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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평가원 문제에 대한 이의제기 내용 중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고, 두고 두고 공부하면서 참고할 내용이 많았는데
며칠 후면 내용이 없어져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게시판에 들어가 윤사 생윤 이의제기된 부분을 복사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함께 공부하고 이의제기된 부분에 대해 토의하며 같이 연구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9평 윤사 생윤 이의제기 모음]
글쓴이등록일2018-09-05 21:50:00
제목윤리와사상 12번은 오류입니다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평가원은 12번의 정답을 ③번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중에서 문제되는 것은 ㄴ 선지입니다. 다시 써 보겠습니다.
ㄴ. 이(理)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갑(이황), 을(이이) 둘 중 한 사람만 긍정하면 정답이 되는데, 이황이 ‘이(理)의 작용[理之用]’을 얘기했다는 건, 비록 교육과정은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이미 기출로 다루어진 적이 있어서 기출문제를 공부한 학생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황은 부정의 대답을 할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지가 답이 되려면 이이(율곡)가 긍정의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곧 이이는 ‘이(理)의 작용[理之用]’을 얘기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이 역시 ‘이(理)의 작용[理之用]’을 얘기합니다. 증거를 제시합니다.
理有體用 固也 一本之理 理之體也 萬殊之理 理之用也 理何以有萬殊乎 氣之不齊(리에도 체용이 있다. 근본적인(전체적인) 理는 리의 본체[體], 만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리의 작용[用]이다. 리가 어떻게 만물에 갈라져 들어갔는가? 기가 다르기 때문이다.)(“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따라서 네 개의 선지 중, 이황과 이이 중 한 사람이라도 긍정할 질문은 ㄷ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의 정답은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이황의 리 체용론을 출제하는 것도 교육과정 이탈입니다만, 이황의 ‘리발(理發)’을 교육과정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응용하는 차원에서 이황의 ‘리의 작용[用]’을 출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용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이가 ‘리(理)의 체용’에 대해 언급했는지 어땠는지 하는 것은 여전히 교육과정 이탈입니다. 절대로 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시문에 힌트를 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시문에 힌트를 줄 수도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출제자는 이이는 리(理)의 작용[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 줄 알고 그렇게 선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추측건대, 이황이 ‘리발’을 설명하기 위해 ‘리의 작용[用]’을 얘기했으니, ‘리발’을 부정한 이이는 당연히 ‘리의 작용[用]’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겠지, 하는 단무지한 수준의 사고능력을 가지고 출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추측건대, 이 선지를 제시한 출제자는 물론이고, 이 선지를 두고 토론을 거듭했을 다른 출제자들, 검토자들 중에 이 선지의 오류 여부를 가려줄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띨띨이들의 집합소입니까?
저는 근 3년간, 우리 윤리교육과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오류 선지들을 지적해 왔습니다. 비록 평가원이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지만, 내가 지적한 선지들은 절대로 다시는 출제하지 않는 것을 볼 때, 내부적으로는 수긍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후적 처방일 뿐입니다. 발전이 있어야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윤리교육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제가 너무 맥이 빠지네요.
그나저나, 위 선지의 오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또 ‘이상 없음’이라고 발표하실 겁니까? 저건 무슨 해설도 필요 없이, 그냥 이이의 책에 버젓이 나와 있는 문장입니다. 이렇게 유치원생도 알아볼 오류를 여전히 ‘이상 없음’이라고 발표하면서 슬그머니 넘어갈 건가요?
생활과 윤리에도 이미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3번까지 풀어봤는데 오류가 보이네요. 이의제기 기간 안에 글 올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평가원의 윤리 관계자 분! 정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윤리와 사상 문제 전체가 학교 내신문제스럽습니다. 기출 선지들을 그대로 재활용하고 있는 것도 너무 심하고요. 윤리 교과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 학생들에게 퀄리티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너무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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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6 00:01:57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 선지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Q1. 지문에 나온 리의 ‘작용’이라는 표현은 리의 무작위, 무발용을 합친 뜻인지, 아니면 리기의 체용론에서 말하는 리의 용을 한글로 풀어쓴 뜻인
지 해당 문제의 지문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출제자가 제시한 용어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Q2. 교과서를 포함해 EBS 연계자료에도 리기(理氣)의 체용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공자도 책을 다시 찾아봐야 할 정도로 까다
로운 내용을 고등학교 모의고사에 출제한 근거가 궁금합니다.
예문서원에서 출판한 한국의 사상가10인 [이이] 편에 나온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율곡전서 권12, “리에 체용이 있다. 하나의 근본이 리(理)는 체(體)이고, 만 가지로 다른 리는 리의 용(用)이다. 리일(理一)은 리의 체이고, 리만수(理萬殊)는 곧 리의 용(用)이다.”
율곡이 말한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라고 말한 바는 물리적, 현상적, 일상적인 의미의 작위가 아니라 ‘소연자(所然者)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의 소이연(所以然)’이기 때문이다. ‘소연’의 ‘소이’이기 때문에 무위인 것이다. 기의 작용은 리를 떠난 기는 없는 까닭에 이미 그 속에 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위 서적 외에도 많은 한국철학 저서들에서 율곡이 리의 작용을 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정하고 해석했다고 평가해석 하고 있습니다.
12번 ㄴ 지문은 주자가 리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해석(이것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을 율곡에 덮어씌운 것은 아닐런지요. 이것을 학생들에게 이황은 주리론, 이이는 주기론의 이름으로 답습하여 가르친다면, 일제시대에 한국유학을 폄하하려했던 일본 학자의 관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ㄴ 지문의 내용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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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6 01:01:20
제목6번 맹자의 '예'에 관하여 이의제기합니다.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6
정답의견 문제오류
6번 문제 선지 ㄹ에 관하여 이의제기합니다.
갑은 공자, 을은 맹자입니다.
ㄹ.갑,을 : 예는 인간의 도덕적 삶의 필수적인 사회 규범이다.
저는 위의 진술이 을(맹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수능특강을 근거로 말씀드립니다.
맹자는 '예'를 사회 규범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선천적인 선한 본성인 4덕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Ɗ단'의 의미가 그러한 4덕이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단서 혹은 실마리'인 것에서 4덕은 내면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예'를 외면적 사회 규범이라고 명백히 정의하고 있는 사상가는 공자와 순자 둘 뿐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예'는 개념적으로 명백히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ㄹ선지가 정답인 것에 매우 유감스럽니다.
명료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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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6 09:43:40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 선지에 관한 정답의견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정답의견
윤사 12번 ㄴ 선지에 대한 반박
이의게시판에 들어와서 내용을 보면 참 열심히 공부하시는 윤리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런 노력들과 공부 속에 한국 윤리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해봅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1. 이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 이이가 긍정의 대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서울대학교 이이[율곡전서]에 pp.66-67에 보면 이이가 이황의 ‘이가 움직인다’[理動]이의 작용(用)에 반박하면서 이황이 말하는 이의 작용이란 이가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 가지로 다른(萬殊)’가 이의 작용으로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반박할 때 이황이 쓴 이의 작용(用)을 끌어들여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상대방의 용어를 반박하기 위해 끌어들여온 개념을 이이가 주장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긴 문장의 맥락을 무시하고 한 문장만을 들어낸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이가 '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의 작용은 없다. 굳이 이황의 말을 빌어온다면 만수(萬殊)의 리 즉,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이황이 이를 이의 용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원문과 해석을 올립니다. 긴 내용이라 죄송합니다.
(e1.3.2.1) 이황은 ‘이는 움직인다’(理動)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이의 작용(用)’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에 운동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이가 상징하는 도덕적 이념이 스스로 ‘움직여’ 현실 세계에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도덕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기를 희구한다. 이는 현상에 드러나는 이의 자기 전개 양상을 휘황한 인드라망의 이미지로 포착하는 이일분수설의 발상을 적극적으로 밀고나간 것이다.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 같은 이황
의 이동설에 대한 강력한 반명제가 된다. 이와 기, 본체와 현상을 엄격하게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이통기국의 구도에서는, ‘이가 움직여’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1.3.2.2) 이 점에서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념에 대한 현실의 대등한 고려를 청하는 것으로서, 이황의 세계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강한 현실 지향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은 이이가 제자인 안천서(安天瑞)의 질문에 답한 글에 잘 나타난다. 안천서는 이황의 이동설과 비슷하게, 이에 움직임이 있다는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이는 안천서를 이통기국설의 견지에서 반박한다.
(q1.3.2.3) 이에 본체와 작용이 있다는 것은 본디 그러합니다. 근본을 하나로 하는(一本) 이는 이의 본체이며 만 가지로 다른(萬殊) 이는 이의 작용입니다. 이가 어떻게 만 가지로 달라지겠습니까? 기가 고르지 못하므로 기를 타고 유행하면 곧 만 가지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가 어떻게 유행하겠습니까? 기가 유행할 때에 이가 그 기틀을 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희 선생은 태극이란 본연의 묘함이고 움직이고 고요함이란 그것이타는 기틀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본래 무위(無爲)이나 기를 타고 유행하여 만 가지로 변화하며, 비록 유행하여 변화하지만 그 무위(無爲)의 본체는 본래 그대로 있습니다. 이런 곳을 대충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벗께서
이 이가 기를 타고 유행하여 무수히 변화하는 것을 보시고, 이가 움직임도 있고 작위함도 있다(有爲)고 여기시니, 이는 이와 기를 알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精微之理, 吾友發之太早, 不切於日用, 當勸吾友以下學, 以待漸有所見, 而今已開端, 不得不說破也。 理有體用, 固也, 一本之理, 理之體也; 萬殊之理, 理之用也。 理何以有萬殊乎? 氣之不齊, 故乘氣流行乃有萬殊也。 理何以流行乎? 氣之流行也, 理乘其機故也。 故朱子曰: “太極者, 本然之玅也; 動靜者, 所乘之機也。” “理本無爲, 而乘氣流行, 變化萬端, 雖流行變化, 而其無爲之體, 則固自若也。” 此等處不可草草理會也。 吾友見此理之乘氣流行, 變化不一, 而乃以理爲有動有爲, 此所以不知理氣也。(「답안응휴」, Ⅲ198-179)
2. 이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에 이이는 자신의 이통기국에서 여러 번 강조했던 바이며, 이이의 이기론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이가 긍정할 질문이 맞습니다.
