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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7 : 1~22) 주석
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ㅇ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곧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번제물들을 소거(消去)시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봉헌된 성전을 열납하셨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봉헌 기도도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레 9:23, 24; 왕상 18:38). 하나님은 종종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 응답을 확증해 주셨는데 모세가 성막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을 때와 모리아 산에서 다윗이 제단을 쌓았을 때(대상21:26)도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Wycliffe). 또한 신약 시대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성도에게 응답하실 때도 불이 임하였다(행 2:3). 물론 이때의'불'은 자연적인 불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불이다.
ㅇ여호와의 영광이 그전에 가득하니 - 5:13, 14에 의거할 때 여기서 '영광'은 전(殿)에 가득한 구름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구름은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매체로 언급되었다(출 19:16; 40:35). 아무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들을 사른 이적적 사건과 동일하게 여호와의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것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 선포이다(O. Zockler).
2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ㅇ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 여기서 제사장은 그 당시 성전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직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맞닥뜨리면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출 3:1-6; 단 8:17). 이와 유사한 예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던' 사건을 들 수 있다(출 34:29-35). 한편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온전히 영광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3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ㅇ이스라엘 모든 자손은...엎드려 경배하며 - 여호와의 영광을 목격하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은혜를 체험한 성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레 9:24).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잠깐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은혜가 아닌 수 없기 때문이다.
ㅇ박석 깐 땅 - 겔 40:17에 따르면 박석(薄石)은 성전 바깥 뜰 삼면에 모두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윗뜰 곧 제사장의 뜰에도 역시 박석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만일 그렇다면 이곳에 엎드린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한편 '박석'은 빛나는 돌로 만든 석판을 가리키는데 성경에서 이는 대개 '성결'을 상징한다.
ㅇ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 이 구절은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를 찬양 할 때 전형적으로 언급되는 찬양의 후렴구이다(5:13; 시 106:1; 136:1).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5:13 주석을 참조하라.
4 이에 왕과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니
ㅇ이에...제사를 드리니 - 여기에 언급된 제사는 성전 봉헌식의 마지막 감사제이다(Keil). 이와 달리 1절의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태운 번제물은 5:6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언약궤 안치식을 위해 차린 제물이었다. 한편 본절 이하에 의거하면 성전 봉헌식의 마지막 감사제는 언약궤 안치식(5:5, 6, 12, 13)보다 더 웅장하게 치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ㅇ왕과 모든 백성이 - 이처럼 왕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를 드리는 화목하고도 단합된 모습은 신정(神政) 통치의 이상적 형태이다. 그런데 지도자를 중심한 성원(成員)들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에서 마땅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5 솔로몬왕의 드린 제물이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니라
ㅇ소가 이만 이천이요...낙성식(落成式)을 행하니라 - 혹자는 성전 낙성식에 쓰인 제물로 소가 2만 2천 마리, 양이 12만 마리 소비되었다는데 대하여 이는 과장된 수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Thenius). 그러나 역대기와 열왕기의 기록(왕상 8:63)이 일치하는 점을 볼 때 이는 결코 과장된 수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 그러한 수치는 낙성식 축제가 2주간 동안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Wycliffe, P.C. Barker, Payne). 즉, 왕상 8:63에서는 이 제물이 화목제로 드려진 제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목제 제물은 백성들이 먹을 수가 있었는데(대상 16:1-3; 29:21, 22), 이로 볼때 당시에 성전 봉헌식에 참여한 인원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2주간 동안 그 인원들이 소 2만 2천 마리, 양 12만 마리를 처리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6 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레위 사람도 여호와의 악기를 가지고 섰으니 이 악기는 전에 다윗왕이 레위 사람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만들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감사케 하던 것이라 제사장은 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온 이스라엘은 섰더라
ㅇ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 5:12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사장들의 수가 12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비록 이들은 제사장의 24반열(대상 24:1-19)에서 각기 5 명씩 차출된 자들이었지만 파당을 이루어 나누어 서지 아니하고 직분대로 정해진 자리에 섰다. 이것은 성전 안에서는 지파 간의 모든 파벌 의식이 사라지고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332).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모든 사람들 간에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고전 1:26-31).
