간행된 서책의 용지가 가장 많은 종류의 원료를 사용했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닥나무가 모자라 조지서에서는 댓잎, 볏짚, 소나무잎, 버들, 귀리짚, 뽕나무껍질, 소나무껍질, 이끼, 삼, 베, 어망, 부들 등과 같은 것을 섞어 잡초지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종이의 생산 지역과 원료 산지가 일치하여 현지에서 산출되는 구하기 쉬운 재료로 초지하였다. 관간본에는 비교적 고급원료를 사용하였으며 사간본은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원료를 사용하여 제조하였다. 18C 말의 실학자 이경규는 <지품병증설>에 활척수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닥풀이나 느릅나무 점액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지과정과 원료는 외국기술의 도입으로 변화되었다. 세종 년간에 도입한 일본의 제지법은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으나 왜저인 안피를 원료로 사용한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세조10년 명의 사신에게서 배운 중국의 제지법도 조선지의 원료사용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선조 년간에 청록시와 지석을 맷돌로 갈아서 만드는 중국의 화지(華紙)법으로 균일하고 얇은 종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의 제지법을 받아들였지만 당시의 제지기술은 모두 수록법이었고, 한국 재래의 제지법과의 차이는 원료이용·초지기술·가공처리 방식이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의 그 당시 제지법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흑피가 붙어 있는 것을 '저'라고 하고 흑피를 벗긴 백피를 '곡'이라고 칭한다. 산골짜기나 돌 주변의 마른 땅에 음 2월 씨를 뿌려 겨울에는 마를 덮어 따뜻하게 하고 심은지 3년이면 베어서 쓰는데 가을에 잎과 줄기 색이 누렇게 되면 베어서 삼을 찌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쪄서 조피를 벗긴다. 증해약품으로는 목재, 보릿재, 짚재, 그리고 석회의 일종인 조개껍질의 재를 쓰며, 초지법으로는 이와 같은 천연 알칼리로 삶은 백피를 흐르는 강물에 몇 이리고 담가 씻어내고 물을 삐게한 다음 방망이로 두드려서 고해하고 지통에 물을 붓고 잘 풀어서 지료를 만든다. 여기에 초지시의 여수 조졸제로서 느릅나무의 껍질이나 뿌리에서 나오는 점액질을 넣어 고르게 섞고 발로 떠낸다. 재어 놓은 습지 바탕 위를 널판지로 덮고 눌러 짜서 물기를 가급적 제거한 다음 바위나 널판지 또는 들판에 널거나 방바닥 위에 펴서 불을 때어 말린다."
이렇게 만든 종이에 염색을 한 가공지가 많았다. 종이의 염색은 여러 가지 식물염료를 사용하며 색에 따라 종이에 직접하는 방법과 종이를 뜨기 전의 반죽에 염료를 섞어 끓인 다음 종이를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임원 십육지>의 종이염색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홍색은 홍람(국화과의 풀)의 즙을 사용하나 종이를 뜨기 전 반죽 재료에 즙을 섞어 끓인 다음 발로 떠서 종이를 만든다. 심적색은 소방(다목의 목재속에 있는 붉은 살로 달여서 물감으로 씀)목의 즙을 종이에 직접 염색한다. 청색은 아처색의 전(청대라고도 하며 쪽으로 만든 물감)을 사용하며 선홍색과 같은 방법으로 종이를 뜨기전 반죽 재료에 물을 들인후 종이를 떠낸다. 종이에 직접 하려면 전수에 5∼6외 침염한 후 소목의 즙을 그 위에 칠한다.
녹색은 전으로 먼저 염색한 후 황백수를 그 위에 칠한다. 자색은 자초의 즙을 사용하거나 담전으로 염색한 후 그 위를 소목(약용으로 쓰이는 다목의 붉은 속살)의 물로 칠한다. 황색은 황백(운향과의 낙엽교목)·괴예·울금(생강과의 다년생 풀)의 물을 사용한다."
종류
조선지의 종류와 명칭은 대개 원료, 두께, 길이, 넓이, 색, 외양의 형태, 용도 등에 따라서 각기 호칭되고, 이것들 중에는 동질이명의 것도 많다. 조선지의 종류를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궐공조>에 나타난 것으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원료에 따라 보면 저주지, 고정지, 상지, 백태지, 송피지, 유엽지, 유목지, 율무지, 마골지, 백선지, 노화지 등이 있다. 저주지는 닥나무로, 고정지는 귀리집으로, 상지는 뽕나무로, 백태지는 닥나무에 이끼를 섞어, 송피지는 소나무 껍질로, 유엽지와 유목지는 버드나무잎으로, 의이지는 율무로, 마골지는 마의 목피로, 백면지는 목화를 섞어, 노화지는 갈대나무를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이다.