이는 무형(無形)이고 기는 유형(有形)이기 때문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이다. 이는 무위(無爲)인데 기는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기가 발(發)하고 이는 탄다. 무형․무위이면서 유형․유위의 주재가 되는 것은 이이고, 유형․유위이면서 무형․무위의 그릇(器)이 되는 것은 기이다. 이것은 이기를 연구하는 큰 실마리이다.(성학집요, Ⅴ85-86)
(q1.2.2) ‘기가 발하고 이는 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음은 고요하고 양은 움직이는 것은 기틀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그렇게 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움직이면 이가 움직임에 타는 것이지 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음이 고요하면 이가 고요함에 타는 것이지 이가 고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희 선생은 “태극이란 본연의 묘함이며, 움직이고 고요함이란 이것이 타는 기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그 까닭이 이입니다. 그래서 주돈이 선생은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고요하여 음을 낳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움직여 양을 낳고 고요하여 음을 낳는다’는 말은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것(未然)에 근원하여 말한 것이며, ‘움직이고 고요함이란 이것이 타는 기틀이다.’는 말은 이미 그렇게 된 것(已然)을 보고서 말한 것입니다. ‘움직이고 고요함은 끝이 없고 음양은 시작이 없으니’, 이기의 유행은 모두 ‘이미 그러한’ 것뿐이지 어찌 ‘아직 그렇지 않은’ 때가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천지의 조화와 우리 마음의 발함이 모두 기가 발하고 이는 타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른바 ‘기가 발하고 이는 탄다’는 것은 기가이에 앞선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는 유위이고 이는 무위이므로, 그 말이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답성호원」, Ⅲ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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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6 21:30:57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선지가 오류인 이유(부연설명)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1. 이것은 그냥 이이 책 원문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뭔 놈의 해석이 어쩌고 하는 것이 다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냥 윤리 출제자들, 검토자들이 다 띨띨해서 발생한 일일 뿐입니다. 이런 일이 지금까지 어디 한두 번이었나요?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오류 지적하는 글을 올리면, ‘어디선가 느닷없이’ 무지렁이가 튀어나와서 별 해괴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결론은 ‘정답에 이상이 없다’고 외쳐댑니다. 글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나같이 사실을 왜곡하는 데다가 삼천포로 빠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오류인 줄 알고 그런 짓들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죠. 이렇게 아무 내용이나 마구 갖다 붙여 가면서까지 저런 짓을 하는 것은 물타기를 위한 것입니다.
아무 말이나 일단 지껄여 놓으면 전문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뭔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논란이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건 평가원의 고위 책임자도 그럴 겁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철학 전공자, 또는 지금 문제되고 있는 이이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사실 이이만 알면 안 되고, 주자학 전체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뭔 소린지 모를 테고, 그럼 평가원의 윤리 책임자는 고위 책임자에게 “논란이 있는 내용입니다.”, “해석의 차이가 있는 내용입니다.”라는 식의 거짓 보고를 할 겁니다.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고위 책임자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런가’ 하고 넘어갈 공산이 크고요. 물론, 평가원 윤리 책임자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무슨 듣보잡 동양철학 교수 하나 불러다가 “정답에 이상 없음”이라는 보고서에 서명하게 할 겁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듣도 보도 못한 무지렁이가 나타나서 물타기를 하느냐 하는 겁니다. 평가원 윤리 책임자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지령을 받았거나, 알아서 충성하는 차원이겠죠. 그렇게까지 하면서 학문적 팩트를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런 짓을 하는 게 ‘윤리’ 관계자들이라는 게 믿겨지나요? 학원가에서 인강강사들이 이런 짓들을 많이 합니다. 어차피 오직 돈만이 목적인 사람들이니까, 수단방법 안 가리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성스러운 수능 관련 게시판에서 이런 짓들이 벌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도 ‘윤리’에서 말입니다. 경고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분노 이전에, 너무 창피합니다.
2. ‘리(理)의 체용(體用)’은 주자가 이미 언급합니다. 그러니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주자학자인 이황, 이이 모두 ‘리의 체용’을 논하죠. 다만 그들은 주자가 말한 ‘리의 체용’을, 자신의 주장에 맞게 각색(해석)합니다. 이황이 자신의 ‘리발(理發)’을 설명하기 위해 ‘리의 작용[用]’을 동원했다면, 이이는 아주 여러 의미로 ‘리의 작용[用]’을 거론합니다. 결코 이황의 ‘리발’설과 관련해서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에 주자가 ‘리의 用’을 얘기했을 때에 그 用을 ‘운동’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이 역시 理가 운동성이 있는지 없는지와는 무관하게, 주자처럼 ‘리의 用’을 설명할 뿐입니다(사실 이황이 주장하는 ‘리의 발’도 리의 운동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고 저는 보고 있지만, 지금 이것은 논점이 아니니 설명을 생략합니다.).
이제부터 이이가 ‘리의 用’을 언급하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① 理有體用 固也 一本之理。理之體也 殊之理。理之用也…理何以流行乎 氣之流行也 理乘其機故也(리에 체용이 있는 것은 물론이니, 전체의 리는 理의 체요, 각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理의 용이다.…이가 어찌하여 유행하는가. 기가 유행할 때 이(理)가 그 기틀[機]을 타기 때문이다. )(“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인용문을 보면 이이는 이 대목에서 ‘리일분수(전체의 리와 각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를 설명하는 도구로 ‘리의 체용’을 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의 리는 ‘리의 체’이고, 이 리가 각 사물에 깃드는 작용[分殊:분수]을 ‘리의 용’으로 설명하고 있죠.
이이는 이황과 논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황의 공격을 받고 이것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저런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은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이가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긴 하지만, 이황의 공격을 받고 반박하는 차원에서 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무슨 전체 맥락이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정말 무지의 소치입니다. 이런 헛소리가 의도적이라면 그 죄질이 매우 나쁘고요.
② 溫和慈愛者 情也 所以溫和慈愛者 理也 是乃仁也…理之未發也 渾然全具 則仁之體也 理之旣發也 此心溫和慈愛 而理亦寓焉 理之在溫和慈愛者 乃理之用也 非溫和慈愛 便是理也 理之渾然而不可名狀者。則所以然者也。理之發用而在於溫和慈愛者。則所當然者也(온화 자애한 것은 정情이고, 온화 자애한 소이는 리이니, 이것이 바로 仁이다. …리의 미발에 혼연히 온전한 것은 仁의 체이고, 리의 기발旣發에 이 마음이 온화 자애하며, 리도 역시 붙여 있는 것이다. 리가 온화 자애 속에 있는 것은 리의 용이지, 온화 자애가 곧 리라는 것이 아니다. 리가 혼연하여 이름 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며, 리가 발용되어 온화 자애 속에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성발위정(性發爲情)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性)이 발하기 전은 리의 체, 성이 발하여 정 속에 리가 있는 것은 ‘리의 용’이라는 설명입니다.
③ 問: “心之未發時,已發之理具焉 此亦謂之無極而太極乎?” 曰: “以未發爲太極之體,以已發爲太極之用可也”(묻습니다. 마음이 미발일 때 이발已發의 리를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무극이태극 無極而太極’에도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율곡 선생) 답하되, “미발은 태극의 체, 이발은 ‘태극의 용’이네.”)(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一 語錄[上])
태극(太極)은 리(理)로 대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마음의 미발‧이발에도 ‘리의 체용’을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④ 問: “敬該涵養省察 而義則專指省察耶?” 曰: “然” 問: “所以然者,理之體也; 所當然者,理之用也 至於氣之體用,亦可得聞耶?” 曰: “氣之體用,陰與陽是也” 曰: “陰靜爲體,而陽動爲用耶?” 曰: “是”[묻습니다. “경敬이 함양성찰을 아우르고 의義는 오직 성찰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답하되, “그렇다” 묻습니다. “소이연은 리의 체, 소당연은 리의 용입니다. 기의 체용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율곡선생) 답하되, “(소이연은 리의 체, 소당연은 리의 용이지만, 그것과 달리) 기의 체용은 음과 양이다.” 묻습니다. “음이 고요한 것은 체, 양이 움직이는 것은 용인가요?” “그렇다”](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一 語錄[上])
여기서는 또 이이가 ‘리의 체용’을 소이연‧소당연 개념을 설명에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이는 반드시 이황의 ‘리발’을 부정하기 위해서만 ‘리의 체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관련된 얘기를 합니다. 당연한 거예요. 주자가 ‘리의 체용’을 얘기했으니 주자 학문 계승을 표방하는 이이 역시 ‘리의 체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리의 용’을 ‘리발’의 의미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자가 말한 ‘리의 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외에도 이이가 ‘리의 용’을 언급한 대목은 많습니다. 저 정도 인용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에 더 이상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학문은 엄밀해야 합니다. 더욱이 수능은....한번 오류는, 그것을 평가원이 인정하지 않으면 전국의 모든 교사, 학생들이 오류를 오류인지 모르고 배워야 합니다. 오류를 오류인지 아는 사람은 구구절절 이게 왜 오류인지 설명해가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왜 전국의 윤리교사들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나요? 그렇기 때문에 ‘오류는 범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수가 범죄인 게 아니라, 실수인 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게 범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범죄를, 어떤 더러운 목적을 위해 은폐하려는 자들은 더욱 죄질이 나쁜 자들입니다. 그런 나쁜 짓들이 ‘윤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 저는 너무나 착잡합니다.
