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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밀레 박물관에 로프로 금강산 비로봉 암벽을 타는 민화가 있다. 이 민화는 18세기 말엽의 그림으로 감정되고 있다. 이것이 등산도라면 유럽의 몽블랑 초등정과 같은 시대가 되고, 분명히 우리나라 근대등반의 예명적 효시가 아닐까 싶다.(중략)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산 위에 먼저 올라간 사람들과 술병과 안주그릇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버섯을 따는 생업을 위한 등산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일행 중엔, 발아래 벼랑을 보는 모습이라든가, 바위 아래에도 흥겹게 유람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밧줄을 매듭해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비한 것이라든지, 나무뿌리를 지점으로 연결해서 연속등반(?)하는 모습과 여러 사람이 모여 마치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인상은 틀림없이 근대등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암벽등반의 모습이다. 더구나 장소가 이상적인 도원경으로 알려져 있는 금강산 비로봉에서 아무리한 들 석이버섯을 딸까? (중략)
한복입고 밧줄타는 금강산 비로봉 등반이 단순히 민화 아닌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우리의 암벽등반 기록도 확립되어 ‘산타는 근대적 등산’이 유럽이나 일본을 앞질러 일찍이 개화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근대 등산 뿌리의 재조명, 손경석(한국산서회 회장) / 산서 제2호(1987.12) / 월간 산지(1987.1.) |
이 그림의 원본은 전 에밀레박물관 소장의 민화(民畵) 금강산 십곡병풍도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계곡 열 곳을 그렸는데, 이 중 내금강의 구룡대, 진주담과 비로봉을 그린 그림의 부분도(部分圖)가 비로봉 등암도(登岩圖)이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전하나 소장자였던 조자룡 박물관장이 일본에서 발간한 ‘이조의 미=민예(李朝の美=民藝)’에 원본 그림이 남아 있다. 도록에는“록 클라이밍 및 술병은 정치적 항쟁의 세계로부터 격리되어진 서민 생활의 현세적인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1)
금강산 십곡병풍도(등암도의 원본)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민화이다. 민화는 한 민족이나 개인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생활 습속에 따라 제작한 대중적인 실용화로 조선 말기에 특히 유행하였는데 산수, 인물, 화조, 책거리, 문자도 등 다양한 화제가 있다. 민화의 특징은 사실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이며 비정상적인 그림으로, 민화 금강산도는 대개 다른 금강산도를 보거나 전해 듣고 그린
그림이다.2)
등암도의 차일봉(遮日峯)은 옆으로 누워있고 그 아래로 돌탑이 세워져 있어 이름처럼 차일을 친 듯 그려져 있다.3) 또한 십곡병풍도 중앙 그림의 상단에도 비로봉이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를 밧줄도 없이 오르고
있어 등암도보다 더욱 생생한 암벽 등반의 현장으로 보인다. 이는 그림에서 비로봉을 뾰족한 바위 봉우리로 표현하다 보니
등반로 사람들의 모습이 암벽등반을 하는 듯 그려진 것 뿐이다.
금강산 십곡병풍도의 다른 비로봉 부분 |
19세기 민화 금강산도 백운대 부분 |
이렇듯 금강산 십곡병풍도(등암도 원본 그림)는 실경 산수화가 아니고 민화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비사실적인 그림으로 등암도의 행위 또한 그림에 보이는대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기 비로봉의 등반 형태와 등암도에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살펴보자.
