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2015년 7월 15일 씀
박근혜 정권은 정치 이슈를 선점하므로서 정권 창출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전 까지 야당의 전유물 이었던 경제민주화 였죠
세계 정치 명망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징권을 창출 혹은 유지했을까 정치 공학적으로 생각 해 봅니다
정치는 국민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고도의 철학적 통치 행위라는데 공학적인 면을 부각하면 정치 권력의 창출 요인은 크게 4가지 정도 입니다
중요 이슈 선점, 상대 분열을 위한 이간질 전략, 중도의 외연 확보를 위한 내부 먼지 털기 , 그리고 개혁 전략등 이외에도 있지만 대게는 이들 중 하나 혹은 두개의 전략이 결합된 형태 아닌가 합니다
천천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세계의 유명 정치가들 그리고 다음 정권의 향배에 대해서 말입니다
클린턴의 전략
1968년 부터 1992년까지 24년 동안 민주당 대통령은 단 한사람 이었고 나머지는 공화당대통령 이었고 지미 카터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6년 유일하게 민주당으로 승리를했고 그 이후 클린턴은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적 선택을 합니다
그는 중도로의 위치 이동을 위해 공화당의 중요 강령이자 이슈인 복지축소와 범죄 처벌 강화, 조세 감면 제도를 이슈화하여 정권을 창출합니다 그전까지 범죄 문제는 민주당에서는 곧 인종 주의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을 반대하고 사형제를 지지하며 연방재정 적자를 반대하며 그 방편으로 복지예산을 줄이겠다고 하므로서 거꾸로 상대방인 공화당의 정책을 차용하므로서 공화당의 김을 빼고 집토끼인 기존 민주당 지원자를 포함해 일부 공화당에 호의적인 중도층을 흡수하여 대권을 쥐게 됩니다
유사한 경우가 프랑스의 미태랑대통령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1982년도 쯤 프랑스는 사회당의 사회주의 정책, 즉 미태랑 정권의 국유화 정책으로 그 당시 미국 레이건 밎 대처의 보수정책으로 인한 프랑스 자본가들의 국외 자금 이탈로 경제는 어려움에 처함니다 당시 미태랑은 다음 정권을 위하여 지스카르 데스댕 같은 온건 보수주의 정객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고, 드골 당 당수인 강경 보수주의자인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합니다 사회당의 반대를 무릎쓰고 말이죠 그 후 프랑스 국민은 미태랑 시라크 정부를 보수ㅡ혁신 동거 정권 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랬 을까요
이 후 시라크는 미태랑이 국유화 시켰던 산업을 모두 민영화시킵니다 4년전 집권에 성공한 사회당의 정책을 모두 뒤집어 버리자 사회당 내부에서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미태랑은 반대는 커녕 시라크의 입법조치를 승인 하면서 보수세력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미태랑, 그는 마음속으로는 웃고 있었습니다
2년 뒤 시라크가 미태랑에 도전 하기 위해 대통령에 출마할 즈음, 시라크에겐 아무런 이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시라크,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이미 성취했던 것이고 따라서 유권자들이 그에게 표를 던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그는 실패했고 미태랑이 재선에 성공 한 것 입니다
미태랑은 상대방의 이슈를 낭비시켰고 사회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활동폭 과 비중을 높인 것이죠
그는 자신의 정책적 실수를 상대방의 이슈를 탕진 시키므로서 재선에 성공한 것 입니다
링컨의 전략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링컨은 위대함 뿐 아니라 술수가 뛰어난 정치인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민주당이 남북으로 분열 되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노태우 후보가 김영삼 김대중씨의 분열로 대통령이 되었던것 과 유사합니다
1860년 4월 미국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전당대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과거 8년간 백악관을 장악했고 24년간 행정부를 장악 했던 터라 정권을 잡는 것은 당연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당시 민주당 대권 후보는 스티븐 더글라스와 전직 부통령이 었던 존 브레킨니즈라는 두사람 대결이었습니다
더글라스는 남부에서 요청하는 노예제 찬성에 비교적 중립적으로 그것은 각주의 주민들이 투표로 선택해야 될 문제라고 노예제 자체에 한걸음 비켜나 있었고 상대방인 브레킨니즈 후보는 노예제에 찬성주의자 였습니다
민주당이 노예제로 분열하자 링컨은 승리를 예감하고 그 두명의 민주당 후보를 서로간에 이간질 시켜서 민주당의 내분을 확대해 성공하는 전략을 씁니다
당시 민주당이 정권을 유지 시킬수있던 것은 노예제 문제에 찬성/반대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인데 전직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은 북부출신이면서 남부출신 처럼 남부 노예제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민주당의 결속과 국가적 단합을 깨뜨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해 왔던 것 입니다
링컨은 인간을 속박하는 노예제를 규탄함과 함께 상대방인 더글라스의 어정쩡한 태도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결국 더글라스는 노예제의 찬성편에 서게 되고 이에 반대한 남부 주민들은 화가나서 존 브레킨니즈를 지지하는 양분세력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결국 브레킨니즈와 그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을 탈당했고 그는 민주당 남부파로 추대되어 대통령에 출마하게 됩니다 그는 남부지역을 휩쓸었지만 북부에서는 철저 하게 외면당하고 맙니다 링컨의 정치적 판단과 예측은 정확하여 분열된 민주당의 두 후보와 겨룬 결과 링컨은 어부지리로 불과 약 40퍼센트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던 것이죠
링컨의 책략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소수파 정당인 공화당 후보로서 승리를 거두려면 다수파 정당인 민주당 정당을 약화 시키지 않을수 없었는데 그의 이간질 분열전략은 성공한 것입니다
링컨은 1861년 대통령에 당선되기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노예제에 반대하는 개인적 소신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도를 폐지하거나 백인 소유의 노예를 무더기로 풀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일관 되게 주장했습니다 자신은 노예제가 새로운 주로 확산 되는 것만 관심을 쏟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남북전쟁 중인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을 시행했습니다
그 후 민주당은 링컨의 모순된 행태를 조롱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노래를 퍼트렸습니다
정직하다는 에이브, 남북전쟁 벌어지자
노예제 폐지는 추진계획 속에 없다고 부인 했다네
정직하다는 에이브, 그 이후 노예해방령 내놓고,
남북전쟁은 모든 노예 풀려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네
두 모습이 모두 정직 할 수 없다면, 누가 나에게 말해다오
그 누구도 정권의 쟁취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듯 십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정치를 신이 되려는 인간에게 신이 준 악마의 선물 이라고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