이 기회에 또 한 번 평가원 관리자에게 제의합니다. 지난 3년간 내가 오류라고 지적한 선지들이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에 걸쳐 꽤 많은 거, 잘 아실 겁니다. 내 지적이 타당하다는 것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거고요(중의성 선지들, 교육과정 이탈 선지들은 제외한 것입니다. 교육과정 이탈 선지는 출제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게 반칙일지라도 일단 출제했으면 이제 수험생들이 숙지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짓도 하면 안 된다는 거, 잘 알 거예요.). 우리가 다 모여서 오류인 선지들을 다 검토하고, 오류라는 사실이 확정되면 전국에 공표하자는 겁니다. 당신들끼리 모여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건데 저 사람이 혼자 주장한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기만하지 마시고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출제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오류라고 지적한 것들은 사실 다양한 해석보다는 팩트거나 통설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평가원 기출문제의 오류들 때문에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 모두 학교 현장에서 많이 왜곡되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코미디라면 코미디, 비극이라면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 님 자리 보존만 걱정되나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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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7 02:43:01
제목12번 문항 ㄷ 선택지 이상 없습니다.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반대의견
1. 이(理)에 체와 용이 있다는 것은 본디 그러합니다. 근본을 하나로 하는(一本) 이는 이의 본체이며 만 가지로 다른 이[分殊理]는 이의 용입니다. 이가 어떻게 만 가지로 달라지겠습니까? 기가 고르지 못하므로 기를 타고 유행하면 곧 만 가지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가 어떻게 유행하겠습니까? 기가 유행할 때에 이가 그 기틀을 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희 선생은 “태극이란 본연의 묘함이고 움직이고 고요함이란 그것이 타는 기틀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본래 무위(無爲)이나 기를 타고 유행하여 만 가지로 변화하며, 비록 유행하여 변화하지만 그 무위(無爲)의 본체는 본래 그대로 있습니다. 이런 곳을 대충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벗께서 이 이가 기를 타고 유행하여 무수히 변화하는 것을 보시고, 이가 움직임도 있고 작위함도 있다(有爲)고 여기시니, 이는 이와 기를 알지 못하는 이유입니다.(「답안응휴」)
윗글은 이이가 자신의 제자인 안천서의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이에 체와 용이 있다.’는 이에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안천서가 질문하자 이이가 주자의 언급 또한 이가 독자적 작용을 한다는 의미는 아님을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이는 주자가 이의 용을 말한 것은 결국 만 가지로 다른 이[分殊理]의 모습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이이는 만 가지로 다른 이는 이 스스로 작용하여 만 가지로 다른 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틀을 타고 유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기의 작용함으로 혹은 기의 국한됨으로 인해 만 가지로 다른 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일(理一)이 기를 타면 그 나뉨이 만 가지로 다르다[分殊理]는 것입니다. 결국 윗글은 이이가 주자가 이의 용을 말한 것은 이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결국 기의 작용으로 인한 이의 드러난 모습, 즉 현실태를 말한 것뿐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이는 ‘『중용』의 비(費)는 이의 용이라 하고, 소이연은 이의 체요, 이의 은(隱)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의 용은 쓰임, 즉 이의 현실태를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이가 이가 작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아래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입니다.
이통기국이라는 것은 요컨대 본체 상에서 말해야 할 것이나 또한 본체를 떠나서 따로 그 유행을 구할 수 없습니다. […] 기가 근본이 하나인 것은 이가 통하기 때문이며 이가 만 가지로 나뉘는 것은 기가 국한하기 때문입니다. (「여성호원」, Ⅲ98)
이는 하나일 뿐으로서, 본래 치우치고 바르고, 통하고 막히고 맑고 흐리고 순수하고 잡스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가 타는 것인 기는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날리고 들리어서 잡스럽게 섞이고 고르지 못하다. 그래서 천지만물을 낳음에 바르기도 하고 치우치기도 하며,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며,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며, 순수하기도 하고 혹은 잡스럽기도 하다. 이는 비록 하나이나(理一) 이미 기를 타면 그 나뉨이 만 가지로 다르다(分殊). 그래서 천지에 있어서는 천지의 이가 되고 만물에 있어서는 만물의 이가 되며 사람에 있어서는 사람의 이가 된다. 그러므로 만물이 들쭉날쭉한 것은 기가 한 것이다.(「답성호원」)
2. 溫和慈愛者 情也 所以溫和慈愛者 理也 是乃仁也…理之未發也 渾然全具 則仁之體也 理之旣發也 此心溫和慈愛 而理亦寓焉 理之在溫和慈愛者 乃理之用也 非溫和慈愛 便是理也 理之渾然而不可名狀者。則所以然者也。理之發用而在於溫和慈愛者。則所當然者也(온화 자애한 것은 정情이고, 온화 자애한 소이는 리이니, 이것이 바로 仁이다. …리의 미발에 혼연히 온전한 것은 仁의 체이고, 리의 기발旣發에 이 마음이 온화 자애하며, 리도 역시 붙여 있는 것이다. 리가 온화 자애 속에 있는 것은 리의 용이지, 온화 자애가 곧 리라는 것이 아니다. 리가 혼연하여 이름 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며, 리가 발용되어 온화 자애 속에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윗글은 성발위정에 대한 설명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이는 이가 기 가운데 있은 뒤에야 본성이 된다고 말하며, 본성은 기질지성일 뿐이고 본연지성[理]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기질지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이가 성이 발하여 정 속에 리가 있는 것을 ‘리의 용’이라고 하는 것도 기틀[기]을 타고 유행한 ‘리의 용’이지 리의 독자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기의 작용으로 인한 이의 현실태를 리의 용이라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이가 이가 작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3. 問: “心之未發時,已發之理具焉 此亦謂之無極而太極乎?” 曰: “以未發爲太極之體,以已發爲太極之用可也”(묻습니다. 마음이 미발일 때 이발已發의 리를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무극이태극 無極而太極’에도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율곡 선생) 답하되, “미발은 태극의 체, 이발은 ‘태극의 용’이네.”)(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一 語錄[上])
마음의 미발·이발에 ‘이의 체용’을 말하고 있는 이 글에서 이발[이미 발한]이 ‘태극의 용’이라고 한 것도 기틀을 타고 유행한 ‘태극, 즉 이의 용’이지 이의 독자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기의 작용으로 인한 이의 현실태를 이의 용이라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이가 이가 작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4. 問: “敬該涵養省察 而義則專指省察耶?” 曰: “然” 問: “所以然者,理之體也; 所當然者,理之用也 至於氣之體用,亦可得聞耶?” 曰: “氣之體用,陰與陽是也” 曰: “陰靜爲體,而陽動爲用耶?” 曰: “是”[묻습니다. “경敬이 함양성찰을 아우르고 의義는 오직 성찰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답하되, “그렇다” 묻습니다. “소이연은 리의 체, 소당연은 리의 용입니다. 기의 체용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율곡선생) 답하되, “(소이연은 리의 체, 소당연은 리의 용이지만, 그것과 달리) 기의 체용은 음과 양이다.” 묻습니다. “음이 고요한 것은 체, 양이 움직이는 것은 용인가요?” “그렇다”](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一 語錄[上])
이이는 사물의 존재법칙에 해당하는 소이연을 이의 체, 사물들이 존재한 이후 가지게 되는 소당연을 이의 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의 용은 비(費: 쓰다)를 말하는 것으로 이의 용은 쓰임을 말합니다. 이이는 ‘『중용』의 비(費)는 이의 용이라 하고, 소이연은 이의 체요, 이의 은(隱)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이이는 소당연인 이의 용을 이의 독자적 작용이 아니라 비, 즉 쓰임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이가 이가 작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이의 용이 비’라는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이와 관련된 주자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중용』에서 '군자의 도는 비하나 은미하다.'라고 한 것에 대해 주자는 ‘비는 용의 넓음이고 은은 체가 은미한것 것이다. 이가 사물에 흩어져 있는 것이 소당연이니 아버지에 있어선 자(慈)이고, 아들에 있어서는 효이고, 임금에 있어서는 의이고, 신하에 있어서는 충이 되는 부류이다. 소위 비이며 용이다. 그 소이연이라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게 존재하는 것이니 그 체이다.’, ‘비는 도[이]의 용이요, 은은 도의 체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자에게 이의 용이라는 것은 이가 일용에 드러나는 것이어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의 체라는 것은 이가 그 일용사물의 내면에 은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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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7 11:09:54
제목[윤리와사상] 정답이 없습니다.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4
정답의견 문제오류
윤리와 사상
문제 4번) 노자와 관련하여 이의 말씀드립니다.
1. 노자는 무위를 행위하는 사람이므로 "반드시 ~해야 한다."의 당위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법령이 밝을수록 도적이 더 많이 생긴다." - 중국철학사, 풍우란 저, 157페이지
이와 같이 보여주기식 서술을 보여줍니다. 결코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제4번의 1번 선지 "도둑은 법령이 많아지고 엄격해질수록 줄어든다."와 같은 서술이 되어야 합니다.
위 인용한 것과 반대이므로(또는 옳지 않으므로) 이것이 정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선지 2, 3, 4, 5는 당위를 이야기 하므로 옳지 않은 문장이 되어 모두가 정답이 됩니다.(옳지 않으니까 정답이 됩니다.)
2번 선지 보겠습니다.
"백성은 생명을 중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노자에 따르면 삶과 죽음은 기의 모임과 흩어짐입니다.
"생명을 중시하고"라는 것은 "기의 모임(생명)은 중시"하고, 흩어짐(죽음)은 중시하지 않는다"로 해석됩니다. 어떻게 이런 선지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소박한 삶을 강조한 사상가는 너무도 많습니다.
