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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31일까지 중국전선의 상황입니다. 붉은선이 일본군 점령지역입니다. 보기에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도시와 철도 중심으로 근근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중국군에게 수시로 반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때와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12월 24일 중지방면군이 항주를 점령하고, 북지방면군이 12월 26일 제남을 점령한후 일시적으로 전선은 소강상태가 됩니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중국군의 저항에다 극심한 병참 부담으로 부대를 재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일본으로서는 이 시점에서 전쟁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일본의 국력으로는 중국 전토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이 사실은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1년전인 36년 6월 8일 당시 육군성 작전과장이었던 이시하라 간지대좌의 주도로 "제3차 제국국방방침"을 수립하였는데, 여기서도 국방전략의 기본 방침은 반공과 대소작전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국외교방침"에서는 국제연맹 탈퇴후 국제 고립을 피하기 위해 미, 영, 프와의 관계 개선에 주력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자원확보를 위해 이들의 전통적인 세력권인 남방으로의 세력 확대도 노립니다. 이는 명백한 모순이었죠.
한편, 중국에 대해서는 친일괴뢰화하여 반소기지로 삼겠다는 막연한 방침만 있었습니다. 만약 중국과 전쟁이 발발한다면 최대 5~6개 사단을 동원해 화북에서는 2~3개 사단으로 북평-천진을, 화중에서는 1~2개 사단으로 상해와 그 주변을, 화남에서는 1개 사단으로 복주와 하문을 점령하겠다는 지극히 막연하고 모호한 계획만 있었고 구체적이고 상세한 계획은 전무했습니다.
노구교사변이후 전면전을 결의하는 시점에서도 내각과 참모본부는 화북과 화동에서 중국군의 주력을 조기에 섬멸하고 북평과 남경을 점령하여 중국의 항복을 끌어내며 "짧으면 2개월, 길어야 1년안"에 전쟁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사고는 어떤 명확한 근거나 계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주사변 당시의 경험만으로 중국군에 대한 맹목적인 멸시와 과소평가를 한 것이죠. 장학량의 동북군과는 달리 30년대이후 장개석을 중심으로 중국군이 급격하게 군사력을 강화하고 현대화했다는 사실은 간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37년 12월말 당초 예상의 4배가 넘는 16개 사단 50만명이상을 중국전선에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중국군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나 주력을 섬멸하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련을 대비해 만주에 배치된 최정예사단들에 대해서는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병력이 부족하자 예비역과 신병을 급조하여 만들어 장비도, 훈련도 빈약한 소위 "특설사단"을 파견해야 했습니다. "일본 군사사"에서는 37년 12월말까지 일본군의 피해에 대해 전사 1만8천명, 부상 5만2천명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적어도 이것의 두배는 되었을 것입니다.(참고로, 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p161에서는 37년 12월까지 일본군 사망자 51,220명, 부상자 204,880명에 대해 중국군 사망자 125,130명, 부상자 242,232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신뢰성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 자료출처 :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국방군사연구회 p.129
게다가 만주에서 소련과의 충돌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38년 7월에 있었던 장고봉사건이나 39년 5월의 노몬한사건은 대표적인 일-소간의 대규모 충돌이지만, 소련과의 국경분쟁은 37년 한해만도 113회, 38년에는 166회에 달하였습니다. 이런 충돌의 이유는 소련과 만주국간의 국경을 명확하게 매듭짓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의 근시안적이고 경직된 외교력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유럽이 우선이었고 극동은 현상유지에 주력합니다. 따라서 29년 "중동철로사건"당시 장학량의 동북군을 괴멸시켰음에도 영토할양이나 배상금 요구같은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은채 이전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서도 중립을 지킵니다. 중동철도에 대한 이권도 일본에게 넘기죠.