ㅇ여호와의 악기 -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주로 사용한 악기들은 대개 제금, 비파, 수금, 나팔 등이었다. 5:12, 13 주석 참조.
7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솔로몬의 지은 놋단이 능히 그 번제물과 소제물과 기름을 용납할 수 없음이더라
ㅇ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 솔로몬은 놋단만으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기름을 다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여 임시 제사 장소로 삼았다. 솔로몬이 모든 제물들을 다 수용하기 위해서 단을 확대 신축하거나 새로운 한 단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당시 성전의 놋제단만이 참 되고 유일한 제단이었음을 강조해 준다. 왕상 8:64 주석 참조.
ㅇ놋단이 능히...용납할 수 없음이더라 - 병행 구절인 왕상 8:64에서는 "여호와의 앞 놋단이 작으므로...용납할 수 없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4:1에 따르면 단의 크기가 가로, 세로 9.12m(20 규빗) 정도임을 알 수 있는데 실로 이것은 대단히 큰 것이다. 이에 대해 커티스(Curtis)는 열왕기의 과장이 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왕상 8:64에서 놋단이 작다고 한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많은 제물을 수용하기에 작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8 그 때에 솔로몬이 칠일 동안 절기를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심히 큰 회중이 모여 저와 함께 하였더니
ㅇ그때에...칠 일 동안 절기를 지켰는데 - 본절과 9절에 의거하면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 종교력 7월 8일부터 7월 22일까지 두 주간에 걸쳐 성전 낙성식과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장막절 축제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장절 또는 장막절은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이기도 하지만 일년간의 모든 추수를 다 마치고 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에 이때에는 소출이 대단히 많았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참조. 율법에 따르면 이 장막절은 7월 15일부터 7일 동안지키며 제팔일에는 성회(聖會)로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레 23:33-36). 그러므로 솔로몬은 7월 8일부터 14일까지 7일 동안 먼저 낙성식 축제를 행한 후 이어서 또 한 주간을 장막절 절기로 지켰던 것이다.
ㅇ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 - 여기서 '하맛(Hamath) 어귀'는 유브라데(Euphrates) 강의 한 줄기인 오론테스 강을 가리킨다. 그리고 '애굽 하수'는 가나안 땅 서남쪽 바란 광야에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아리쉬'를 가리킨다. 이는 일명 '애굽 강'(창 15:18), '애굽 시내'(수 15:4)로도 불리웠는데 '나일 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민 34:5, 8 주석 참조. 그런데 본절에 제시된 이러한 구역은 당시 솔로몬 왕국의 경계이다(왕상 4:21; 대하 9:26). 이러한 이스라엘 땅의 경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의 언약에서이다(창 15:18). 이로 볼 때 성전 건축과 낙성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취한 뒤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전의 영향이 이스라엘 땅 전지역 구석구석까지에 미치게 되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실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기에 온전한 보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제 팔일에 무리가 한 성회를 여니라 단의 낙성식을 칠일 동안 행한 후 이 절기를 칠일 동안 지키니라
ㅇ제 팔 일에 무리가 한 성회를 여니라 - 여기서 '제 팔 일'이란 한 주간의 낙성식이 끝나고 난 다음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장막절이 끝나고 난 다음날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낙성식이 끝난 다음 날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 성회'란 낙성식이 끝나고 난 제 8일부터 다시금 한 주간 동안 지킨 장막절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한편 히브리 종교력으로 7월 10일은 일년에 단 한번 열리는 대속죄일이다(레 16:29-34). 따라서 2주간에 걸친 낙성식과 장막절 축제 기간에 이 대속죄일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더 축제의 의의를 고양(高揚)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10 칠월 이십 삼일에 왕이 백성을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매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ㅇ칠 월 이십 삼 일에...그 장막으로 돌려 보내매 - 왕상 8:65에는 솔로몬이 '칠 일 칠 일합 십 사 일'을 보내고 난 '제 팔 일', 즉 22일에 백성을 돌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본절과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즉, 본절에서의 23일은 솔로몬이 백성들을 해산시킨 날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간 날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22일에 백성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무리들은 1주간의 장막절이 끝나고 난 제 8일째(22일) 역시 성회로 모이는 날인 것을 알고 성회를 가졌고 그 성회에서 왕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물론 솔로몬도 이 날이 성회인 줄은 알았고 또 성회에 참여도 했을 것이지만 솔로몬이 성회의 주체자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백성들을 미리 해산시켜 그 성회를 백성들의 주체 하에 맡긴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8:66 주석을 참조하라.