묵가가 대표적입니다. 유가를 비판하며 절용에 힘쓸 것을 얘기했으니까요.
법가도 가능하지요. 부국강병을 얘기했고, 많은 세금을 충당키 위해 소박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2번 선지는 노자만의 사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당위의 표현 그 자체가 옳지 않은 선지가 됩니다.
3번 선지 보겠습니다.
"통치자는 무력으로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억지로 "~을 하지 않으므로" 이 선지는 노자의 보여주기식 서술이 맞습니다.
그러나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말것을 강조했던 사상가는 공자, 맹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것도 노자만의 사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문제 자체에서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즉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문제였습니다.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고 요구했었다면 저는 이의를 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 정답의 범주는 노자 사상만의 것만을 따져 그의 사상으로서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야 합니다.
4번 선지 보겠습니다.
"현자를 높이지 않아 사람들이 경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명한 이를 높이지 않음은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중히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 하지 않게 하고 욕심 낼 만한 것을 보여 주지 않으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히 하여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하게 만든다." - 중국철학사, 풍우란 저, 157페이지
인용한 구절은 선지와 내용이 비슷하나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는 초점이 현자를 높이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이 경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용한 구절은, 성인의 정치란 마음을 비우고, 채우고, 약하게 하고, 튼튼히 하는 것이지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지 않도록, 즉 "사람들이 경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식"의 강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유위가 되고, 작위가 됩니다. 이것은 노자 스스로가 자신의 도에 대해 역행하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번 선지도 옳지 않습니다.
5번 선지 보겠습니다.
"성인은 사람들의 마음은 비워 주고 욕망은 약하게 해준다."
"내가 무위하니 백성들이 저절로 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들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하니 백성들이 저절로 순박해진다." - 중국철학사, 풍우란 저, 158페이지
"약하게 해주려고" 성인이 또는 노자가 무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위하니 저절로 감화되고, 바르게 되고, 무지무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위가 아니라는 것이죠. "백성들의 마음을 비워주고, 욕망을 약하게 해주려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무위가 아니라 작위가 됩니다.
그러니 5번 선지도 옳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보고 있자면 노자의 도가 퇴색될까 안타까움이 큽니다.
왜 이런 문제를 냈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제시문의 명령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난 척 하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 "힘을 자랑하지 말라"
이게 무위의 도이며, 정치입니까?
제자백가 중에 이렇게 "강력하게 명령을 내리면서 무위하라"고 하는 폭군같은 학파가 또 있습니까?
유가의 작위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했던 노자가 스스로 작위를 행한 것이 됩니다.
보면 볼수록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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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쓴이등록일2018-09-07 13:17:16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선지 오류(물타기하지 마세요)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이전 글에서, 오류 지적하는 글을 올리면 듣도 보도 못한 무지렁이들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고 했는데, 그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무지렁이들은 아무래도 평가원 관계자의 지령을 받았거나 알아서 충성하는 분자겠죠?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평가원에 이권이 많이 걸려 있거든요.
왜 이들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는 것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문제된 윤리와 사상 12번은 이황(갑)과 이이(을) 중 한 사람이라도 긍정하는 질문을 고르라는 것입니다. 문제된 건 ㄴ 선지입니다. ㄴ 선지를 써보겠습니다.
ㄴ. 이(理)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여기서 ‘리의 작용’은 ‘리지용(理之用)’의 번역입니다. 선지는 두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리는 용(작용)이 없는가?’, ‘리는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여기서 후자는 모든 주자학자들이 인정하고 있고, 교육과정에서도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단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리에 用이 있다[理之用]’는 것은 이미 주자가 말했기 때문에, 주자 학문의 계승을 표방하는 주자학자 이황, 이이 모두 ‘리에 용이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문제는 그 ‘리지용(理之用)’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문제된 ㄴ 선지는 이 ‘리지용’에 대한 해석이 갑(이황), 을(이이) 간에 다른지 어떤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리지용’을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만 묻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리의 체용’ 문제는 교육과정 이탈입니다. 교육과정 이탈이지만, 평가원에서는 이것을 ‘이황’을 제시할 때 출제했습니다. 이황의 ‘리발(理發)’을 응용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사실 이황이 ‘리발’을 설명하기 위해 ‘리지용’ 이론을 동원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평가원 기출(2016학년도 9평 14번 ㄷ 선지)을 살펴봅시다. 발문은 갑(이황)은 긍정, 을(이이)은 부정하는 질문을 고르는 것입니다.
ㄷ. 측은‧수오‧사양‧시비의 감정은 이(理)의 작용으로 생기는가?
정(情:4단 7정)을 ‘리의 용(작용)’으로 보는 것은 이미 주자가 한 말이기 때문에 이황과 이이 모두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溫和慈愛者 情也 所以溫和慈愛者 理也 是乃仁也…理之在溫和慈愛者 乃理之用也…理之發用而在於溫和慈愛者 則所當然者也(온화 자애한 것은 정情이고, 온화 자애한 소이는 리이니, 이것이 바로 仁이다. … 리가 온화 자애[情] 속에 있는 것은 리의 용(用)이지, 온화 자애가 곧 리라는 것이 아니다. 리가 혼연하여 이름 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며, 리가 발용되어 온화 자애[情] 속에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그러므로 문제된 저 선지에 대해 이황뿐만 아니라 이이도 동의하게 됩니다. ‘온화 자애’는 사단이 아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온화 자애’도 당연히 사단입니다. ‘리의 작용[用]’으로 온화 자애 같은 감정(사단)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평가원에서는 이 선지에 대해 이황은 긍정하지만, 이이는 부정한다고 봐서 정답으로 발표했습니다. 이이는 ‘리의 작용[理之用]’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줄 알았기 때문에 정답을 그렇게 발표한 겁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현재 윤리교육과의 학문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저는, 평가원 윤리 문제의 오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정의의 횃불을 들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선지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이 선지의 문제점을 나중에 인지하게 됐습니다.). 이 선지가 아무 문제 제기 없이 지나갔기 때문에, 학문적 역량이 부족한 윤리교육과 사람들(여기에는 윤리교육과 출신은 아니지만 학원가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인강강사들도 포함됩니다.)은 ‘리의 작용[理之用]’은 오직 이황만 얘기했는 줄 알게 됐고 그런 잘못된 지식 상태로 현재까지 오게 된 겁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이번에 문제된 선지도, 평가원 출제자들, 검토자들은 물론이고, 윤리교육과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오직 홀로, 저만 예외입니다.)이 ‘리의 작용[理之用]’은 오직 이황만 얘기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제시한 거예요.
이 선지가 오류라는 글을 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예전에도 늘 그래 왔듯이, 물타기를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갑자기 툭 튀어 나옵니다. 두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봅시다.
첫 번째 갑툭튀 A씨 글 :
[이의게시판에 들어와서 내용을 보면 참 열심히 공부하시는 윤리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런 노력들과 공부 속에 한국 윤리가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해봅니다^^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1. 이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 이이가 긍정의 대답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서울대학교 이이[율곡전서]에 pp.66-67에 보면 이이가 이황의 ‘이가 움직인다’[理動]이의 작용(用)에 반박하면서 이황이 말하는 이의 작용이란 이가 움직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 가지로 다른(萬殊)’가 이의 작용으로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반박할 때 이황이 쓴 이의 작용(用)을 끌어들여 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상대방의 용어를 반박하기 위해 끌어들여온 개념을 이이가 주장한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긴 문장의 맥락을 무시하고 한 문장만을 들어낸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이가 '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의 작용은 없다. 굳이 이황의 말을 빌어온다면 만수(萬殊)의 리 즉,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이황이 이를 이의 용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원문과 해석을 올립니다. 긴 내용이라 죄송합니다.]
이분은 내가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이이 주장의 일부만을 인용했다고 하는데, 그거야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얘기했다는 사실만 증거로 제시하면 되니까 전체 문장을 다 인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분 주장에 의하면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얘기한 것은 이황이 ‘리의 작용’을 얘기했기 때문에 이이가 이황의 용어[리의 작용]를 사용하여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얘기한 것은 이황이 ‘리의 작용’을 언급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희가 ‘리의 작용’을 얘기했기 때문에 주자학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당연히 그것을 언급한 것이라는 증거를 부연설명을 통해 제시했습니다. 이이는 이황이 주희가 얘기한 ‘리의 작용’ 개념을 자신의 ‘리발’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의 문제점도 지적하지만, 이황과 무관하게 주희가 얘기한 ‘리의 작용[理之用]’ 개념을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전의 부연설명을 통해 제가 충분히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이어지는 A씨의 글 :
[(e1.3.2.1) 이황은 ‘이는 움직인다’(理動)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이의 작용(用)’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에 운동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이가 상징하는 도덕적 이념이 스스로 ‘움직여’ 현실 세계에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도덕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기를 희구한다. 이는 현상에 드러나는 이의 자기 전개 양상을 휘황한 인드라망의 이미지로 포착하는 이일분수설의 발상을 적극적으로 밀고나간 것이다.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 같은 이황의 이동설에 대한 강력한 반명제가 된다. 이와 기, 본체와 현상을 엄격하게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이통기국의 구도에서는, ‘이가 움직여’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1.3.2.2) 이 점에서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념에 대한 현실의 대등한 고려를 청하는 것으로서, 이황의 세계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강한 현실 지향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은 이이가 제자인 안천서(安天瑞)의 질문에 답한 글에 잘 나타난다. 안천서는 이황의 이동설과 비슷하게, 이에 움직임이 있다는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이는 안천서를 이통기국설의 견지에서 반박한다.]