금강산의 봉우리나 전망처에는 밧줄 또는 쇠줄(鐵索, 철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비로봉을 오르는 길에도 쇠줄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5)금ᆞ은 서더리라는 너덜지대에는 디디기 편하게 계단을 이루었다. 비로봉은, 등암도 처럼 독립된 10여 미터 남짓의 짧은 암봉이 아닌 능선상의 봉우리로 산 정상부는 비로고대라 하여 너른 평원으로 되어 있다. 윤증(尹拯,1629.~1714.1)의 금강산 시 중에, 비로봉 돌비탈길을 오르는 광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칡덩굴 더위잡고 비로봉을 향했는데(攀蘿更指毗盧頂), 여기서는 남의 부축 받을 수가 없어서(此地豈容人扶側), 발을 자주 놀릴수록 몸도 높이 오르는데(擧足愈數身愈高), 돌비탈에 사람 오른 흔적들이 분명하네(石磴分明有舊跡)"-출처:명재유고(明齋遺稿), 한국고전종합D/B.
19세기 다른 민화 금강산도(위 우측 그림)의 백운대 부분에는, 등암도 처럼 다수의 사람이 설치물을 붙잡고 바위절벽을 오르고 있다.4) 그림에는 “鐵索(철삭, 쇠줄)”이라 적혀 있는데, 이 쇠줄은 두 줄로 꼬아 만들었으며 사다리 형태로 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길이는 두 길(丈)로, 약 3미터 정도이며 바위에 고정되어 아래로 드리운 것으로 보여진다. 이종욱(李宗郁, 1737年(英祖13)~1781年(正祖5)의 동유기(東遊記)에 보면 다음과 같이 백운대 등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6)
"백운대는 암자의 동쪽 5리쯤에 있는데 흰구름 사이로 아득하였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걷는데 돌길이 험하였다. 높은 고개 하나를 넘어 막다른 길에 들어 섯는데 20여길이나 되는 절벽(而二十餘丈石壁)이 깍아질러 서 있고 길이 없다. 바라보니 오르기가 어려웠는데 두 가닥의 철로 꼬아 만든 새끼줄(以二条鐵索)이 위에서 늘어져 있어 손으로 당겨잡고 오르니, 그 기슭은 마치 칼등과 같고 남쪽으로 곧장 솟아 나와 우뚝한 봉우리를 이루었다. 간신히 5~6명이 앉을 수 있고, 높이는 만길이나 되어 아주 높고 험하였으며, 멀리 흰구름 위에 드러나는데 실로 백운대라 이를만 하였다."-출처:근곡유고(芹谷遺稿) /조선시대 유산기 / 문화컨텐츠닷컴.
양대박(梁大樸·1543~1592)의 금강산 기행록에 기록된 등반 형태를 보면, 계곡에는 바위에 구멍을 뚫고 밧줄을 매어놓아 이를 붙잡고 길을 올랐으며 석안봉의 경사가 심한 언덕에는 바위에 쇠못을 박아 아래로 드리운 쇠사슬을 붙잡고 바위를 더듬으며 올랐는데 모두 네 곳이 있었다고 한다.7)
이 시기 금강산 봉우리나 전망처의 오르기 힘든 경사진 바위에는 쇠줄(鐵索, 철삭)이 설치된 곳이 있어 이를 부여잡고 기어 올랐다. 민화(民畵) 비로봉 등암도(登岩圖)의 등반 행위 또한, 비로봉에 설치된 쇠줄을 잡고 오르는 상황을 비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오늘날 경사진 등산로에 설치된 고정 밧줄을 잡고 오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등반 형태를 두고 “근대등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암벽등반”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곤란을 극복하고 산정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고 호연지기를 키우려는 행위만은 오늘날 등산의 개념과 다르지 않아 보이며 금강산은 근대 등산의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과 이후의 등반 자료가 많아 앞으로 금강산을 비롯한 유산기의 등반 형태에 대해서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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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李朝 の美=民藝 / 조자룡, 오까모또 타로, 외 / 1973. 3. 1 발행
금강산도(89)와 부분도(90, 등암도)의 도록 해설은 다음과 같다.(일문번역:김장욱 회원)