32년에는 일소불가침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에 접근하였고 서로간의 관계 개선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으나 시베리아에 대한 팽창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군부에 의해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독일-이탈리아와 "반공협정"을 체결합니다. 결국 소련은 일본 대신 중국을 선택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에 대해 대규모 원조를 시작하죠. 이는 일본의 근시안적이고 과욕으로 인한 외교 실패라 할 수 있죠. 이런 오만한 자세가 중립을 지키던 미, 영과의 관계까지도 악화시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하듯, 전쟁이 발발한지 겨우 5개월이 지난 37년 12월말에 이미 일본의 국력은 허덕거리고 있는데다 만주에서는 소련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점령지역도 대도시와 철도 중심으로 점과 선으로 근근히 연결된 상태에다 수비병력도 턱없이 부족하여 치고 빠지는 중국군의 게릴라전에 큰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5개월간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중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는 했으나 정작 결정타를 가하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우세한 기동력과 압도적인 제공권을 적극 활용해 화북과 화동에서 중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음에도 부대들간의 경쟁심리로 인한 협조 결여와 사령부의 무능함, 병참의 한계, 무엇보다 명확한 전략 방침의 부재로 맹목적으로 중국군을 추격하고 점령지를 무의미하게 확대하는데만 급급하였습니다. 보병의 도보에 의존했던 일본군은 가장 신속하게 진격할때도 일일 평균 15km정도였고, 이것은 독일군이 40년 프랑스 전역이나 41년 바바롯사작전당시 일일 50~60km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더욱이 전쟁이 점점 장기화되면서 진격속도는 급격히 둔화됩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전쟁의 조기종결이 절실하였고 독일을 통해 타협안을 먼저 제시했으나 중국이 "너무 가혹하다"고 거절하자 패배자 주제에 건방지다며 "더이상 중국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장개석정권을 붕괴시키는 그날까지 싸우겠다"라고 선언합니다. 게다가 38년 2월 16일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 대본영 어전회의에서 병참과 병력 부족을 이유로 더이상 작전지역을 확대하지 않고 현 상태의 유지에 전념한다는 방침을 정했음에도 승리감에 도취된 현지군은 이를 묵살하였고 이를 통제해야할 대본영은 리더쉽의 부재로 강경파들에게 휘둘려 되려 스스로 정한 방침을 뒤집어 버립니다. 결국 갈때까지 달리게 되는 것이죠.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그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은 중국 역시 부대를 재편하고 전선을 재정비합니다. 5개월간의 전투에서 중국군의 정확한 피해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전사, 부상, 포로, 행방불명자를 포함하여 적어도 100만명이상의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다. 이는 전군의 1/4에 해당하는 숫자인데다 최정예부대의 60%이상을 상실하였습니다. 데오도르 화이트의 말대로 만약 일본이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는 남경 공략과 그 이후의 7주에 걸친 학살극을 벌이는 대신, 그대로 양자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면 중국의 중심부를 손쉽게 점령하고 장개석의 항복을 받아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기회를 놓친 것은 일본의 무능함이죠.
37년 8월 중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된후 소련은 신강성을 통해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38년 2월까지 적어도 20개 사단이상을 무장시킬 수 있는 대량의 군수물자가 전달되어 중국군은 피해를 회복하고 싸울 여력을 다시 충전하기 시작합니다. 상해와 홍콩, 광주, 남녕 등을 통해서도 많은 군수물자가 수입됩니다. 일본이 중국 연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막지 못한 것은 중일 양측이 공식적으로 "전쟁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3국 선박의 통행을 차단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특히 미국은 "중립법"에 의해 중일 양측에 석유와 철강 등 많은 군수물자를 팔아먹음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얻습니다. 미국은 중국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으며 일본기에 의해 격침된 "파나이호"사건에 대해서도 일본정부의 사과와 200만불의 배상금을 받는 것으로 무마합니다. 게다가 38년 1월 30일 장개석이 직접 루즈벨트에게 친서를 보냈음에도 루즈벨트는 "고려해보겠다"는 미온적인 자세만 보였으며, 그의 와이프인 송미령과 재미화교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모금운동과 "차이나로비"를 했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와 남방침략이 본격화되어 미국의 세력권이 직접적으로 위협받자 비로소 강경 자세로 변화하게 되고 40년 9월에 와서야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대일수출을 금지시킵니다.