A씨가 어떤 책에서 인용했다는 위 글을 잘 보세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이이의 이통기국설은 이황의 ‘리발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 ‘리의 작용[理之用]’을 이이가 부정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A씨는 과연 인용된 위 글의 취지를 몰라서 마치 이 책의 저자가 이이가 ‘이의 작용’ 개념을 부정했다고 말한 것처럼 쇼를 한 것일까요?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평가원 윤리 문제의 오류 지적을 물타기 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인데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알았는데도 왜 저랬을까요? 어차피 물타기가 목적이니까, 팩트는 어찌 됐건 상관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주 길게 인용하고 있죠. 누가 저렇게 길게 인용된 글을 하나하나 읽겠습니까? 저도 안 읽었다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길어서도 안 읽고, 몰라서도 안 읽는 사람들은 이이가 ‘리의 작용’을 언급했는지 여부가 ‘해석의 문제’인 것으로 오해할 겁니다. 그렇게 오해하면 A씨와 평가원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강력한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인강강사들입니다. 이들 역시 학생들에게 ‘리의 작용’은 오직 이황의 주장일 뿐이라고 가르쳤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오류로 드러나면 큰일 나는 거죠. 이 사람들은 갖은 수법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문제된 선지가 오류가 아니라거나 최소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이들 인강강사들은 무엇이 오류인지 모르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나중에 오류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평가원 입장대로’ 가르치느라고 그랬다고 변명할 사람들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오류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이것은 오류이지만, 평가원 입장대로 해야 한다’고 말을 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오류라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강의한다는 게, 있을 수 있나요? 나는 3년 전 정의의 횃불을 들었을 때, 평가원과 인강강사들이 이런 식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꿈에라도 몰랐습니다.
A씨는 더 길게 글을 인용하고 있지만, 무의미한 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A씨를 넌지시 훈계하는 글을 올리자, 이번에는 두 번째 갑툭튀 B가 등장합니다. 갑툭튀 B는 제가 올린 이이에 관한 글과 갑툭튀 A씨의 글을 그대로 복붙하고는 말미에 다음 말만 덧붙여 댑니다.
“결국 윗글은 이이가 주자가 이의 용을 말한 것은 이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갑툭튀 B의 주장은, 이이가 ‘리의 용[작용]’을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리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황은 리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이지만 이이는 그렇지 않으니 문제된 선지는 오류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적 작용’은 또 뭘 말하는 것일까요? 문제된 선지를 다시 써 봅시다.
ㄴ. 이(理)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여기서는 ‘리의 작용[用]’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만 묻고 있을 뿐, 리가 독자적 작용을 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묻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독자적 작용’ 탓일까요? B는 이것을 몰랐을까요? 알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갑툭튀 A처럼, 어차피 팩트는 애초에 관심이 없고 오직 물타기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겁니다. 더욱이 ‘독자적 작용’이라는, 선지에서는 묻고 있지도 않은 그 용어에 대해서는, 개념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황은 리의 ‘독자적 작용’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일까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리의 ‘독자적 작용’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황이 ‘리발기수’를 얘기했는데, 이것은 리의 독자적 작용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따질 이유가 전혀 없죠. 선지에서 그것을 묻고 있지도 않으니까요. 이렇게 선지에서 묻고 있지도 않은 개념을 들고 나와서 아주 길게 글을 씁니다(그것도 내가 쓴 글을 그대로 복붙해서 말입니다.). 어차피 그런 글을 누가 읽겠어요? 그리고 읽어 주길 원하지도 않을 겁니다. 읽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논란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게 목적일 뿐이니까요.
이런 짓 좀 하지 맙시다. 물타기를 하려면, 좀 체급이 되는 사람을 등장시킵시다. 물론 체급이 되는 누가 이런 더러운 물타기 작업에 동원되겠습니까? 학문적 양심상 절대로 그런 짓은 못하리라고 봅니다. 아무리 평가원과 관계된 이권에 눈이 멀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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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7 13:24:57
제목윤리와 사상 6번 ㄹ선지, 탈교과 출제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6
정답의견 기타
윤리와 사상 6번 문제 "ㄹ.선지" 탈교과 출제
"ㄹ. 갑, 을 : 예는 인간의 도덕적 삶에 필수적인 사회 규범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맹자의 예에 대해 어느 교과서에서도 "사회 규범"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은 각 교과서에서 맹자의 "예"가 언급된 부분만 추려 인용한 내용입니다.
즉, 사람에게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네 가지 마음의 단서(사단)가 있으며, 이것이 각각 인의예지를 실현할 수 있는 실마리라고 하였다. - 윤리와 사상 교과서 (씨마스, 박찬구 외)
네 가지 마음, 즉 사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사단을 잘 함양하고 확충한다면 누구나 인, 의, 예, 지의 사덕을 완성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 윤리와 사상 교과서 (교학사, 황인표 외)
인간은 이를 잘 키워서 인의예지를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욕심을 줄이고 선한 본심을 잘 보존하여 선한 본성을 잘 길러서(존심양성) 사단을 확충할 것을 강조한다. - 윤리와 사상 교과서 (천재, 변순용 외)
그래서 맹자는 수양을 통해 사단을 확충할 때 인의예지라는 사덕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 (미래엔, 정창우 외)
그는 인간이라면누구에게나 사단이 있으므로, 이를 자각하고 확충하여 인의예지의 네 가지 덕을 완성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 윤리와 사상 교과서 (비상교육, 류지한 외)
위 교과서는 교육부 검정 2018.9.14일자 최근 교과서의 내용입니다. 새 교육과정 이전의 교과서에서도 상황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맹자의 "예"에 대한 관점은 선천적으로 내재한 덕의 하나로 보았지, 이를 "필수적인 사회규범"이라고 설명한 구절은 어느 교과서에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음은 2019학년도 수능특강과 수능완성에 나와 있는 "맹자의 예"와 관련된 문장입니다.
수능특강
공자, 맹자 : 인과 "예"로 다스리는 덕치를 통해 바람직한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함 (9페이지)
수능완성
공자, 맹자 : "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덕치를 통해 바람직한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함 (5페이지)
수능특강에 비슷한 구문이 나옵니다. "인과 예"로 다스리는 덕치가 나옵니다. 그나마 수능완성에서는 "예"를 뺐습니다. 교과서 상에서 학생들은 예를 배우면서 이 내용을 "천성적으로 내부에 주어진 덕을 확충함으로써 바람직한 국가가 형성될 것"이라고 유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내부의 덕으로 보지 "사회 규범"으로 배우지 않았고 또 어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기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가 사회규범인 것은 전공서적을 봐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맹자가 예의 실질을 인과 의를 "절도 있게 수식하는 것"(이루상27)이라고 했을 때, 예는 인과 의의 마음이 문화적인 표현 방식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제후의 예"(등문공상2)라든지, 결혼을 성사시키기까지의 예(등문공하2), "모든 몸가짐이 예에 맞는다"(진심하33)라고 얘기할 때의 예는 바로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행위방식을 의미한다. 『맹자』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여기서도 "사회 규범"이라는 표현 보다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행위 방식" 정도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책에 보면 "예라는 유가적 규범 역시 인간의 본성과 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예 역시 인간 본성의 하나라고 주장한 것 같다."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를 굳이 사회 규범이라 표현하지 않고 "유가적 규범"이라 한 것은 맹자 이전에 통용되던 유가 전통의 행위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제가 여러 책을 참고하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과서 범위를 넘어선 것은 출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달리 탈교과 출제가 아닙니다.
전공자로서는 상식인 내용일 수는 있어도 분명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넘어선 내용입니다.
제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책 다시 보실 듯 합니다.
그런 수고라도 끼쳐드려야 다음번엔 생각해서 출제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이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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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7 15:19:48
제목윤리와 사상 8번의 4번 잘못된 불교 선지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8
정답의견 문제오류
윤리와 사상 8번의 4번, 잘못된 불교 선지
을은 혜능이며, 혜능의 입장으로 옳은 선지로서 다음 4번 선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4번. 을 : 선의 수행을 통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위 선지는 옳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교과서입니다.
"부처는 자신의 본성 속에서 이루어지니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자신의 본성이 미혹되면 중생이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다.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박에 깨치고(돈오) 단박에 닦는 것(돈수)이니, 점진적 단계란 없다."
- 혜능 육조단경(교과서 윤리와 사상, 비상교육, 류지한 외)
혜능의 돈오돈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돈오돈수에 비추어 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선지 내용 중 "선의 수행"을 깨닫기 이전의 선 수행으로 보자.
육조단경의 내용에 비추어 보았을 때 4번의 선지가 옳은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깨닫기 위한 선수행"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조단경에서는 돈수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점수 즉, 점진적 수행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낱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행위가 아닙니다. 깨달음은 "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다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가라앉힌다는 표현을 할 때는 이럴 때 씁니다.
식혜를 예로 들면, 식혜는 가만히 놔 두면 무거운 알맹이는 아래로 가라앉고, 위쪽엔 맑은 물이 고입니다. 골고루 섞어 먹기 위해 흔들었을 땐 전체가 탁해지고 알맹이도 고루 섞입니다. 이건 깨달음이 아닙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본래의 청정한 맑은 물이 되려면(내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달으려면) 알맹이를 가라앉히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식혜를 담는 밑둥을 잘라내어 물과 알맹이가 완전히 빠져야 깨달음이 됩니다. 혜능의 후배 의현은 "불타를 만나면 불타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풍우란, 중국철학사, 375페이지)라고 말합니다. 내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번잡한 덩어리들(식혜 알맹이, 무명)을 가라앉히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무명을 완전히 깨버려야 합니다. 식혜 단지를 깨부수어야 하는 것처럼요. 그렇게 하면 모든 내용물이 쏟아지고 텅 비어있을 겁니다. 그것은 마치 내 마음은 본래 무일물인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깨달음을 "가라앉힌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잘못된 선지를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2. 선지 내용 중 "선의 수행"을 깨달은 이후의 선 수행으로 보자.