색채에 따라 보면 설화지, 백로지, 죽청지 등이 있다. 설화지는 백색의 닥종이로서 눈과 같이 희고, 죽청지는 대나무 속과 같이 희다고 한데서 온 말로 아주 얇으나 질기고 단단한 닥종이다. 두께, 광택, 질에 따라 보면 장지, 간지, 주지, 상지, 중지, 유둔지, 상품·중품도련지 등이 있다. 장지는 상용되는 후지로서, 지질이 두껍고 질기며 지면에 윤이 흐른다. 유둔지는 유지이다. 상품·중품·하품도련은 마른 종이에 젖은 종이를 끼워서 다듬이질 하면 유지와 같이 지면에 광택이 있고 매끄럽게 되어 모필이 잘 움직이게 되었다.
용도에 따라 보면 표전지, 자문지, 반봉지, 서계지, 축문지, 봉본지, 상표지, 갑의지, 안지, 세화지, 화약면지, 창호지, 편자지, 시지명지, 노공지, 장판지, 화본지, 계목지, 등도백지, 백지, 창지, 견양지, 후지, 장지, 온돌지, 공물지, 대산지 등이 있다. 자문지는 칠을 입혀 학생들이 습자를 한 지석판이다. 봉본지는 임금님께 올리는 문서에 특별히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종이이고, 세화지는 신년을 축복하는 뜻으로 그림을 그리는 종이다. 창호지는 견양지나 별완지 혹은 삼첩지라고도 하며 주로 공문을 바르는데 사용되었다. 편자지는 얇팍하고 깨끗하고 매끄러운 것으로 부채나 연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 계목지는 임금님에게 올리는 화목을 쓰는 용지이다. 백지는 서적·한약포장·창·도배지·장지문·장판 초배지에, 창지는 제책·창·도배지· 장지문· 표장지로, 견양지는 창과 도배지·서적·포장· 인쇄에, 후지는 장판의 유지나 창문에, 장지는 제책용·창·장판에, 온돌지는 온돌장판용으로, 공물지는 창포·장족·보·서책용으로, 대산지는 도배·장지문·책자에 쓰였다.
생산지에 따라 보면 <신증 동국여지승람>(1469~1545)에 주요 종이 생산지로 경상도 영천군, 밀양군, 청도군 그리고 전라도 전주부가 나와 있다. 공물지는 경상도와 전라도 외에도 충청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에 널리 부과되었다. 경상도는 밭이 많으므로 보릿짚으로 만든 모절지를 전라도는 논이 많으므로 볏집으로 만든 고정지를, 충청도는 예로부터 한산모시의 원료인 마가 많았으므로 마골지 등의 특수지를 생산하였다. <용재총화> 제10권에 따르면 경상도에서는 표지, 도련지, 안지, 백주지, 상주지, 장지등을 만들어 공납하였고, 전라도에서는 표전지, 자문지, 부본단자지, 주본지, 피봉지, 서계지, 축문지, 표지, 도련지, 중폭지, 상표지, 갑의지, 안지, 세화지, 백주지, 화약지, 상주지, 장지, 유둔지 등을 공물로 바쳤다. <세종대왕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전라도의 전주와 남원은 종이의 품질이 가장 좋아 조공지 부과의 제일 대상지였다. 갑의지, 도련지, 백주지, 부본단자지, 부본지, 상주지, 상표지, 세화지, 유둔지, 자문지, 부분지, 중폭지, 표전지, 표지, 화약지등을 제조하여 공납하였다. 충청도에서는 각색종이와 일반종이를, 황해도에서는 유둔지를 공납하였고, 강원도에는 휴지를 제조하였다.