※ 소위 "음모론"을 신봉하는 일본 극우론자들은 극동에서의 "패권"을 지향하는 미국의 강경한 자세가 일본이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벼랑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하지만 그야말로 억지주장이자 어불성설입니다. 미국의 일차적 관심사는 유럽이었고 태평양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매우 우려하였습니다. 자칫하면 양면전쟁을 해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즉, 근본적인 원인이 일본의 경직되고 팽창주의에 일관된 외교, 군사전략에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채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책임을 엉뚱하게 전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전선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38년 1월부터 장개석은 한구에 총사령부를 두고 부대의 재편과 군수 물자의 확보, 각종 산업시설의 내지로의 이동, 하남성과 양자강 중류에 대한 방어선 강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또한 공산당을 포함한 각종 정당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기 위해 국민참정회를 조직하였고 군사위원회를 재편합니다. 특히 극도의 불신과 증오를 가지고 있는 공산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군사위원회 직속의 정치부장에 공산당 대표인 주은래를 임명합니다.
또한, 지난 6개월간의 전쟁에 대해 재평가하면서 그동안의 문제점을 검토합니다. 화동작전에서의 실패가 장개석의 전략적 오판때문이라면 화북에서의 실패는 지휘체계의 혼란과 군벌 지휘관들의 이기적인 행태때문이었습니다. 현지 지휘관들은 명령을 멋대로 무시하거나 무단으로 후퇴함으로서 장개석이 심사숙고하여 설정한 방어전략 전체가 엉망이 되었고 이런 일부 부대의 행태로 인해 용맹하게 싸우고 있던 아군 전체의 측면이 노출되어 큰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과거 풍옥상 휘하에 있던 구 서북계열의 군벌들이 강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제5전구의 부사령관이자 제3집단군 총사령관이며 산동성 주석이었던 한복구였습니다.
산서성에서 염석산의 제2전구가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고 무단으로 후퇴하여 일본군은 제2전구의 측면을 공격합니다. 이로 인해 산서성 전선 전체가 붕괴되었죠. 또한 일본 북지파견군이 산동성으로 남하하여 제남을 점령하자 장개석의 산동성 사수명령을 묵살한채 싸우지도 않고 자신의 개인 재산과 가족들, 부대의 군수물자를 열차로 다른 지역으로 옮깁니다. 덕분에 일본군은 산동성 전역을 무혈로 제압할 수 있었죠. 이것은 이후 서주회전에서도 막대한 악영향을 줍니다.
결국 장개석은 한복구를 비롯해 여단장급 이상 고위장교 41명을 체포하여 "명령불복"과 "적전도주"를 죄명으로 1월 24일 집단 총살시킵니다. 또한 군사위원회를 개편하면서 군령권과 지휘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킵니다. 이런 강력한 조치가 스탈린의 소련군처럼 남발되지는 않았지만 총사령관으로서의 권위와 지휘권 확립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후에는 대놓고 그의 명령을 무시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죠. 군부내에서는 장개석 다음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광서군벌의 수장 이종인조차 감히 맞서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지휘계통의 단일화라는 긍정적인 면과 함께 심각한 부작용도 있었는데 특히 전쟁 말기로 갈수록 힛총통과 유사한 편집증세를 보이게 되는 장개석은 대대, 중대급 작전에까지도 일일이 간섭합니다. 스틸웰과 격렬하게 충돌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죠.
남경이 함락된 37년 12월 13일, 군사위원회는 새로운 항전 방침으로 "무한을 중심으로 각 전구는 외곽에서는 광범위한 유격전을 수행하고 산악지대에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최정예 병력을 배치하여 적을 종심 깊숙히 끌어들인후 결전을 감행한다. 전후방이 서로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적이 정면의 진지를 공격하면 유격대가 적 후방을 교란시키고 적이 유격대를 공격하면 정면 승부를 회피하면서 적의 전진을 지연시켜야 한다"라고 하달합니다.
