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갑내기 가수 김민기가 한발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오늘 후반기 삶의 터전이었던 대학로 소극장 ‘학전(學田)’을 들린 뒤 새 보금자리에서 편안히 잠들게 됩니다.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그의 73년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김민기는 자신 생각과 판단에 따라 열심히 살아온 가객(歌客)입니다. 노래를 접어둔 뒤에는 남을 돋보이게 만드는 ‘뒤 것’ 삶을 살았습니다. 정치적 견해를 밝힌 적도 없고 민중가요나 운동권 노래를 의식하고 만들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려 놓은 노래들에 사람들이 그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1970년대 정치 상황과 맞물려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내렸습니다. 민주화 시위 현장에 끊임없이 등장했던 ‘아침이슬’이 그 대표적인 노래입니다.
◉가장 먼저 알았던 김민기의 노래가 ‘친구’입니다. 아침이슬과 함께 그의 1집 앨범에 실렸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세련된 화음과 풍부한 노랫말 때문에 한국 모던 포크의 대표곡으로 꼽힙니다. 김민기가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만든 노래입니다. 동기들보다 한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갔던 김민기가 열여덟 살에 이런 노래를 만들 정도면 그의 음악적 감각과 재능을 충분히 인정할 만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스카우트 대원들과 동해로 야영 갔다가 후배 한 명이 물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선임자였던 김민기가 후배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하는 길에 즉석에서 만든 노래가 바로 ‘친구’입니다. 나중에 이 노래가 시위 현장에서 숨진 학생을 추모하는 민중가요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순전히 김민기가 만든 노래라는 후광효과가 가져온 현상이었습니다.
◉서울대 미대에 진학한 김민기는 한 학기 만에 붓을 꺾고 기타를 집어 듭니다. 고교동기인 김영세와 ‘도비두’라는 듀엣 포크팀을 만들어 노래 활동을 시작합니다. 김영세는 나중에 전공으로 돌아가 산업 디자이너 회사 대표이자 대학교 석좌교수까지 됩니다. 그는 함께했던 친구 김민기는 음악적 천재였다고 회고합니다. ‘도깨비 두 마리’를 의미하는 ‘도비두’가 부르는 ‘친구’를 만나봅니다. https://youtu.be/T6GBzdiHBlU?si=nL-cvJWpukE6VuLa
◉김민기는 그가 만든 노래의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불러도 좋을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려움과 고난도 겪었지만 특히 다른 예술인을 위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니 그렇게 부를만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먼저 알았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대학로 소극장 학전 운영과 함께 자신의 삶을 ‘뒤 것’ 인생이라고 불렀지만 주변을 챙겨서 빛을 나게 만드는 김민기의 기질은 원래부터 가진 성향이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미대 후배인 포크 듀오 ‘현경과 영애’에 대한 배려는 남달랐습니다. 김민기는 이들의 방송 출연을 주선하는가 하면 자신이 작사 작곡한 ‘아름다운 사람’을 부르게 했습니다. 지금은 친구의 아내가 된 현경은 1970년대 초 ‘민기 형이 준 노래’라며 이 노래를 들고 와서 친구의 수유리 하숙방에서 친구 병기의 기타에 맞춰 이 노래를 함께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 쿄토에 살고 있는 현경은 ‘민기 형’의 타계 소식에 지금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현경과 영애가 부르는 추모 노래로 듣습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 노래라고 김민기가 칭찬했던 현경과 영애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1절은 이현경이, 2절은 박영애가 3절은 현경과 영애가 함께 부릅니다. https://youtu.be/ySGEO3SH-Sc?si=H1UytoY0mMayX4YY
◉1974년 김민기는 미군 부대 근무 카투사로 입대합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노래들이 문제가 돼 조사받고 최전방 원통으로 전출됩니다. 여기서 그는 30년 복무하고 전역을 앞둔 선임하사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래서 동료 회식용으로 막걸리 두말을 받고 만든 노래가 바로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젊은 청춘을 군에서 바친 회한과 아쉬움에 나라를 사랑하는 소박한 마음을 담아 만든 노래입니다. 병사들의 구전으로 알려졌던 노래는 제대 후 1978년 양희은이 취입했지만 패배주의 적 가사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제는 나라 사랑 노래로 인정받고 현충일 추념식에도 등장하는 노래가 됐습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위상도 달라진 이 노래를 낮게 읊조리는 듯한 김민기의 노래로 들어봅니다. https://youtu.be/xahy5ZApOnc?si=Y2jFpw6_bk3XjtWq
◉제대 후 김민기는 선배의 도움으로 부평의 한 봉제 공장에서 재고관리 업무를 맡아 일합니다. 그때 만들어진 또 하나의 대표곡이 ‘상록수’입니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들었던 노래입니다. 힘든 노동자 생활이지만 부부가 함께 손잡고 어려움을 잘 견뎌내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달라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적지만 손잡고 이겨나가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당시 노동자 부부들에게는 친하게 지내던 송창식이 만든 노래라고 둘러댔다고 합니다.
◉김민기가 대학에 들어간 뒤 수유리 형의 집에서 보이는 공동묘지를 보고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고 묘사한 ‘아침 이슬’ 가사가 금지곡의 빌미가 되면서 이 노래가 대표적인 저항가요가 됩니다. 또 하나의 저항가요로 불리는 상록수도 당초 의도와 달리 나중에 시위 현장에서 저항가요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IMF 사태와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이 노래는 희망과 의지를 나타내는 건전한 힐링 가요로 또 한차례 변신합니다. 김민기의 초등학교 1년 후배로 ‘아침이슬’을 불렀던 양희은이 이 노래도 부릅니다. https://youtu.be/8EHNqlTyv64?si=NTi5ID9OjT6Pqn8Q
◉유신 말기인 1978년에 김민기가 연출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은 대중 확산력이 강한 카세트테이프를 매체로 활용해 금지된 음악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김민기가 만든 21곡의 노래가 2천여 개의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돼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녹음은 김민기와 친한 송창식의 녹음실에서 했습니다. 소리의 외부 유출을 막기위해 창문을 담요로 싸고 녹음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노동자로, 농부로 일하면서 현장 상황에 충실했던 김민기는 1991년 대학로 소극장 ‘학전’을 새로운 일터로 잡으면서 새로운 2막 인생을 살게 됩니다. 2021년 ‘아침이슬 50주년 김민기 트리뷰트’에서 권진원이 김민기에게 헌정하는 노래 ‘ ‘공장의 불빛’입니다. https://youtu.be/ZG4v_Zx-3-w?si=FbbTSQpgGoBB5X-i
◉1991년 김민기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연출을 맡으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이 뮤지컬은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가 각본을 맡고 비르거 하이만 작곡한 록 뮤지컬입니다. 이 뮤지컬은 김민기가 사비를 들여 개관한 학전에서 2008년까지 4천 회나 공연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