평가
<명종실록> 권2 십구의 명종 18년에 “명나라 사대부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대유둔·자문지·벼루 등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상 문방에 소용되는 것이고 금은 주옥 보화에 비할 바가 아니니… 사은사에게 부탁하여 보내소서."라 기록되어 있다. <열하일기>와 <동란섭필>에 “서문장은 조선 종이로서 돈같이 두꺼운 것을 심히 사랑했고 종백경은 일찍이 조선 종이에 유신허의 시 14수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고반여사>에는 조선지를 가리켜 "색이 희기가 태와 같고 중국에서 진기한 것"이라고 그 품질을 칭찬하고 있다. 이희경의 <설수외사>에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종이는 성질이 본시 단단하고 질겨서 창문을 바르면 능히 오래가며, 돈과 같은 두꺼운 종이는 기름칠을 하여 방가운데에 깔고 앉으면, 물을 엎질러도 물이 묻지 않는다. 이렇기에 부귀한 집에서는 이것을 사용하여 방석보다 많이 쓴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나라 종이는 천하에서 최고'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수광(1563∼1628)은 우리나라의 경면지와 죽엽지를 중국사람들이 무척 귀하게 여긴다고 하며 그가 경인년(1590)에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의 경험을 <지봉유설>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예부시랑 한세능이 죽엽지 한 장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사신이 되어 귀국에 갔을 때 얻은 것이요 만일 이와 같은 종이를 갖고 왔다면 내가 얻기를 원하오." 하였다. 그 종이는 품질이 정교하고 조금 푸른 빛이 돌아서 죽정지와 같으면서도 좀 두껍다. 나는 아직 보지 못하던 종이였다." 이 기록으로서는 당시에 제조한 종이가 품질이 매우 다양하여 이수광이 미처 그 종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 사신을 위해 특별히 제조한 종이어서 볼 기회가 없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많은 종류의 종이를 제조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실학자들이 지적한 한지의 단점을 보면,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에서 관청의 일방적인 수탈, 권문세가 양반의 사적인 부역 강요에 지장들은 자기의 기술이 남에게 알려질까 염려하여 고의로 나쁜 물건을 만들기까지 한다며 탄식하고 있다.
이희경의 <설수외사>에는 “대개 우리나라 종이는 처음에 닥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긴 다음 찔 때 푹 삶질 않아 티나 옹이가 잘 풀어지지 않고, 물에 풀 때도 모두 반쯤 탄 솜과 같다. 이렇게 성질이 단단하고 질겨서, 두드리지 않으면 전혀 먹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두드리면 미끄럽고 반질반질하여 비로소 글씨를 쓸 수는 있지만 먹이 종이에 잘 응결되지 않아 농담의 마땅함을 잃는다." 하였다. 이러한 예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도 “종이는 먹빛을 잘 받고 붓을 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견근 하여 찢기지 않는 것만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고 나온다. 당시의 지질의 저하를 비판하면서 “다듬이질이 지나치면 지면이 너무 굳어지고 미끄러워 붓이 머물지 않고 먹의 흡수도 나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제가(1750~1805)가 중국을 다녀와 저술한 <북학의>에는 “종이는 먹을 잘 받아야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리기에 적당하고 좋은 것이다. 찢어지지 않는 것만으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우리나라 종이가 천하에서 제일이다'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은 도대체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서대장이 말하기를‘고려종이는 그림그리기에 적당치 않다. 돈같이 두꺼운 것은 그래도 나은데 겨우 작은 해자(楷字)를 쓸 만할 뿐이다.'라 했다” 여기서“지전과 같이 두꺼운 종이"란 자문지를 말하는 것인데 외교문서에 쓰이는 용지였다. 종이의 규격화 문제에 대해서도 안타까이 비판한다. "우리나라에는 종이뜨는 발에 일정한 칫수가 없다. 따라서 서책용 종이를 재단할 때 반으로 자르면 너무 커서 나머지는 모두 버려야 하고, 3등분하면 너무 짧아서 글자 여백이 남지 않는 폐단이 있다. 또 8도 종이의 크고 짧음이 모두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허비하는 종이가 얼마인지 모른다. 종이는 반드시 서책에만 소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표준으로 하고 그 길이를 맞추어 만들어야 할 것이다. … 중국종이는 크기가 같은데 이러한 점을 잘 살펴서 한 것이다. 다만 종이뿐이 아니고 다른 물건도 그러하다.”고 했다. 정약용(1762~1836)이 말하기를“우리나라의 종이는 스스로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나, 기실은 잘 찢어지지 않는 것일 뿐 서적용으로는 인쇄가 잘 안 되어 책으로 만들 수 없으니 마땅히 이용감이 그 방법을 북방 중국에서 배워 본서에 퍼뜨리고 본서에서 각지로 보급시킴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유원(1814~1888)은 <임하필기>에서“우리나라의 닥이 종이 만드는 데는 좋으나 무겁고 또 털이 일어나 왜닥보다 못하다."면서 원료의 질을 문제삼고 있는데 이는 삼지닥 같은 것을 보고 하는 말인지 지질 저하에서 오는 문제를 원료문제로 오해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서유구의 <임원십륙지>에서는 ‘조선지는 오직 투박하고 질긴 것이 장점이지만 섬세하지는 못해서 서화 표구용으로는 부적합하다’는 논평이 중국에도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수차례의 전란과 환란으로 수공업이 피폐되어 새로운 청대 문물을 신봉하는 실학자들의 시각에 당시의 한지의 지질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한지의 지질이 많이 나빴다.
