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닿는 자리 / 전새벽
1.
경치
누가 말해줬더라. 여하간 ‘경치’란 말의
뜻풀이를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볕 경景에 닿을 치致라니.
우리가 경치 좋다- 라고 한가하게 말할 때 그 경치는 ‘햇빛이
닿는 자리’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말이었다. 나는 그때 언젠가 이 아름다운 단어의 뜻을 가지고 기가 막힌 글을 써야지, 라고 결심했고, 그 결심을 메모하는 걸 잊었고, 해가 뜨고 출근을 하고 월급을 받고 빚을 갚고 좌절하고 냉가슴에 소주를 털어 넣으면서 그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다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써줄래, 라던 고마운 독자이자 업계 선배이자 둘도 없이 살가운
누이인 지현 누나가 했던 말 덕분에 떠올렸다. 단순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품은 그 두 글자를, 그것의 의미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자, 그럼 이제 왜 소설을 읽는지에 대해 써볼까. 위
문장에서 ‘빛’을 ‘소설’로 바꾸면 된다. 자, 오늘의
글 끝!
이라고 한다면 중앙일보는 내게서 글쓰기 권한을 빼앗아 갈 것이고 몇 안 되는 독자를 잃을 것이고 그렇다면 또 좌절하고 냉가슴에 소주를 털어
넣는 일이 반복될 것이 뻔하므로 조금 더 쓴다. 왜 소설을 읽는가에 대해서다.
2.
세월
짐작하건대 지현 누나가 말한 소설은 난해한 소설일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혹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난해와는 거리가 먼
소설을 읽는 이유는 뻔하니까. 그렇다면 그런 종류의 재미가 있지는 않은, 이를테면 무슨문학상 대상에 빛난다는 어떤 작품들 같은, 이런 난해한
소설을 읽는 이유는 뭘까. 추격전과 첨단무기도, 시한부나
출생의 비밀도, 우주선이나 강호의 무림신공도 나오지 않는 이런 소설을,
왜 우리는 꾸역꾸역 읽어야만 할까.
재미가 확실한 장르소설들은 대개 책장을 덮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인간을 관찰하며 쓴 묵묵한 기록들은 책장을 덮은 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독자에게 남은 깊은 심상이 지속되면서 긴 여운이 되고, 결국 그가
세계를 보는 시선을 바꿔버린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래를
보라.
이효석 문학상을 받았던 정지아 소설가의 ‘세월’이란
단편이 있다. 고작 원고지 80매에 불과한 분량에 ‘세월’을 논하겠다니, 과연
어떤 평론가가 걱정을 할 만 하다. 그런데 이 소설가는 세월이란 거대한 관념을 이토록 소박한 말투로
그린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의 푸념 같은 육성편지를 통해서다. 사투리가
심해 읽기 어려운 대목들이 있으니 첫 문장만 미리 번역(?)해 둔다.
‘여기서 보니까 당신이 걷고 있을 읍내 길마다 봄볕이 환해요’라는 문장이다.
여기서 봉게 이녘이 걷고 있을 읍내 질마다 봄벹이 환하요. 옛날에는 우수 겡칩 지나먼 해바라기를 안했소이. 천지사방 흔하디
흔헌 벹도 귀헌시절이 있었어라. 벵든 달구새끼모냥 꾸벅꾸벅 졸다보믄 어느새 벹이 저만치 비켜가불곤 했지라. 저만치 비켜가븐 벹이 애달파서 석양에 비낀 해를 봄시로 울기도 많이 울었어라.
어릴 직에는 봄벹이 간지빡이라도 멕인 것맹키 간지러와서 캐득캐득 웃기도 했는디라, 늙어서
긍가 워쩡가, 벹에 데워진 살이 넘의 살맹키 덤덤허그만이라. 징헌
놈의 세월이 살껍닥에 징으로 박혔는갑소. 글고 보믄 옛말 한나도 틀린 것 없어라. 산 목심은 워치케든 살아진다고 안헙디여. 세월은 참말 잘도 가요. 등껍닥허고 배껍닥이 짝 달라붙어 허리를 못 피던 시절에는 하루해가 무정시럽게 길기도 길드만은 워치케 된 영문인가
한평생이 후딱 지나가부렀당게요. 술에 취한 것맹키 말이요.
-정지아, <세월> 중. 단편집 <봄빛>(창비, 2008)에 수록.
봄빛만 쬐고 있어도 웃음이 나던 소녀 시절을 지나, 화자話者는 노인이 됐다. 감히 세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그녀가 그리는 세월은 '징헌 놈'이다. 세월이 그녀에게 참 몹쓸 짓 많이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쉽지
않은 세월 헤쳐오며 그것은 살껍데기에 징으로 박혔다. 그것들을 두르고 앉아 있으니 많은 것들로부터 무뎌진다.