1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ㅇ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 이것은 성전 건축에 있어서 솔로몬이 하고자 했던 대로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뜻한다(3, 4장). 그러나 실제로 성전 건축은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부친 다윗에게 주신 설계도에 따라 지어진 것이지(대상 28:11-19) 솔로몬 자신의 의도대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회막도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졌다(출 2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솔로몬이 원하던 대로 다 형통하게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원하고 순종하는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계획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자원하는 자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다.
12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ㅇ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 본절과 병행인 왕상 9:2에는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열왕기 기자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두 번째 현현(顯現)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인 에스라는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신 그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현현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에스라는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가 말한 기브온 사건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계속 솔로몬과 예루살렘 성전에로 집중시키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9:2 주석을 참조하라.
ㅇ제사하는 전 - 이것은 왕상 9:2에는 없는 에스라의 삽입이다. 한편 이처럼 여호와의 전을 '제사하는 전'으로 표현한 것은 왕상 9:3에서 성전을 '여호와의 이름을 두는 곳'으로 표현한 신명기적 개념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제사장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Curtis).
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ㅇ본절에 언급된 재앙은 경제를 핍절하게 하고(가뭄), 자연을 파괴하며(메뚜기), 육체를 고통 속에 몰아 넣는 것(염병)으로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포괄적인 것이다(6:26, 28).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재앙이 있을 때는 모두가 즉시로 회개하고 기도할 때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14절). 실제로,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죄 때문에 3일간의 온역으로 징벌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범죄하였음을 깨닫고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삼하 24장).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개인적 또는 국가적인 재앙을 당할 때 그것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회개함으로써 재앙을 종식시킴과 아울러 이를 신앙 성숙의 전기(轉機)로 삼아야 할 것이다.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ㅇ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 - 이와 유사한 표현은 역대기서에 간혹 나타나는데(6:5, 33)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백성들'을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그들이 여호와께 속했고, 그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절은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죄악된 길에서 떠나지 아니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이며 큰 능력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부탁했었다(Wycliff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ㅇ그 악한 길에서 떠나...내 얼굴을 구하면 -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그분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사유(赦宥)하심 및 도움 등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6:42 주석 참조. 아무튼 본절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어 요구되는 조건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겸손, 회개, 기도, 헌신 등이다. 실상 철저한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죄악이 관영했던 니느웨 성읍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서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면한 사실(욘 3장)이 이를 잘 증거해 준다.
ㅇ그 땅을 고칠지라 - 땅의 회복은 용서함 바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큰 축복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주를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이 토지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종 땅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내리시는데(창 2:9; 3:17; 신 26:15), 산상 보훈에서도 땅은 온유한 자, 즉 겸비(兼備)한 자에게 축복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언급되어 있다(마 5:5).
