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제주도에 굵은 비가 내렸습니다. 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해안도로 드라이브 뿐! 실내놀이터도 몇 번은 가야 적응할테니 그럴 시간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 완이랑 맛집을 좀 다니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은데 식당입구부터 망설이기 일쑤니 괜히 또 마음만 상합니다.
그저 오름이나 숲산책로, 바다가 제 격인데 요즘 날씨가 연속으로 눈, 비로 점철했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아침에 형아들 데려다주는데 부슬부슬 비가 뿌려댑니다.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평탄하지만 울창한 삼다수 숲길이나 걸을까 하고 교래리쪽으로 가니 완전 오리무중! 한라산 주변으로 안개가 어찌나 심한지 한치 앞도 가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험하다싶을 정도의 짙은 안개입니다. 안되겠다싶어 교래리를 빠져나오니 표선 쪽은 쨍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도 안오고 안개도 없습니다. 오늘의 행군은 따라비오름이나 모지오름이었으나 따라비오름은 도로공사 중이라 입구가 없어진 듯 하고 모지오름은 휴지기라 닫혀있고... 오늘은 이래저래 거절의 날인 듯 합니다.
가장 만만한 표선항에서 하얀등대 지나서 바닷가따라 걷는, 제가 명명한 소망의 돌길을 걸었습니다. 오늘따라 바다가 참 아름답습니다. 날씨는 온화한데 은근히 센 바람이 파도를 멋지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실 기분이 좀 많이 가라앉습니다. 며칠 전부터 태균이가 힘들어하는 표정과 행동이 너무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괴롭거나 힘들 때 질러대는 특유의 가성, 검지손가락물기, 몹시 흥분하기, 살짝 뭐가 올라오는 듯 엄마 팔뚝을 꼬집으려다 내려놓고 (과거 심하게 간질 한창일 때 마지막에 제 팔뚝 깨물기나 꼬집기로 마무리되었기에 이런 제스츄어가 나오면 태균이가 뭔가에 시달린다는 표시인데...), 그리고 흥분하면 돌발하는 갑작스런 뜀박질 등 뭔가 편치않은 신호를 자꾸 보냅니다.
급기야 오늘은 주간보호센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모구리야영장에서 다 먹지도 않은 과자를 바닥에 다 쏟더니 발로 다 짓이겨 버립니다. 심상치않은 이 행동들... 원래 준이만 보내려다가 시설이 좋은 것 같아 태균이까지 간 것인데 뭔가 힘든 점이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좀 답답해집니다.
아침에도 아이들 넣을 때 담당쌤이 전하는 말, 어제 준이가 변을 보고 뒷처리를 깔끔하게 못하는 것같아 선생 둘이 들어가서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여태껏 함께 지내면서 저도 안해주었고, 안해본 일인데 자꾸 신변처리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그렇고.. 태균이는 잘 하냐 등의 지나친 장애취급을 하는 것 같아 순간, 기분이 좀 묘하긴 했습니다.
준이는 워낙 변비가 심해 저랑 함께 살아가면서 장연동 작용 개선만 신경쓰고 살았고 준이가 완벽하진 않아도 뒷처리를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원초적인 문제를 지적받고나니 아 태균이 준이가 그저 모자란 장애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듭니다.
그러고보니 여러가지 복합적 문제가 있을지라도 태균이 준이가 장애인이란 걸 의식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장애인이라고 이런 우려를 받는다고는 생각 못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태균이가 나름 속이 멀쩡하니 그런 분위기가 힘들었을 듯 하기도 합니다. 너무 빨리 닥친 위기감에 마음이 좀 심란합니다... 엄마와 지낸 오랜 세월 속에서 잘 세워진 자존감이나 자기위치감이 왠지 무너지는 듯한 느낌, 그걸 태균이가 느낀걸까요?
몇 년만에 손가락을 물고, 과자를 짓이기는 행동을 보니 다소 마음이 심란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두 손모아 미안하다고 빌어대는데 뭐가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태균이는 제가 계속 운동시키고 본인이 원하는 걸 더 많이 시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 이제 태균이도 장애라는 포장 속에서 그렇게 대접받는 것이 불편한 걸까요? 사회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영락없는 장애청년일 뿐인데...
태균이도, 저도 잠시 적응이 안되서 서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준이는 요즘 데파코트로 약을 바꾼 후 머리를 쥐어감싸는 행동은 엄청 줄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서로가 바라보는 기준이 다르니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지만 이게 오늘 저를 괴롭게 만듭니다.
아이가 잘 나오던 못 나오던 그 날 활동한 것은 모두 매일매일 사진으로 넘겨주었던 우리세상발달학교와는 완전 반대로, 사진은 절대 안보내준다고 하니, 이것도 같은 사안을 대하는 정책의 차이이긴 한데, 제가 워낙 열린 정책으로 학교를 운영한 듯 합니다. 그래도 사진 몇 장쯤은 문제가 없을 듯 한데...
오늘과 같은 갈등이나 고민은 제가 오래 학교를 운영했었고, 운영정책의 모토와 주안점이 무엇이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정체를 모르니, 선생님들이야 여타 학부모에게 하듯이 주간보호활동센터의 나름 주안점을 알려주는 것인데도 그게 우리의 진짜 현실인 것 같아서 깨닫는 바가 많아집니다.
태균이는 좀더 자유롭고 일반적인 활동에 너무 길들여지지 않았나 새삼 느끼면서 이런 방식이 태균이에게는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건 저보다도 태균이가 스스로 깨닫고 있는 듯 합니다. 절충점을 잘 찾아보아야 되겠습니다.
첫댓글 읽는 제가 엄청 긴장합니다. 태균씨는 그렇게 양육되었겠지만 자존감을 타고 났습니다. 장애인이라고 무시당하거나 어쩜 센터 분들 일거일동에서 마음을 다쳤을 수도 있다 여겨집니다.
충분히 태균씨랑 의사 타진해 보시고 당장 내일 부터라도 안 보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
훗날 그림이가 고아가 되었을 때, 존재의 기본 존엄이 짓밟히면 어쩌나 ?
가장 큰 첫번째의 걱정, 차라리 공포가 오늘 대표님 글 읽으며 살아나서 넘 힘드네요. 가능하면 대화까지 다 들리는 기록 영상이 넘 보고 싶네요.
대표님. 너무 심란하시겠어요ㅜㅜ
제가 사는 곳에 장애인복지관이 성인주간보호센터를 겸하고 있는데, 프로그램도 좋고 시설도 훌륭합니다. 언어치료실 바로옆이라 언제 누구라도 공개적으로 볼수있어서 아이 치료 대기하면서 가끔 엿보곤 합니다.ㅎㅎ 30,40대 성인들이 가끔 뽀로로를 보면서 웃는게 짠하기도 하지만 기능좋은 장애인들은(대체로 성인 지적여자 장애인) 서로 언니, 언니하면서 친밀감도 쌓고 먹을 것도 챙기며 공동체 속에 스며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태균씨는 그간 너무 자유로운 생활만 해왔고, 엄마이외에 타인과는 의사소통이 자유롭지않다는 점에서 큰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갑작스런 장시간 실내활동이 큰 불편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일테니깐요. 시설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속과 의사소통의 불편이 문제라고 보는게 맞을 듯합니다.
대표님이 알아서 잘 해결하시겠지만, 저는 항상 저희 부부가 먼저 가고 남겨질 아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희 부부가 없어지면 어디라도 공동체에 속해야하는데 그걸 미리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습니다. 천천히 적응시켜보시고 안되면 또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셔도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