화자는 젊은 시절 공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아버지한테 지게작대기로 맞는다. 여성이 공부를 할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선을 통해 만난 남편이 글을 알려줘 겨우 까막눈을 면했다. 남편은 공산주의자였다. 화자는 남편이 구해다 주는 삐라를 많이 읽었다. 결국 빨치산 토벌 때 불순분자로 몰려 도망을 갔다. 도망 길에 아이를
잃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화자는 다시 한 번 세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퍼붓던 눈발처럼 눈물이 쏟아졌어요. 나도 몰라요. 매운 고추냄새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고요…’
그날 밤 퍼붓던 눈발맹키 눈물이 쏟아집디다.
나도 몰라라. 매운 고추내 땜시 그랬능가도 모르고라. 이름
석자도 읎이 왔던 질로 돌아간 그 아가 평생 내 맘에 얹혀 있었능가도 모를 일이제라. 나는 까맣게 잊은
중만 알았어라. 그란디 말이요. 그날 밤, 얼음장 겉은 구들 위에서 어무이가 시키는 대로 만져본 말랑말랑 쬐깐헌 고추가,
손으로만 더듬어본 곰실곰실 쬐깐헌 눈코입이 잡힐 듯이 삼삼해서 말이어라. 다시 만져보고
자파서 말이어라. 손이 근질근질 환장을 허겄등마요. 정제칼로
손을 똑잘라내불고 싶드랑게요. 죽을 중만 알았다가 덤으로 살아난 목심이라 그랬을까라? 그때게는 그런 생각이 들등마요. 살아보도 못하고 간 그애가 지 목심을
나한테 얹어줘서라. 지 몫꺼정 산 목심의 고통을 젺어보라고라, 꼭
그런 것맹키었어라. 이녘이나 나나 그런 중도 몰라라. 애헌티
진 죗값으루다가 참말 질기게도 살아서라, 세월의 감옥을 살고 있능가도 몰라라.
남편은 결국 감옥에 간다. 화자는 옥바라지를 하면서 홀로 농사를 짓는다. 훗날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지만, 환갑 즈음에는 암에 걸린다. 세월은 또 무심하게도 흘러 화자는 팔십 대가 되었고, 남편은 정신을
잃었다. '은어맹키 세월을 거슬러올라간 이녘'이라고 한 걸
보면 치매에 걸린 듯 하다. 치매에 걸린 남편을 걱정하며 화자는 세월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쓴다. 군수
자리에 있던 사람이나 동네 시계방 하던 사람이나 늙으니 노인정에 모여 백 원 짜리 화투나 치는 걸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화자는 이제 편지를 마무리 한다. 이쯤 와 돌이켜보니 그리 치열하게 살지는 말 것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 회상에 젖게 될 줄 알았으면 떠올리기
좋은 예쁜 기억을 많이 만들어 둘 것을... 화자는 그런 얘기를 한다.
‘살아보니까 말이죠,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고요, 몇 살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옛 기억들이 지금으로 흘러 들어와 앞뒤가 없고, 말하자면
자기 꼬리를 문 뱀처럼 말이죠…’
살아봉게 말이어라. 시간은 앞으로만
흘르는 것이 아니고라. 멫살부텀이었능가는 몰라도라. 옛 기억들이
시방의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서라, 앞도 뒤도 읎이, 말하자먼
제 꼬리를 문 뱀맹키 말이어라. 나는 말이어라. 갇힌 시간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되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맹키어라. 이럴 중 알았으먼 말이어라, 날 서고 아픈 기억 말고라, 되새기기 좋게, 되새기먼 함박웃음이나 벙글어지는 말랑말라 보들보들, 그런 기억이나
맹글어서라, 요리 벹 좋은 날에 벷 속에 나앉아 따독따독, 이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먼 안 좋았겄소이. 누군들 그리
살고 싶지 않았겄어라. 그리 살고 싶어도 안되는 것이 시상지사(世上之事)지라.
3.
소설을 읽는 이유
남도의 진한 사투리가 문장의 리듬감을 살려주는 이 구수한 소설은 사실 인터스텔라급 과학을 담고 있다. 주인공
할머니가 시간의 관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앞으로만 흘르는 것이 아니고라'라는 문장에서 그걸 알 수 있다. 시간은 연속적 흐름이 아니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얘기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대충 이런 것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다큐멘터리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 타임워프' 참조를 참조하라.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학가인 정지아 소설가가 따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공부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토록 어려운 시간의 법칙을 스스로 깨달았을까? 소설가가
그런 존재다. 인간군상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진리를 깨우치는 존재다.
깨달은 바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적으면 그게 소설이 된다. 다만 늘 깨달음이 오는 건 아니어서
못 깨달으면 못 깨달은 대로 써서 낸다. 그래도 가치가 있다. 인간을
탐구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곳이 이 차가운 세계니까.
난해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난해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내 삶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거다. 어렵지만 이해한 사람만 햇빛이 닿는 자리에 서게 된다. 비로소 아름다운 경치를 누릴 수 있다.
소설이라는 ‘빛’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2017. 9. 27 중앙일보 J Plus
첫댓글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로 써도 몇 권은 된다'고들 하는데 이런 할머니를 두고 하는 말일 게야.
중앙일보에서 글쓰기 권한 뺏어갈 리는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되겠네.
햇빛이 닿는 자리, 경치가 품은 이야기가 풍성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