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몸 바친 선교사들의 아픔과 슬픔 절절히 담겨
[키워드로 읽는 한국 찬송가의 발자취] <1> 희생
2024. 8. 17. 03:10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부부의 가족묘. 오른쪽은 1904년 평양서 활동했던
선교사 가족들의 회합 사진으로 베어드(맨 뒷줄 왼쪽 세 번째)와 부인 애니 베어드(뒤에서 두 번째 줄 왼쪽 네 번째)
선교사 부부도 함께했다. 사진 속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평양신학교 초기 발전에 기여했다.
The Moffett Korea Collection,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찬송가공회 제공
한국교회 선교 역사는 찬송가의 발전사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선교사들이 착수한 첫 과업은 성경과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해 보급하는 일이었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가사와 악보가 함께 실린 최초의 찬송가집 ‘찬양가 117곡’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이 땅엔 다양한 찬송가가 제작돼 뿌리내렸다.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찬송가는 130여년간 한국 복음화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기독교 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다.
‘키워드로 읽는 한국 찬송가의 발자취’에서는 한국 찬송가의 역사적 맥락을 재조명하고 찬송가 제작 과정에서 잊혔던 선교사들의 헌신을 되새기며 가사에 담긴 영적 의미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찬송가가 단순한 노래를 넘어 신앙의 정수와 시대의 아픔, 그리고 희망을 담아낸 한국교회의 위대한 영적 유산임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15개국 외국인 선교사 417명이 안장돼 있다. 묘원 제일 안쪽 왼쪽 끝부분 1평 남짓한 땅엔 윌리엄 베어드(William Baird·한국명 배위량) 목사와 그의 부인 애니 베어드(Annie Baird·한국명 안애리) 선교사 가족의 묘원이 있다. 1916년 6월 9일 53세라는 이른 나이에 주님의 품에 안긴 안애리 선교사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찬송가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찬미가 1895년, 21세기 새찬송가 387장)
이 찬송시는 안애리 선교사의 작품으로 그녀의 개인적 비극과 신앙 여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고향을 떠나 남편과 함께 복음의 사명을 갖고 조선 땅에 온 지 3년째인 1893년 5월, 그녀는 사랑하는 첫 딸 낸시 로즈를 잃었고 1903년 1월에는 막내아들 아서 마저 영영 떠나보내야 했다. 이런 깊은 상실감과 슬픔은 찬송 가사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당시 힘없는 조선의 현실과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기에 고통받았던 한국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공감을 주었다.
안애리 선교사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과 예리한 언어 감각으로 한글의 특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단순히 영어 찬송가를 직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인 정서에 맞게 영혼의 울림을 주는 가사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한글 찬송가의 질적 도약을 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녀의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을’(찬셩시 1898년, 새찬송가 563장), ‘인애하신 구세주여’(찬미가 1895년, 새찬송가 279장) 외에도 10여곡이 번역 당시 가사와 큰 변동 없이 ‘통일찬송가’와 ‘21세기 새찬송가’에 그대로 실렸다.
한국 찬송가의 역사는 이처럼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안애리 선교사의 사례처럼 수많은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들은 열악한 환경과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어린 나이에 죽어갔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길’ 뒤에는 이렇게 인간적인 아픔과 슬픔이 숨겨져 있었다. 오늘날 한글로 찬송가를 부르며 은혜의 복음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함께 찬송가는 단순히 신앙적 표현의 도구를 넘어 한글 발전과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를 형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 강점기 시절 찬송가는 민족의 아픔을 달래고 희망을 노래하는 매개체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런 맥락에서 찬송가는 단순한 종교 음악을 넘어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호흡하며 발전해 온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김용남 한국찬송가공회 국장
약력=건국대(철학과)와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를 거쳐 미국 칼빈신학교(ThM)와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박사과정·교회사)에서 공부했다.
기사원문 : https://v.daum.net/v/20240817031009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