이어서 38년 1월 17일에는 "무한 방어를 위해 주력을 하남성, 안휘성에 집중하고 화북과 화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서주와 산동방면에 집중시킨후 적을 교란시키고 적 주력을 진포철도(천진과 양자강 하류를 연결하는 철도) 방면으로 유인하여 적이 양자강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지연시킨다. 동시에 화북에서는 적극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병력과 물자를 소모시키며 그들이 황화강을 도하하여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한다."라고 보다 구체적인 방어전략과 방침을 하달합니다.
즉, 장개석은 상해와 남경에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정면승부가 얼마나 큰 희생만 치루었는지 새삼 인정하고, 따라서 가능한 주력을 보존하면서 광대한 공간과 인적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유격전"과 "지연전술"로 변경합니다. 동시에 이로 인해 지휘관들이 병력 보존에만 급급하여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할 것을 우려한 그는 1월 11일 개봉에서 고위지휘관들에 대한 훈시에서 "반드시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공세를 취해야 한다. 사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자유자재로 공격과 수비를 수행하여 전투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적이 대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전술은 과거 모택동의 홍군이 국민정부군을 상대로 구사하여 큰 타격을 입혔던 유격전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또한 그는 그동안의 연패로 사기가 저하된 국민들에 대해 언론을 통한 적극적인 선전으로 사기를 진작시키는데도 노력합니다.
"이 전쟁의 승패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전쟁을 오래 끌수록 적을 소진시켜 우리는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 광활한 우리 국토와 우세한 인적자원은 적을 극복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부여할 것이다."
"일본은 이미 자신들의 역량이상의 병력을 중국에 투입하였고 또한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지나치게 산개된데다 더이상의 병력을 보낼 능력이 없다."
그의 이런 주장이 100% 진실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쟁의 목표와 방침조차 불분명했던 일본과는 달리 향후 대일항전에 대한 명확한 전략과 방침을 국민들에게 제시하였고 이런 지도자로서의 리더쉽만큼은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38년 1월 각 전구를 재배치하는데, 제1전구~제5전구외에 제8전구(감숙성, 영해성, 청해성)를 신설하였고(중지방면군이 무한을 본격적으로 위협하는 6월에는 무한을 중심으로 제9전구가 신설됩니다.) 특히 최일선이라 할 수 있는 하남성과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일대를 관할하는 제1전구와 제5전구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킵니다. 곧 시작되는 일본의 서주 침략을 방어하면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반격하여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겠다는 것이었죠.
한편, 일본은 무한에 대한 공략을 미루고 먼저 산동성과 강소성을 공략하여 화북과 화동 양 전선을 연결하고 향후 무한작전에 대비해 측면을 안정시키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군의 주력이 집중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서주 공략에 승패가 달려 있었습니다. 서주에는 이종인 휘하의 제5전구산하 약 15만명의 병력이 집결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북쪽에서는 북지나방면군이 남하하고, 남쪽에서는 중지나방면군이 북상하고 있었죠. 장개석도 서주의 방위를 위해 대규모로 병력을 증원하기 시작했고 쌍방은 상해전역이래 최대규모의 회전을 서주에서 벌이게 됩니다.
첫댓글 으 언제나 잘보고 있습니다
손수 지도까지 그려주시고 ㅠㅠ
일본군쪽에 붙어서 중국군과 싸운 친일 중국인부대가 있습니까?
만주국 부대 말고, 본토 중국인들로 이루어진 친일부대가 있습니까?
네, 있었습니다.
친일정부였던 왕정위 정부도 형식적이지만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했고 일본의 통제를 받아서 같은 중국인인 국민당군이나 공산군과 싸웠었죠.
영화 <색계>에서 양조위나 영화 <바람의 소리>에서 장한위 등이 연기한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었죠.
참... 군벌들 말도 더럽게 안 듣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