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어처구니
나는 가끔 삶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하는 물음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물질우선주의가 만연해 있다. 사회적분위기가 이렇고 보니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최선인지도 모르니까. 눈은 저 높이 가 있고 현실은 바닥에 있다. 과연 내 힘으로 오뚝 설 기회가 있기나 한 건지 말이다.
그는 나의 고교동창이다. 그는 교과 성적도 중 상이었다. 대학진학에 열성도 있었다. 미술에 소질을 보였고 학원에서 소묘공부를 했다. 지금도 유명탤런트의 특징을 잡아 초상화를 썩 잘 그려낸다. 그가 고3이 되면서 공부에 열의가 식었다. 방황하고 있었다. 방방을 타고 게임방을 전전하였다. 보드를 타고 엑스포 광장을 누볐다.
우리의 청소년시절은 불나방이었다. 그는 엄마가 준 학원비를 떼어먹었다. 시키지도 않는 알바를 한다고 치킨 집으로, 피자집으로, 짜장면 집을 맴돌았다. 물론 돈도 필요했다. 그보다 오토바이에 정신을 몽땅 빼놓았다. 늦은 밤, 십여 명씩 모여 광란의 질주를 펼쳤다. 만년동에 있는 10차선도로는 당시 우리의 허상虛想을 드러내기 좋은 장소였다.
내가 다시 그를 만난 건 자전거 동호회에서다. 내 앞에 부른 듯 사이클을 타고 나타났다. 고가의 경주용 사이클이었다. 몇 달치 급료를 투자해야하는 명품이다. 그는 제대하고 나서 밑바닥을 기었다고 했다. 용돈벌이로 잡은 직장은 육가공업체였다. 돼지 해체작업과 씨름하기를 근 일 년을 보냈다 한다. 한식을 배우자고 대파를 다듬었다. 중화요리 집에서 양파를 까느라 눈물을 찔끔거렸다. 월수입 250이 되는데 5년이 걸렸다. 식당일은 장래가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명절을 지나도 연휴는 길게 남았다. 도안에 사는 누나 집에서 뒹굴었다. 매형은 소상공인으로 성공한 특별한 케이스였다. 누나 집에 기거하다가 보니, 잘 다듬어진 재목 같은 젊은 경영인, 매형이 부러웠다. 매형은 주중에도 골프채를 들고 나갔다. 어느 때는 누나도 동행을 했다. 이런저런 궁리로 기와집을 짓고 허물기를 수차례 하였다. 직장으로 돌아갈 날도 지나갔다.
그의 속내를 알아차린 아버지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엄중한 경고가 발등에 떨어졌다. ‘5년을 쌓아올린 경력을 포기할거냐’고 물었다. ‘매형과 일을 하자면 어떤 일도 감수해야한다. 처남이란 사실도 잊어야 한다. 너의 잘못으로 중도에 그만두면 우리 집과 매형은 물론, 네 누나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부디 신중에 신중을 다하라’고 거듭거듭 당부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굳게 약속을 하고 매형회사에 출근했다. 첫 월급 80만원부터 5년이 걸려서 이전 직장수준이 되었다. 어느 날 젊은이의 선망이던 K5를 끌고 나타났다. 승용차를 출퇴근용으로 지원받았다했다. 그의 경력정도면 차량지원이 된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매형 경영마인드가 좋아보였다. 그때쯤이라 기억한다. 매형의 ‘갑질’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휴일 전날
“이 대리? 내일 뭘 할 건가? 마땅히 맡길 사람이 없어. 유성에 새로 올라가는 뉴타운빌딩 있지? 거기 입점할 업체에서 납품을 의뢰해왔어. 시장조사를 해야 하는데. 어때 괜찮겠어?”
주중에 나는 내내 주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못 한다 말할 수는 없다. 입만 댓 발 내밀 뿐이었다. 곧 8월이 되었다. 그는 나를 비롯한 자전거동호회원들과 영월로 휴가일정을 잡았다.
“이 대리? 휴가를 좀 미루면 안 될까? 다들 휴가 중이라 일손이 없네. 일산에 납품을 해야 하는데 이대리가 수고를 해 주면 좋겠는데?”