저 선지가 맞다는 것을 가정해 다르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번엔 4번 선지의 "선의 수행"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의 선 수행(점수)"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잘못된 선지인 것은 혜능은 점수가 아닌 돈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도 성립되질 않습니다. 깨달음 이후의 선 수행은 점수입니다. 점수는 수행에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점수의 과정은 아무리 길어도 다만 준비작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불하려면, 이 수양은 절벽을 건너뛰는 것과 같은 돈오를 통하여 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뜀뛰기가 있어야 성불이 가능하다." - 풍우란, 중국철학사(372페이지)
"돈오를 얻었다는 것은 그 이상의 어떠한 얻음도 없다." - 풍우란, 중국철학사(373페이지)
점수가 필요없다고 잘라서 말합니다.
이번엔 5종 교과서를 살펴 보겠습니다.
1.
혜능은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지식 공부나 점지적 수행을 거치지 않고도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단박에 깨치고 마음을 단박에 닦을 수 있다는 돈도돈수를 주장하였다. - 윤리와 사상, 비상교육
비상교육은 위 내용(돈수) 외에 선의 수행과 관련된 언급이 없습니다. 4번 선지의 옮음 유무를 따질 수 없습니다.
2.
이처럼 선종에서는 불성에 대한 직관을 중시하였기에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 즉 선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좌선을 주요한 수행 방법으로 하면서 화두를 통해 마음의 실상을 깨닫는 것을 중시하였다. - 윤리와 사상, 미래엔
미래엔은 선의 수행으로 좌선을 얘기합니다. 좌선을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조와 회양선사의 벽돌갈기 일화가 생각납니다. 벽돌을 갈아봐야(참선을 해봐야) 거울이 될 수 없다(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오경웅, 선의 황금시대) 참선의 방법은 선가의 방식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혜능이 강조한 수행 방법도 아닙니다. 선가의 방식이 곧 혜능의 방식이 아니므로 역시 4번 선지는 틀렸습니다.
3.
또, 혜능은 대상에 집중하는 고요한 명상만을 수행으로 보지 않고, 일상의 모든 행위 속에서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는 마음을 체험할 것을 주장한다. - 윤리와 사상, 천재교과서
천재교과서가 내용을 잘 정리하였습니다. 선의 수행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체험이 곧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4번 선지는 틀렸습니다.
4.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야말로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라고 본다. 이 점에서 정혜불이, 즉 선정과 지혜는 둘이 아니다. - 윤리와 사상, 교학사
교학사는 수행으로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얘기했습니다. 마음 가라앉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4번 선지는 이 교과서에서도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5.
중국에서 선종이 큰 세력을 얻게 된 것은 6조 혜능부터이다. 선종은 불교의 한 수행법인 선정(참선)을 기초로 하여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로 성장하였다. - 씨마스
씨마스는 이 외에 헤능의 선 수행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4번 선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질 않습니다.
교과서를 예로 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교과서 내용을 확인하여 없으면 4번 선지는 탈교과 출제요,
있으면 그 내용, 즉 선의 수행이 마음 가라앉히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혜능의 수행방법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4번 선지는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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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쓴이등록일2018-09-07 19:51:25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 선지에 대한 답변에 대한 반대 의견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ㄴ 선지 이(理)는 작용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가?
에 여러 오류 지적 의견에 대해 평가원측 두 분께서 답변을 하신 내용을 읽어보았습니다.
고등학생이나 수험생도 보는 게시판이어서 쉬운 용어로 설명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일단, 제가 출제자님이나 평가원에 드린 질문의 요지는 '작용'의 의미가 어떤 뜻으로 쓰였느냐였는데요.
원문을 길게 쓰셔서... 거기다가 주희와 이이 글이 혼재되어 있어서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의 의미가 이황이 말한 리의 작용을 반대한 것이므로 작용이 없다는 ㄴ 이이의 지문은 오류가 아니라
맞는 내용이라는 설명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자어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이가 반대했던 것은 이황의 '리자도', 즉 리발의 의미였습니다.
이이는 주희가 말한 리의 무작위, 무발용의 특성을 빌려와서 이황을 비판한 것이 문맥의 흐름인데, 역으로 흐름을 해석하고 설명하시는군요.
ㄴ의 선지를 출제하려는 의도였으면, 이이가 반대한 이황이 사용한 이의 의미(이발, 작위, 발용, 리자도)가 정확하게 묘사되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작용'이라는 단어가 이발의 반대 개념이다. 이황의 이발에 이이는 반대하였으므로 '이는 작용이 없다.'고 출제하고 이것을 오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이이는 이황이 말한 이의 자발적인 운동성에 반대하였을 뿐, 세상 만물에 이가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작용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만물에 리가 깃들 수 있습니까? 이이가 말한 이기지묘, 기발이승은 주희가 말한 이의 특징과 성질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가원에서는 이것이 오류가 아니라고 하니 매우 우려스럽지만, 학생들의 미래가 걸린 수능에서는 더 정확한 개념을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12]
글쓴이등록일2018-09-08 09:54:45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선택지 이상 없습니다.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3
정답의견 반대의견
먼저 앞의 글에서 ‘이의 용’을 '이발'을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의 용은 이이, 이황 모두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이황도 ‘이치[理]에 감정과 의지, 그리고 조작이 없다는 것은 그 본체가 그렇다는 것일 뿐, 그 쓰임[用]의 차원에서 보면 이치는 그 만나는 곳에 따라 발현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다.’라고 언급하고 있죠. 이의 용, 즉 이의 쓰임을 이황과 이이 모두 인정하면서도, 이의 용을 이황은 이의 작용함으로, 즉 이의 유위(有爲)로 해석하여 이발을 주장하는 반면, 이이는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 이발을 부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이가 말하는 이의 용은 이의 발용, 이의 발현(드러남), 이의 현실태를 의미하는바, 이가 작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理)의 독자적 작용이 없다고 표현한 것은 글의 문맥상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봅니다. 그 의미는 기 없이 이가 단독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반드시 기틀[기]을 타고 유행한다는 의미임을 글을 조금만 성의 있게 읽어보아도 파악이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이 이황(이기불상리를 인정하고 있는 이황이 이의 독자적 작용을 말하고 있지 않음은 낮은 수준의 지식입니다.)은 이의 독자적 작용을 말한 것이지만 이이는 그렇지 않으니 문제된 답지는 오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음도 글을 조금만 성의 있게 읽어보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원전 근거를 제시하며 설명한 것은 그 원전 근거가 ‘이가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자 한 의도였다는 것도 파악이 가능할 것입니다.
원전 근거로 제시했던 부분을 재인용하겠습니다.
온화 자애한 것은 정情이고, 온화 자애한 소이는 리이니, 이것이 바로 仁이다. … 리가 온화 자애[情] 속에 있는 것은 리의 용(用)이지, 온화 자애가 곧 리라는 것이 아니다. 리가 혼연하여 이름 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며, 리가 발용되어 온화 자애[情] 속에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栗谷全書”, 券12, ‘答安應休’)
윗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이가 ‘사단을 이의 용’이라고 한 것은 ‘사단을 이가 발용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가 발용되었다는 것은 이가 기틀을 타고 드러났다는 의미, 즉 이가 기틀을 타고 발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선한 성, 즉 이가 발현된 결과라는 취지는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 윤리와 사상 11번 문제에서 답지 5번-‘갑(이황)과 을(이이)은 모두 본성이 마음에서 발현된 결과를 사단이라고 한다.’-에도 이미 담겨 있습니다. 이이가 말한 ‘이의 용’, ‘이의 발용’의 의미는 이가 단독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즉 독자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이가 기틀을 타고 드러난 즉, ‘이의 발현’을 말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글에서도 여러 차례 밝혔듯이 이의 용은 기 없는 이의 단독 작용, 즉 이의 독자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이이가 이의 용을 말한 것은 기의 작용으로 인한 이의 현실태를 리의 용이라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는 주자의 이의 용에 대한 견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의 용이라는 것은 이가 기틀을 타고 일용에 드러나는 것이어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이의 용은 이의 쓰임[用], 이의 현실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이는 이통기국의 구도에서 이의 본래성과 현실태 사이의 차이를 ‘본연이란 것은 이일(理一)이요, 유행이란 것은 분수(分殊)이다.(「답성호원」)’로 설명합니다. 이의 체는 이일, 즉 이의 본래성이고, 이의 용은 분수, 즉 이의 현실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이이가 말하는 이의 용은 이의 발용, 이의 발현(드러남), 이의 현실태를 의미하는바, 이가 작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13]
글쓴이등록일2018-09-08 12:18:53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선지 에 대한 마지막 의견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반대의견
답변을 남겨주신 이보람님에 대한 마지막 의견입니다.
제가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어 답변하신 내용에서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 이보람님 답변 내용 중 -
이의 용, 즉 이의 쓰임을 이황과 이이 모두 인정하면서도, 이의 용을 이황은 이의 작용함으로, 즉 이의 유위(有爲)로 해석하여 이발을 주장하는 반면, 이이는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 이발을 부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이가 말하는 이의 용은 이의 발용, 이의 발현(드러남), 이의 현실태를 의미하는바, 이가 작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이가 말한 ‘이의 용’, ‘이의 발용’의 의미는 이가 단독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즉 독자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이가 기틀을 타고 드러난 즉, ‘이의 발현’을 말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글에서도 여러 차례 밝혔듯이 이의 용은 기 없는 이의 단독 작용, 즉 이의 독자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이이가 이의 용을 말한 것은 기의 작용으로 인한 이의 현실태를 리의 용이라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먼저, 서양의 개념으로 이기론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나 교육적으로나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해주신 답변도 다 성의 있게 읽어보았구요.
