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맞이하며/靑石 전성훈
엊그제 맞이한 2023 계묘년도 벌써 절반이 지나 하반기를 향하고 있다.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과는 달리 세월은 무심하게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세월이 빠르다고 느끼는 사람과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같은 하늘 밑에서 함께 숨 쉰다.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불구대천지원수’라는 옛말도 있지만,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때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고 안달복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중고등학생 때였다. 빨아들일 것 같은 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디날레’ 주연의, ‘부베의 연인’같은 멋진 성인영화를 마음 놓고 보고, 담배와 술을 어른 눈치 안 보고 피우고 마시고 싶었다. 장래의 꿈이나 목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었던 그야말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제멋대로의 행동에 따르는 책임은 외면한 채, 하고 싶은 기분에 충만하였던 때였다. 초등학생도 아니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정식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였던 사춘기 철부지 시기였다.
어찌어찌하다가 만칠십이 넘어 처음 맞이하는 여름이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하고 눈을 감는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지긋지긋한 장마이다. 그다음에는 군침이 살짝 도는 여름 과일이요, 이글이글 붉게 빛나는 태양 그리고 생명이 춤추는 듯한 청춘이라는 단어다. 장마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파괴의 신이 연상된다. 여름 과일, 태양, 청춘이라는 어휘에서는 언뜻 스치듯이 풍성함과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처럼 활기찬 생명력을 느낀다. 여름에는 여러 가지 제철 과일이 시장에 나와 입맛을 자극한다. 요즈음은 하우스 작물이 즐비하여 아무 때나 여름 과일을 맛볼 수 있는 세상이므로, 딱히 제철 과일이라고 말하기에도 뭐하다. 포도나 수박이나 참외를 손꼽는 사람이 많겠지만, 여름 과일 중에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단연코 자두와 복숭아다. 아이들 주먹만 하거나 소녀의 봉긋한 가슴 크기만 한, 검붉게 익은 시큼 달큼한 자두를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이 세상 모두를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복숭아는 물렁물렁한 백도나 황도 보다는 딱딱하고 단단한 천도복숭아를 더 좋아한다. 아마도 아직은 이가 그런대로 쓸만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늘에 높이 뜬 태양은 다른 계절에 비하여 여름에는 다르게 느껴진다. 봄가을이나 겨울에 태양을 바라보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름날의 태양은 따사로움이 아니라 뜨겁기에, 삶의 현장에 열정을 주는 듯하다. 여름날 바닷가의 태양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태워버릴 것 같은 강렬한 에너지를 준다. 태양과 청춘은 단어에서 주는 느낌이 비슷하다. 나이가 든 중년이나 노년에 비하여 젊은 사람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어휘라고 여겨진다. 햇볕에 그을릴질 모른다는 걱정으로 얼굴에 햇볕 차단제를 바르고 천이나 모자로 가리고 다니는 세상이다. 조금이라도 햇볕을 쬐어보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청춘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멋지고 경쾌하고 늠름한 모습의 청춘이 아니라 조금은 옆으로 빠져서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모습의 청춘이 열정이라는 단어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한 느낌을 더없이 강렬하게 표현한 영화가 생각난다. 프랑스의 전설인 ‘알랭 드롱’과 ‘마리 라포네’가 출연했던, 여름날의 사랑과 음모와 살인이 함께 이글거리던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이다. 학창 시절 세 번씩이나 보았던 영화, 아름다운 지중해를 무대로 펼쳐지는 배경 음악의 애절한 곡조가 귀에 맴돌아 가슴을 설레게 했던 추억 속의 영화이다.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들지 자못 궁금하다.
가슴이 뜨겁게 춤추는 여름이라는 계절, 이제는 특별한 의미나 뜻을 두고 싶지 않다. 그저 따사로운 햇볕과 ‘그해 여름의 나팔꽃’을 그리워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료하여 때때로 하품이 나오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이지만, 노년의 일상이 주는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간혹 지나간 시절의 애틋한 추억이 떠오르면 미소를 짓고 싶다. (2023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