89.90 금강산도 십곡병풍 부분, 목면, 가로 29.3cm, 세로 144cm
산악불교의 일대 성지인 금강산이지만 소박한 애니미즘과 암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희화적으로 묘사되어졌다. 그림 90의 록 크라이밍 및 거대한 술병(도꾸리)는 정치적 항쟁의 세계로부터 격리되어진 서민생활의 현세적인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이조 민화의 밑바닥을 흐르는 현실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옅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에밀레 미술관 소장)
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 민화(民畵)ⅠⅡ/조자룡외/1989, 아름다운산수화전/가회민화박물관/2011, 금강산 유람의 통시적 고찰을 위한 시론/민윤숙/2010.9.30, 민중의 꿈 민화금강산도의 양식계보/진준현/미술사연구학회 279호/
2013.12,조선 민화의 새로운 관점과 이해 Ⅱ. 조선 후기 민화의 수요와 제작/홍선표/ 2014.를 참조하여 요약
3)홍경모(洪敬謨,1774∼1851)의 시문집인, 관암전서(冠巖全書)의 해악기(海嶽記[二])에 "차일봉은 옥구동 입구 동쪽에 있는데 형태를 가지고 이름한 것이다(遮日峯在玉樞㙜東 以形名也)"라고 하며, 그 형태에 대해서는 김귀주(金龜柱,1740~
1786)의 가임유고(可庵遺稿) 동유록(東遊記)에 "백마봉 남쪽으로 뾰족한 봉우리(此白馬峯 峯之南稍高一角 遮日峯云)"라는 기록이 있다.
4) 작가미상 금강산도 19세기~20세기초 종이에 엷은 색 각 89.2Ⅹ33.4.
출처는 (자연을 담은 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 / 청계문화재단/ 2009 으로 도판 해설(박정애)은 다음과 같다.
“제6폭의 상부 가섭동 오른쪽으로 백운대가 보이는데, 대의 생김새가 그 이름처럼 구름에 떠있는 듯하다. 그 정상에 자리한 사람들이 위태해 보이다가도 아랫쪽 철삭에 매달려 절벽을 오르는 인물들에 이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5)비롱봉에도 쇠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박세당(朴世堂, 1629. 8.~1703. 8.)의 시를 옮긴다.
"올가을에 다시 풍악산으로 떠나(秋來更擬楓岑遊), 공중에 드리운 쇠사슬을 밀쳐 버리고(垂空鐵鎖直掉却), 웃으며 비로봉 꼭대기에 기대서야지(笑倚毗盧峯上頭)"-출처: 석천록 하(石泉錄下), 서계집, 한국고전종합D/B
6)백운대의 바위구간 여성(금원당김씨)이 오른 기록도 있어 오르기에도 크게 어렵지는 않은 듯하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동북쪽으로 2리쯤 떨어진 지점에 만회암(萬灰庵)이 있다. 한 재를 넘었더니 바위 틈으로 난 길이 중간에 끊어지고 두 가닥 쇠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쇠줄을 부여잡고 두 길[丈]을 올라갔더니 그 정상은 백운대였다.”
그리고 이병렬(1808년 순조 8년 3월 26일)의 용강집 금강일기에 “나무사다리를 밟고 30층을 올라가서는, 견여에서 내려 걸어 갔다. 이것이 바로 비봉폭포이다. 수백보를 가자 줄이 매달려있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길이었다. 마침내 줄을 잡고 올라갔다. 십여보를 올라가니 옥류동이 있었다.(중략) 만회암에서 조금 쉬었다가 방향을 바꿔 백운대로 향하였다. 쇠줄이 두 길(2丈) 남짓이었는데, 위험하여 올라갈 수가 없었다.”
계촌 선생(이도현, 李道顯: 1837~1907) 문집에는 “수 십 척의 쇠줄(挽數十尺鐵索)로 된 사다리(玉作崇臺鐵作梯)”라는 표현도 보인다. 허훈의 동유록엔 “백운대가 나왔다. 돌길은 높고 위험한데 가운데는 움푹파이고 아래는 삐뚤어졌다. 위에는 쇠줄을 꼬아서 드리워 놓았다. 두 손으로 줄을 잡고 엎드려 올라갔다. 칼의 등날 같은 절벽이 동쪽에 솟아 있다. 절벽이 끝나는 곳에 잇는 유천을 금강수라고 했다.”고 “백운대로 올라갔다. 굵은 철사를 붙들고 올라가다보니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것 같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근대 노산 이은상의 백운대와 비로봉 등정 기록을 싣는다.
