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쇠 평전』의 저자인 남궁윤 선생에게 이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 유영쇠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읽어보면 안다고 하시던 남궁윤 선생의 얼굴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부끄러웠다. 굴곡 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수 십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장기수들에 대해서 나는 누구보다 관용적이고, 그들을 이해한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고장 김제 출신의 장기수, 유영쇠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까지도.
유영쇠가 3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1983년 출소하여 지금까지 익산에서 계속 살았고, 부랑인들의 쉼터인 이리자선원에서 생활하며 부랑인과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 또한 전혀 몰랐다. 이리자선원이 익산의 원광대 부근에 있었고, 내가 1988년도에 원광대학교에 입학하였으니까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전혀 몰랐다.
한때나마 나는 사회주의에 심취되어 어줍지 않게 혁명가 인양 행세한 적이 있었다. 그 시기 가까운 곳에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좌절되어 장기수로 출소한 유영쇠의 존재도 모르면서 말이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유영쇠, 가까운 곳에 존재하며 같은 지역에서 살았지만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에 나는 부끄럽다. 동시대를 살면서 존재하고 있었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지되고 또 그렇게 살아왔을 수많은 유영쇠들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다.
자생적 사회주의자 유영쇠
유영쇠는 김제 봉남면 출신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파르티잔(빨치산) 유격대로 활동하였고, 휴전 후 조선로동당 김제군당 지도부로 체포되어 3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하였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강요로 세 번의 전향서를 썼고 세 번의 전향을 취소했다. 고통과 두려움, 양심에 대한 자기번민으로 점철된 감옥살이였다.
고작 4년 정도의 빨치산활동과 조선노동당 김제군당 간부로서 사회주의 건설의 꿈을 꾸었던 젊은 혁명가에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시간동안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운명은, 개인에게는 너무도 잔인하고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불편한 역사다.
유영쇠는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14살까지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야학과 귀동냥을 통해 한글과 천자문을 읽혔으며 책과 잡지를 읽으며 사회현실을 깨달았다. 야학생이었던 유영쇠는 야학당을 운영하고 한글선생이 되어 한글을 가르치는 등 주위의 신망이 두텁고, 지역에서 인정받는 반듯한 사람이었다. 지역의 대소사를 주관하고 지역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는 리더쉽을 발휘하기도 했다. 온화하면서도 강단 있는 젊은이였다.
해방이후 북쪽에서의 토지무상분배는 유영쇠에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영쇠는 인민군 의용대에 입대한다. 그 후 유격대(빨치산)가 되어 김제평야를 가로 지르고, 모악산을 넘기도 하고, 겨울 운암강을 맨몸으로 건너기도 하고, 회문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기도 한다. 휴전 후 1년이 지난 1954년 유영쇠를 비롯한 김제군당 지도부 전원이 체포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꿈은 좌절된다.
우리가 보듬어야 할 또 하나의 역사
해방이후 우리민족은 좌우이념 갈등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비극적인 동족의 전쟁이 일어난다. 그 한편에 사회주의를 위해 인민군에 협조하기도 하고, 스스로 빨치산이 되어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휴전이 되어 대한민국 법에 의해 사형 당하기도 하고, 저마다의 형량으로 처벌을 받는다. 감옥에서 사상의 전향을 거부하며 자결하기도 하고, 오랜 동안 장기수로 복역하기도 한다.
현재 세계는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념경쟁은 끝이 났다. 사회주의 사상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지금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혁명을 이야기 하는 것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해방 후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던 파르티잔들이 존재 하였고, 그것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김제의 근현대사 중에 일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편견으로 그들의 존재가 조금은 불편하다고 해서 없었던 역사로 기록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해방 이후 김제에는 좌익진영의 활동을 하다가 스스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조선로동당의 일원이 되어 복무했던 수많은 유영쇠들이 있었다.
60여년이 흐른 지금, 20대의 젊은 혁명가 유영쇠는 이제 80대 중반 노인이 되어 익산의 한 요양원에서 갖가지 질병과 싸우고 있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역사의 산중이다.
왜 자서전이 아닌 평전 이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유영쇠가 생존의 인물인데 왜 평전의 형식으로 출간 하였을까 궁금하였다. 유영쇠가 직접 진술하는 자서전으로 기록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남지만 작가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이나마 다행이기 때문이다. 자칫 모르고 지나쳤을 우리의 역사를 기록해 준 남궁윤 선생에게 고움을 전하며 생전에 유영쇠를 꼭 한번 뵙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