근ㆍ현대 (1910년~ )
정책
고종 19년인 1882년에 종이를 제조하던 관서인 조지소가 관리의 개정으로 없어지고 조지사무가 공조(工曹)로 옮겨졌다. 기술 개량과 생산 장려책으로 원가 절감과 증산을 목표하여 원료 가격 안정을 위한 닥 재배의 장려, 협동조합의 조직 등 생산 조직의 정비, 품질과 품종의 개량연구 등 시책을 폈다.
양지는 1884년, 이씨조선 고종 21년경 유입되었다. 한말의 김옥균이 수신사의 일원으로 도일하였다가 일본인 임덕좌문에게서 양지 제조시설을 매수하여 그 일부가 한성 양화율에 도착되었다. 1912년에 개소된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는 1915년에 공업전습소를 두어 화학공업부 안에 제지부서를 두어 원료와 제품을 분석·감정하고, 실지 기술지도를 하는 한편 기술원의 강습, 제지 기능공의 단기 강습 등을 하였으며, 우수한 한지 기능공도 보유하였다. 한지 개량을 위한 일반의 기술지도가 주업무였다. 특기할 사항은 중국에서 씨앗을 들여다가 황촉규를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초지용 점제를 통일시킨 일, 대발의 보급과 그 규격의 통일, 제조기술의 표준화 등이다.
한편 1914년 이후 매년 지방비 예산을 책정하여 철판 건조기, 원료 증해용 솥 등 개량기구 구입을 보조 장려하였다.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고가지인 일본의 화지 생산도 일부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시책으로 인하여 1915∼21년 간 저피 생산과 한지 덩이, 생산 가옥수, 닥 식재가 늘어났다. 또한 원가 절감책의 하나로 한지 역사상 처음으로 목재 펄프의 혼용을 시도하였다.
제지법
제지법의 주된 변화는 원료 증해와 표백에 화공약품으로 소오다회·가성소오다·표백분의 사용과 고해 방망이 대신 비이터의 사용·건조용 철판의 채택 등이다. 이로써 생산성과 품질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주원료인 닥이외에 제지원료로는 꾸지나무, 뽕나무류와 산닥나무, 강화산닥나무, 화태산닥나무, 박쥐나무, 볏짚 등이 쓰였다. 점제로는 황촉규 뿌리보다도 느릅나무 점액이 대부분이었으며, 느릅나무는 그 인피부의 점액이나 또는 목질부를 대패질해서 물에 불려 점액을 내어 썼다.
제조공정은
「원료박피→흑피제거→정선→수침→증해→수세·정선→표백→고해→배합→휘저음→초지→압착→건조→완성」
으로 오늘날의 공정과 같다.
생산 체제는 협업체제로 변화되었다. 즉 원료의 조성까지를 공동작업장에서 한 다음 완성지료를 각자 농가에 가져다가 초지 이후 작업을 하는 방식이다. 한편 농가 부업이 아닌 전업형태의 소공장도 많이 나타났다. 이들이 한지 생산의 줄기를 이루었으며 검사제도도 확립되었다.
종류
1909년 지종은 약 40여종이었으며 고정지를 제외하고 모두 닥섬유만으로 된 종이들이었다. 백지란 질이 얇은 백지의 총칭으로서 창호지, 사고지, 유삼지, 태미분지, 산내지, 완산지, 가평지, 견양지 등이다. 산지는 전라, 경상, 경기 였다.