15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ㅇ이곳에서 하는 기도에...귀를 기울이리니 - 이곳은 '성전'을 가리킨다. 그런데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다(6:6). 따라서 본절은 포괄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는 뜻이다.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ㅇ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 앞서 솔로몬은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6:20)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 따라서 본절과 같은 하나님의 응답은 솔로몬의 기도 이상으로 풍성한 약속이라 하겠다. 한편 성전을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은 완전한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마 12:6)와 성전의 각 지체요 성령이 내주하시는 전인 신약 백성들(엡 2:21, 22)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인 것을 명심하고서 모든 언행(言行)에 있어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고전 3:16, 17).
17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비 다윗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한 모든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규례를 지키면
ㅇ네 아비 다윗같이 하여 -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왕상 9:4과 본절은 '다윗' 을 언급함에 있어 그 시각이 다르다. 즉, 열왕기 기자는 다윗을 대표적인 신명기적 왕으로서 주의 법도와 율례를 잘 지킨 인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본서 기자인 에스라는 다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대표적인 신앙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축복의 약속 대로 지속될 '왕위'(王位)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나(왕상9:5) 에스라는 '다스릴 자'(18절)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다스릴 자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국을 통치할 메시야(계 19:16)를 상징한다. 아무튼 다윗은 비단 솔로몬 뿐 아니라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삶의 척도 또는 표본으로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28:1; 29:2; 왕상 15:3, 11; 왕하 14:3). 그것은 다윗이 전혀 범죄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삼하 11장) 그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며 변치 않는 마음으로 온전히 행하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9:4 주석을 참조하라.
18 내가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비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하리라
ㅇ내가 네 나라 위를...한 대로 하리라 - 이 언약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의미의 다윗 왕조가 계승될 것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다윗 왕가는 분열 왕국으로 멸망의 조짐을 보였고 마침내 바벨론 포로로 그 왕통은 사실상 끊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사단의 역사 진행 방법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남겨 놓은 씨를 들어 사용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것이다(마 1:18-25).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온갖 방해와 인간의 부패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이 택하신 '씨'를 보전하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롬 9:29).
19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이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숭배하면
20 내가 저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리니
ㅇ본문은 왕상 9:6, 7과 병행 구절들이다. 그러나 동일한 자료를 가지고도 저자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즉,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강조하고 있으나(왕상 9:7) 여기서 에스라는 '너희',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14절)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백성과 나라라는 두 강조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만 백성들 하나하나의 하나님의 전으로 볼 때 그 의미는 달라 진다. 즉, 에스라는 본문에서 백성들 하나하나 개개인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ㅇ이 전을...이야기거리가 되게 하리니 - 위의 관점에서 볼 때 열왕기서 기자는 하나님의 전을 왕국의 중심으로 강조하고 있으나 에스라는 성전과 성도 하나하나를 서로 깊게 연관지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에스라는 이스라엘 국가 전체의 운명은 개개인의 신앙 여부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의 흥망 성쇠(興亡盛衰)를 단지 연대적(連帶的)인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실제적인 자신의 죄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즉,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단지 전체 백성의 연대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임을 볼 때 에스라의 강조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속담거리'나 '이야기 거리'는 단순한 경멸이나 조롱거리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본보기'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경우 당할 비참한 지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능히 짐작케 해준다. 왕상 9:7 주석 참조.
21 이 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22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ㅇ본문은 왕상 9:8, 9과 전저긍로 일치하나 단지 본문에는 '비웃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을 모독하는 이런 용어를 꺼렸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해 버렸을 것이다.
ㅇ이 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 이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헛됨을 보여 준다. 실상 성전은 여호와께서 그곳에 마음을 두시고 거하실 때(16절)만이 성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무릇 그리고 지나가는 자가 놀라 가로되 - 왕상 9:8에는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저주하실 때 종종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다(신 29:24-27; 렘 18:16; 19:8). 롬 1:23에서 이방인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ㅇ다른 신에게 부종하여...섬기므로 - '부종하다'에 해당하는 '하자크'는 왕상 9:9에 나오는 '다바크'와 같은 의미로 상대방에 대하여 전인격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은 곧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 38).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연애하듯 섬겼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왕상 9:9 주석 참조.
<The King 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