저는 용어 차이에 의한 의견 차이라고 결론 내리려고 합니다.
작용이라는 뜻은 국어 사전에 '어떤 현상을 일으키거나 영향을 미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작용이라는 뜻은 '어떠한 물리적 원인이나 대상이 다른 대상이나 대상의 원인에 기여하다'라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스스로 발할 수 없을 뿐, 기의 움직임에 올라타서 대상의 원인에 기여하며, 영향을 미치는 만수의 용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출제 제시문에 어떤 문맥상의 흐름으로 이황은 스스로 작용하는 리를 설명하는 흐름으로 성의 있게 읽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지 모르나
보기의 지문만을 보면 이는 어떠한 물리적 원인이나 대상의 원인에 기여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반적인 작용의 뜻으로 해석할 오해가
있다는 뜻으로 의견을 개진한 것이었으며, 최초의 의견 내용도 용어 해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황의 원문에 또는 이이의 원전에 무작용(無作用)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작용이 없다'는 지문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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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쓴이등록일2018-09-08 14:24:43
제목윤리와 사상 12번 ㄴ 선지 오류(이보람 씨!)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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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등록일2018-09-08 14:51:33
제목선지 ㄴ 관련 의견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기타
아래에 올라온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간단한 말씀만 드리려 합니다.
문항의 발문에 의하면 선지에 쓰인 개념어를 판단할 적에 갑과 을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즉 선지 ㄴ에서 문제되는 "작용"이라는 표현을 판단할 적에, 문항의 발문 때문에라도 최소한 그 번역어('작용')에 해당하는 원문은 이황의 원문이든 이이의 원문이든 글자가 동일해야 됩니다. 해당 원어를 가지고 그 실제 내용이 드러남이다 뭐다 하면서 '해석'을 내놓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고, 일단 문헌상 원어가 공통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공통분모를 가지고 양 사상가를 비교하는 구도가 성립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래의 어떤 분 말씀에 의하면, 해당 선지 ㄴ에서는 이의 '용'이라고 하지 않고 '작용'이라고 했는데 율곡은 '이의 用'만 이야기했을 뿐 '이의 작용'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율곡의 어록 중 理의 '作用'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지 않아서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해당 선지를 이황에게 판단할 적에도 일관되어야 합니다. 즉 이황의 어록 중 이의 '作用'을 긍정한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 ㄴ이 이황에게는 부정된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황 역시 이의 '作用'을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퇴계전서』 15권의 모든 글자를 뒤져본 결과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황에게 있어서 '이의 작용'을 논하는 것은 이황의 원문에서 이의 '用'이라는 원어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공통분모를 가지고 비교해야 하는 이런 선지 판단에 있어서, 동일한 번역어에 대해서는 동일한 원어를 해당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 ㄴ의 '작용'이라는 번역어에 해당하는 원어가 이황에게 있어서 '用'이므로, 이이에게 있어서도 그 번역어에 해당하는 원어가 '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이가 이의 '用'만 긍정했더라도 그 한자가 무슨 내용으로 해석이 되든 상관없이 이이에게도 부합하는 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항은 정답이 없습니다. 선지 ㄴ은 적어도 원전을 존중한다면 갑과 을 모두 부정의 대답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6]
글쓴이등록일2018-09-08 15:34:39
제목윤사 4번 오류, 6번, 8번, 11번 교육과정 이탈 및 오류
과목선택 윤리와사상
문항번호 8
정답의견 기타
아래 이호찬이라는 분이 아주 적절한 지적을 하고 계신데, 훌륭하십니다. 윤리 교사이신가요? 윤리 교사이시라면 참 흐뭇합니다.
지금 학생들이 주로 틀린 문항이 6번(공자, 맹자 비교하는 문제)의 ㄹ 선지[ㄹ. 갑, 을: 예(禮)는 인간의 도덕적 삶에 필수적인 사회 규범이다.(여기서 갑은 공자, 을은 맹자)], 11번 문제(흄, 벤담 비교하는 문제)의 ㄹ 선지[ㄹ. 갑, 을 : 승인과 부인의 감정 자체가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있다.(여기서 갑은 흄, 을은 벤담)]입니다.
이 두 문항의 공통점은 ‘교육과정 이탈 선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가 禮의 사회규범성을 인정하는지 여부’, ‘벤담이 승인과 부인의 감정을 도덕 원리로 인정하는지 여부’는 교육과정 이탈입니다. 우리 교육과정에서 어떤 사상가가 말하지 않은 것이 선지로 나오면 수험생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 나왔으니 틀렸다고 판단해야 할까요, 아니면 맞는다고 판단해야 할까요?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6번 같은 경우, 맹자가 禮의 사회규범성을 인정했는지에 대해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맹자 역시 인정했다는 것이 정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11번 같은 경우, 벤담이 승인과 부인의 감정을 도덕 원리로 인정했는지에 대해 우리 교과서에 언급이 없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선지에서는 벤담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과정을 함부로 이탈해야만 고난도 문항을 만들 수 있는 건가요? 교육과정 안에서는 만들 수 없습니까?
이호찬 님이 지적한 4번(노자 문제), 8번(원효, 지눌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4번은 이호찬 님이 아주 적절하게 지적을 하셨으니 부연할 게 없습니다. 8번에 조금 부연하겠습니다.
② 갑 : 참된 지혜에 이르기 위해 유와 무의 실상(實相)을 깨달아야 한다.(갑은 원효)
④ 을 : 선(禪)의 수행을 통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을은 지눌)
②번에서 ‘유와 무의 실상(實相)’이라는 건 뭔가요? 이걸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나요? 이렇게 내면, 교과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학생이라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고 보시나요? ④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호찬 님이 잘 지적해주시기도 했지만, 도대체 ‘어지러운 마음’이 뭘 말하는 겁니까? 그냥 안 좋은 말이니까 그것을 ‘가라앉히는 것’은 옳은 건가요? 그렇다면 ‘가라앉히는 것’은 또 뭔가요? 이렇게 비학문적인 용어가 어떻게 평가원 시험에 사용될 수 있습니까? 추측건대, ‘定’을 그렇게 풀이한 것 같은데, ‘定’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까?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좌선’은 될 수 있어도, 정혜쌍수의 그 ‘定’일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定’이라면, 지눌이 ‘定은 체, 혜는 용’이라고 한 것이 설명이 안 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마음의 본체’라는 건가요?
아마도 출제자도 자신이 없었을 겁니다. 제대로 이해가 안 된 상태였겠죠. 그런 경우 방법이 있죠. 히쭈구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겁니다. 나중에 그 의미가 뭐냐고 물으면, 상황에 따라 답변을 하려는 의도입니다. 논문을 쓸 때, 히쭈구리한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논문을 쓰는 당사자가 자신이 쓰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문항 설명해주면서 학생들에게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②번은 교육과정 이탈인 건 너희도 알 거다. ④번은 그냥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인 거다”
정말 너무 심합니다. 이거 무슨 학교 내신문제만도 문제가 이렇게 평가원 시험에서 양산될 수 있습니까?
교육과정 준수하세요. 정말 왜 이러세요? 평가원의 윤리 책임자 분? 어떻게 하려고요? 님 때문에 윤리교육이 이거 뭡니까? 말이 안 나옵니다.
목록
[생윤]
[1]
글쓴이등록일2018-09-05 21:17:41
제목생활과 윤리 12번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레건이 왜 인간이 동물보다 본래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왜 B에 들어갈 수 없나요??
[2]
글쓴이등록일2018-09-05 21:24:12
제목생활과 윤리 5번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5
정답의견 반대의견
요나스의 입장은 현세대가 자연과 미래세대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 이라는건알겠는데 그게 어떻게 부모가 자녀에 대해 책임지는것과 같을수있죠? 이익을바라는 부모도 있고 이윤이 없다면 책임지지않으려는 부모도있습니다 논란이 많을수있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3]
글쓴이등록일2018-09-05 21:32:27
제목생활과 윤리 12번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2
정답의견 문제오류
레건은 쾌고감수능력과 더불어 이성을 가진동물들을 삶의 주체로 보는게아닌가요? 비이성적존재는 여기서 테일러에게만 해당하는게 아닌가요?
[4]
글쓴이등록일2018-09-05 23:36:37
제목생활과 윤리 18번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반대의견
평화조약에 의해 당장의 전쟁은 종식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구실을 찾아내는) 전쟁상태가 종실될 수는 없다.
라고 저술되어있습니다.
[5]
글쓴이등록일2018-09-06 01:20:37
제목18번 3번선지 이의신청합니다.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반대의견
칸트의 영구평화론 책에 따르면
-평화연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연맹이 있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이 연맹은 평화조약과는 구별될 것인데,
그것은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고면,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라고 저술되어있습니다.
책에 따른다면 18번 3번 선지에서
평화조약이랑 국가 간 적대 행위의 일시적 중지에 불과하다. 는 옳은 표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의 신청합니다.
[6]
글쓴이등록일2018-09-06 01:20:37
제목18번 3번선지 이의신청합니다.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반대의견
칸트의 영구평화론 책에 따르면
-평화연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연맹이 있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이 연맹은 평화조약과는 구별될 것인데,
그것은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고면,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라고 저술되어있습니다.
책에 따른다면 18번 3번 선지에서
평화조약이랑 국가 간 적대 행위의 일시적 중지에 불과하다. 는 옳은 표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의 신청합니다.
[7]
글쓴이등록일2018-09-06 09:22:48
제목생활과 윤리 18번 3번선지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반대의견
칸트의 영구평화론 책에 의하면 평화조약을 평화 연맹과구별하여 평화조약은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평화 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는 것이다 라고 써있습니다 평화조약이라는 말 앞에 항구적인 또는 모든 이라는 수식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 조약만 서술했을 때는 답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3번도 옳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8]
글쓴이등록일2018-09-06 13:14:43
제목생활과 윤리 18번 문제 복수 정답 요청합니다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문제오류
이의제기의 근거로 활용될 저서는 "영원한 평화" (아카넷, 백종현 옮김, 2013년작)입니다
1)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조약'은 Friedensbund이 원서 표현입니다.