“백운대로올랏습니다. 비바람은 우리의얼굴을칩니다. 안갠지 구름인지 우리의허리통을 쓸어감앗다가 풀□면서 바람에 날려갑니다. 이도또한 두번못볼조흔風景(풍경)이라하엿습니다. 禪和子(선화자)의 得道處(득도처)라하는臺(대)의上岩(상암)에 올라안즈니 나도 눈코뜰수업는 이風雨(풍우)속에서 무슨解悟(해오)를 이를법도합니다. 天地(천지)에 風雲造化(풍운조화)가 이러나니 이는아마 天翁(천옹)이 나를爲(위)하야 念世時(염세시)의 景光(경광)을 다시한번보여주심일것입니다. 風雨(풍우) 헤오치고白雲臺(백운대)에 올라서니”-출처:香山遊記(향산유기) 1931.8.6 白(백) 雲(운) 臺(대) 李殷相(이은상) 十日(십일) 동아일보
“毘盧峯(비로봉)오르는길은"金(김)서드리"라부로는푸른익기안즌돌무덕이와"銀(은)서드리라부르는 흰익기안즌돌무더기로 되엇는데“서드리란말은 ”磊“의 뜻이며이는밟고오르는層階(층계)라는뜻인一種宗敎的命名(일종종교적명명)이다 金(김)길銀(은)길 밟고올라 上淸宮(상청궁)에놉히서니日星(일성) 雲漢(운한)과 벗하는 오늘이라天風(천풍)은 舞袖(무수)를날리며 몸가으로 돌더라 白雲天(백운천) 여긔로다 靑壁(청벽)을 만지노라”-출처:1930년 9월 17일 금강행 이은상 동아일보
7)금강산 기행록-양대박
“이 산을 유람한 사람들은 바위에 구멍을 뚫고 계곡에 밧줄을 매어 길을 만들었다. 가군은 남여를 타고 먼저 떠났다. 석안봉을 올라 망고봉을 바라보았다. 두 봉우리 사이의 바위와 언덕은 경사가 매우 심하였다. 상하로 길이 없는 곳에는 바위에 쇠못을 박아 아래로 쇠사슬을 드리웠다. 붙잡고 오르는 도구인 셈이다. 이러한 장소가 모두 네곳이 있다. 법영이 먼저 오르고 나와 최사겸은 바위를 더듬으며 쇠사슬을 붙잡고 목슴을 걸고 올라 갔다.”-출처:문화컨텐츠닷컴 조선시대 유산기
윤증(尹拯)의 금강산 시 중에 망고봉(望高峰)을 오르는 부분인데 등암도 상황처럼 쇠줄에 매달리려 사람들이 달려간다는 표현이 있다.
"비로봉은 정중앙에 우뚝 서 있고 / 毗盧正中立, 망고봉은 그 남쪽에 불쑥 솟았네 / 望高挺其南, 쇠줄이 서너 군데 드리워 있어 / 鐵鎖三四垂, 사람들이 매달리려 달려가는데 / 攀援衆生走"-출처:명재유고(明齋遺稿),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흥미롭네요^^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쇠줄을 잡고 오른것으로도 볼수있고...오버행이 아닌 선등자가 먼저 줄을 깔고 오른것으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요?
쇠줄이 태고적부터 원래있었던게 아니니깐요~~~^^
그러면...등반행위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정확한 답은 없겠지요~~~ㅎ
넵. 그랬으면 좋겠슴다.
자료 잘 정리했습니다, 조장빈 씨! 수고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예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만...
늘 격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