“이 대리? 내일부터 휴가 다녀오지. 별로 바쁜 일도 없고 하니까 말이야”
그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와, 이건 계획도 없고… 내 생활은 안중에도 없어. 도대체 내 매형이 맞기나 한 거야’ 저녁을 먹다말고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부산으로 내처 달렸다.
그의 나이 서른넷에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녀는 이전에 있던 중화요리 집에서 알바 하던 중국국적의 조선족 아가씨다. 혹시나 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인연이 닿았다. 그녀를 만나 외로운 마음은 눈처럼 사랑의 늪에 녹아들었다. 어느 날이다.
“오빠,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하고 결혼안할 거면 이쯤에서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그녀가 이별을 통보해 왔다. 아버지나 누나보다 매형이 응원자로 적격일 듯했다. 그 편이 수월하게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어렵사리 시간을 낸 매형은 그녀와의 결혼을 한마디로 반대했다. 외국인이란 이유다. 복병이었다. 단단히 걸었던 희망이 일시에 허물어졌다. 매형에게 실망한 그는 독립을 선언했다. 자동차열쇠를 던지고 누나 집을 뛰쳐나왔다.
자전거를 팔아 월세 방을 구했다. 결코 편치 않은 동거를 시작했다. 궁리 끝에 그녀를 동행하고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흔쾌히 결혼을 응낙하였다. 복직도 되었다. 아버지의 지지로 결혼도 하였다. 나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신부는 이목구비가 출중하였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신혼재미는 꿀맛이라 했다. 선배동료처럼 월세보증금도 지원받았다. 어여쁜 아기도 태어났다. 날이 갈수록 경제적 압박이 심해졌다. 적잖은 급료였지만 카드빚이 눈덩이가 되었다. 넉 달 치 급료와 맞먹었다. 퇴근 후에는 알바를 찾아다녔다. 동일업종보다 임금이 낮다고 머리가 들쑤셨다. 주위에서 ‘매형이 대표니 급료도 많을 거라’부추겼다. 퇴근 후에 A/S를 다녔다.
휴일에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경비를 지급하지 않는다. 업무처리에 한계가 보인다며 지적 질을 했다. 시장조사는 견해가 엇갈렸다.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다. 아버지께 불만을 털어놨다.
“너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너나 너 누나는 너 매형을 보고 짠돌이라 하지만 나는 안다. 작은 돈에 인색해도 큰돈은 후하다. 내가 아는 네 매형은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너의 급료도 여타직종에 비해 결코 적다고 보지 않는다.”
아버지는 언제나 매형 편이다. 그는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수백 번도 더 다짐을 한다. 사표 던질 기회만 엿보았다. 대표실에서 호출이 왔다. 이제 기회가 생기나보다 싶었다.
“이 과장은 아무래도 이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
“예, 알겠습니다. 저도 사직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이 달 말까지 마무리 짓고 인수인계하도록 하지.”
며칠이 지났다. 선배동료가 아파트입주를 앞두고 있었다. 회의실로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엉기적거리며 회의실로 갔다. ‘새집을 마련하게 된 선배동료에게 주택구입자금으로 회사에서 1억을 지원하겠다.’한다. ‘단 급여는 동결하고 대출 원리금을 산정해 매월 급료와 같이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좌중에서 박수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에, 또 이과장이 임대차계약기한이 만료돼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세자금 1억을 지원하겠습니다. 이 건도 주택구입시에는 김 실장 건과 동일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그 친구와 마주 앉았다. 친구는 마음이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매형을 오해하고 있었어. 계획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고 생각했거든. 계획에 따라 일을 추진해야 하는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생각했어. 항상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것 같았어. 우유부단해 보였거든. 손에 쥐고 조몰락거리다 마는 것 같았어. 이번 일도 그렇잖아. 이미 계획이 다 나와 있었을 게 아니냐고”
나는 살면서 느꼈다. 정신적 풍요보다 물질적 욕구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누구라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만. 그의 말을 들으며 ‘참 행복한 친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매형은 자수성가를 했다. 쌓은 부를 직원과 나눌 줄 아는 아량 높은 사주社主다. 과연 이런 사주가 얼마나 있을까. 인생에서 정신적 멘토도 소중하다. 그러나 지금은 ‘어처구니’같은 후원이 참 그리운 세태다. 친구가 부러워지는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