장지는 백지류로서 다소 두꺼운 종이이며 태장지, 영창지, 대장지, 농선지, 입모지, 서후지, 외장지, 혜중장지, 시전지 등이 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각지는 지질이 두껍고 강인한 종이의 총칭으로서 대개는 두장 이상을 겹뜨기한 종이이다. 소별지, 대각지, 자문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산지는 각 도에서 모두 나지만 서울 부근에서 가장 많이 만들었다.
환지는 환혼지의 약자로서 재생지를 말한다. 각종 폐한지를 모아 재생한 종이로 벽이나 온돌 등의 초배지로 썼다.
입모지는 갈대로 만든 삿갓인 우립을 만드는데 썼다. 희귀한 종이로는 황지가 있다. 함경도 지방에서 귀릿대를 원료로 만든 것이다. 누른색을 띠고 다소 면이 껄껄하며 뻣뻣한 기가 있는데 병충해를 입지 않는다. 방충지로 황벽나무로 물을 들인 노란 종이도 불경용지 등으로 많이 쓰였다. 색지로서는 옥색, 홍, 초록, 청, 감색지 등이 있고 아청지, 홍비지, 분당지 등이 있었다.
평가
20세기 서양식 종이공장 설립의 영향으로 수초지의 제조에 있어서도 여러 공정에 각종 기계와 화공약품이 천연원료와 수제공정을 대체하였다.
전통 한지는 원래 수록에 의하여 제조되었던 것으로 제지과정이 원시적이고 조악하여 생산량이 많지 못하고 고가인 단점이 있었다. 반면 기계에 의하여 제조되는 양지는 제조과정 하나하나에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가격이 저렴하였다. 이와 같이 양지는 값이 싸고 재료로서의 질도 좋은 반면에 한지는 고가이고 또한 국내에 닥의 절대량이 부족하여 그 질이 약해졌으므로 일반대중은 서화재료로서의 한지를 외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지는 대중적인 용도로부터 배제되었고, 일반 대중 사이에 양지의 보급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단축되고 간편하며 경비는 절약되었지만, 한지 본래의 특성은 많이 잃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지가 고려지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여전한 선호열로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엽까지도 매년 약 30만 근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한지는 주로 상류사회의 전유물로서 서민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한지가 비싼 점, 중국에서 만든 값싼 유사 모조품의 출현, 한지의 품질 규격의 불통일로 수출량은 답보상태였다. 1920년대 와서는 수출이 반감되었다.
일본에서는 한지가 닥 100%로 뜬 강인성과 내구성을 지녀 선호하였다. 다만 품질에 균일성이 없는 것이 수출 상품으로서 단점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그들의 생활양식과 더불어 그들 취향에 맞는 종이를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일본 회화양식에 맞는 여러가지 종이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종이도 그들의 취향에 맞는 종이로 만들어졌었다. 우리 문화의 말살 정책으로 우리 한지는 거의 사라져 창호지, 장판지, 장지, 태지등 몇 종류만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지의 재료부족과 대량생산으로 질의 저하를 가져왔다.
현대
해방후 50년은 한지공업의 붕괴과정이다.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6.25전쟁, 군사 혁명 이후의 선공업 후농촌 정책으로 한지 생산의 기반은 근본적으로 약화되었다. 지방에 있던 협동조합도 군사통치 시대의 통폐합정책으로 맥이 끊기고,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선공업 후농촌 정책으로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생산과 부업구조가 바뀌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농민들이 농한기에 부업으로 제조하는 종이가 되었다. 건축양식과 주거 환경의 변화는 한지의 남아있는 양대 지종인 창호지와 장판지의 수요를 격감시켰다. 수요도 한정적이어서 생산되는 종이의 종류도 매우 단순하고 품질도 일반적으로 좋지 못하다.
종이 뜨는 일 자체가 험하므로 인력의 확보와 지장의 훈련이 여의치 못하여 한지공업생산의 귀중한 인적자원인 노련한 기능공들은 제대로 된 후계자들을 양성하지 못한 채 거의 노쇠 사별하여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전통 수록 한지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하여 가내수공업형태인데 공해배출업이며 인건비도 높아서 경영이 어려웠다. 한 예로 1957년 전북도에 315개 생산업체가 있었으며 종사자가 4,978명이었다. 이것이 1977년 한지공업 협동조합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한지 제조소나 농가는 약 160호로 줄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곳은 전국에 60여 곳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