이는 "영원한 평화" 128페이지 12번째 줄에서 "평화연맹"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즉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 조약' (2018학년도 6월 평가원 모의고사 제시문 중 "항구적 평화조약")은 "평화연맹"으로 본 것입니다.
2) "영원한 평화" 127페이지 (두번째 확정조항에 대한 언급)에서 17번째줄에
"평화조약에 의해 당장의 전쟁은 종식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전쟁상태가 종식될 수는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평화조약은 원서에서 "Friredensvertrag"입니다.
3) "영원한 평화" 128페이지 (두번째 확정조항에 대한 언급)에서 12번째줄에
"평화연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연맹이 있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이 연맹은 평화조약과는 구별될 것인데, 그것은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평화연맹과 평화조약을 구분한 뒤,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전쟁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4) 2019학년도 9평 18번 3번 선지에서는 Friedensbund와 Friredensvertrag를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평화조약이 ~ 불과한 것이다" 내지 "모든 평화조약이 ~ 불과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5) 2)번과 3번) 논거를 바탕으로 학습한 학생의 경우 3번을 고를 수 밖에 없습니다.
6) 조금 더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 관심을 가지고 학습하는 수험생들이 "영구적 평화"에 대한 저서를 직접 찾아 탐구했을 때, 오히려 문제를 틀리게 된다면, "논리적이고 명료한 사고에 바탕을 둔 철학적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생활과 윤리 교육과정에서 배치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3번을 복수 정답으로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9]
글쓴이등록일2018-09-06 15:59:56
제목생활과 윤리 18번 3번 선지 이상 없습니다.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문제오류
칸트의 영원한 평화(아카넷, 백종현 옮김, 2013년)
(101페이지) 인용해보면,
제 1절 국가들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들
1. 장래의 전쟁 소재를 암암리에 유보한 채로 체결한 어떠한 조약도 평화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그런 조약은 실로 한갓 휴전상태, 즉 적대 행위의 유예이지, 모든 적대 행위의 종식을 뜻하는 평화는 아닐 것이며, 이것에다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이미 의심스러운 동의어 중복이기 때문이다.
: 이 내용을 통해 국가 간 적대 행위의 일시적 중지 즉 휴전상태에 불과한 조약은 평화조약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28페이지)
"평화연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연맹이 있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이 연맹은 평화조약과는 구별될 것인데, 그것은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 내용 중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고,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한다’를 근거로 국가 간 적대 행위의 일시적 중지에 불과한 조약도 평화조약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죠.
여기서 ‘하나의 전쟁’은 ‘세계의 모든 전쟁’이 아니라 ‘어떤 국가와 다른 국가 간의 하나의 전쟁’을 말합니다. 평화조약은 하나의 전쟁, 즉 국가 간 전쟁의 종식을 위한 조약을 말하죠.
이와 달리 평화연맹은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 간의 전쟁 즉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구요.
정리하자면, 평화조약은 국가 간의 적대 행위의 일시적 중지가 아닌, 국가 간의 적대적 행위의 종식을 위한 조약을 의미하고,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하는 연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답지 3번은 오답이고, 문항 이상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10]
글쓴이등록일2018-09-06 21:46:09
제목생활과윤리 18번 3번 선지 복수 정답 요청드립니다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정답의견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생활과 윤리 18번 3번 선택지는 정답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근거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의 일부입니다 .
평화영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연맹이 있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
이 연맹은 평화조약과는 구별될 것인데 ,
그것은 평화조약이 한갓
하나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글에서는 평화연맹과 평화조약을 분명히 구분짓고있습니다
중요한점은 글에서 평화조약은 “한갓 하나의 전쟁을 일시적”으로 종식시키고자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연맹은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킨다고 하였습니다 .
따라서 영구평화의 실현은 평화연맹의 단계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
이게 원전 해석에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
따라서 평가원 분들께서 칸트의 원전 내용에따라서 3번 선지를 복수 정답으로 처리해 주실것을 요청합니다 .
[11]
글쓴이등록일2018-09-07 16:41:03
제목2019학년도 생활과 윤리 9평 2번의 ①번 및 제시문 오류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2
정답의견 문제오류
먼저, ①번 선지를 다시 써보겠습니다.
① 갑 : 정보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공적 가치를 지닌다.
제시문을 보면 갑은 ‘강물은 공유의 대상이며, 정보는 강물과 같은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보는 공유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공유의 개념을 써보겠습니다.
- 공유(共有) : 두 사람 이상이 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함(인터넷 국어사전)
- 공유(公有) : 국가나 공공단체의 소유
강물은 공유(公有)의 대상은 되어도, 공유(共有)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보통 어느 나라의 강을 국민 모두의 소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시문에서 ‘대동강의 강물은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공유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共有’의 의미로 쓴 듯합니다.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겠습니다(넘어가 주겠지만, 이런 기초 개념도 모르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국가시험을 주관하는 평가원 아닙니까? 평가원이 이렇게 허술하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공유(共有)는 ‘두 사람 이상이 소유하는 것’을 말할 뿐, 매매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시문은 정보를 ‘공유의 대상’이라고 하고는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정보가 공유(共有)이고 따라서 그것이 법적으로는 매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갑은 그것의 매매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갑은 어떤 주장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갑의 주장을 요약하면 ‘정보는 공유이며, 매매 대상이 될 수 없다’가 됩니다. 그런데 공유는 ‘공공적 가치’를 갖는 것일까요? 공유를 하는 사람이 전 인류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공공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개념입니다. 추측건대, 평가원 출제자들은 아마도 ‘정보는 공공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공공재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공재(公共財) : 시장 기구를 통하지 않고 공공부문으로부터 공급되어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누리는 재화(인터넷 사전 인용)
제시문에서는 ‘정보는 공유’라고 하면서, 정답으로 발표한 ①번 선지에서는 ‘정보는 공공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유=공공적 가치’가 논리 필연적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정답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썼듯이 ‘공유’와 ‘공공재’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즉, 공유는 소유관계 및 형태에 관한 것이고, 공공재는 재화의 공급 주체에 관한 것입니다.
실은 평가원에는 공유와 공공재를 혼동해 온 뿌리 깊은 역사가 있습니다. 평가원 기출을 보면 2104학년도 6평 11번에서는 ‘공공재’라고 했다가, 그 후에는 ‘공유 자산’이라고 하고 있죠(2015학년도 6평, 2016학년도 6평 18번, 2016학년도 9평 9번). 정보를 ‘공공재’라고 말하는 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정보가 공공재라면 정부가 공급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공공재의 내용인 ‘공공적 가치’라는 말이 등장한 건, 여전히 평가원의 윤리 출제자들이 이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아는 이 개념의 차이를, 평가원의 윤리 출제자들만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제시문에서는 정보를 ‘공유’라고 하면서, 선지에서는 공공재의 내용인 ‘공공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선지 ①은 정답이 될 수 없고, 따라서 2번 문제의 정답은 없습니다.
이것과는 별개로, 갑 제시문 내용을 좀 더 분석해보겠습니다. 제시문 중 일부입니다.
“대동강을 돈을 받고 판 김선달의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동강의 강물은 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공유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김선달은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는 대동강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마치 소유한 것처럼 사기를 친 것뿐입니다. 김선달의 행위가 옳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는 대동강을 사적으로 소유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기를 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시문은 김선달이 옳지 않은 것은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는 대동강을 개인적으로 소유했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죠. 이런 것까지도, 평가원의 윤리 출제자들이 학문적으로 엄밀성을 갖추고 있지 못한 증거가 됩니다. 착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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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쓴이등록일2018-09-08 11:08:55
제목생활과 윤리 18번문제 3번 복수정답 요청드립니다.
과목선택 생활과윤리
문항번호 18
정답의견 정답의견
이의제기의 근거로 활용될 저서는 "세계사적 역사인식과 칸트의 영구평화론" (백승균 지음,계명대학교출판부 2008)입니다.
일단 생활과윤리 이번 9월모의평가에서 을 사상가는 칸트입니다.
세계사적 역사인식과 칸트의 영구평화론 이라는 대학교에서 출판한 원서에 의거하면, '평화조약'이란 설령 지금 당장 전쟁은 종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전쟁종식은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하여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게된다.라고 서술되어있습니다.
이번에 생활과 윤리 18번 문제 3번선지는 평화조약이란 국가간 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에 불과하다. 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3번선지는 위에 나와있는 원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원서를 읽고 공부한 학생들은 3번을 고를 수 밖에 없는 선지였습니다.
생활과 윤리 과목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 철학과 혹은 윤리교육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원서를 읽고 공부하다가 오히려 문제를 틀려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면 과연 이러한 진로에대한 꿈을 가지고 공부하던 학생들이 상실감을 가지고 원서 공부를 그만하거나, 진로를 바꾸게 된다면 이게 과연 올바른 대한민국 입시와 '교육과정평가'가 맞는 것 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따라서 3번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하시는것은 불가피 하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아, 잘하셨습니다. 다만 저는 괜찮지만, 다른 분들은 실명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어서...그건 좀 신경이 쓰이네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수정해보겠습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저 중에 삭제된 글이 있나보네요. 제 기억에 출제자 아니냐고 하는 내용의 글이었던 거 같은데 그 부분 때문인가..
위에 윤사7번째에서
한 분께서 ''잘난 척 하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 ''힘을 자랑하지 말라'' 등이 노자의 주장으로 맞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부분을 ''잘난 척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뜻이다'' ''무위자연의 삶은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힘을 자랑하지 않는다'' 등으로 고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