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에 관하여
노어노문학과
20140486 이정빈
1.
들어가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에 나오는 여성은 고작 5명이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여성은 소외되고 외면 받아 왔다. 특히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여성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여성은
언제나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며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왔다. 이제 두 개의 논문을 통해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에 관하여 알아볼 것이다. 단순히 현모양처가 되길 강요 받고 수동적으로 살았을 거라는 추측을 넘어, 실제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저자소개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 기록한 아내의 일생」의 저자인 이지양은 성균관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동국대
한국문화연구소,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출강하고 있다. 일찍이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함께 참여해왔다. 「이옥전집」 「이향견문록」 「변영만 전집」 등을 함께 번역했고, 「조선후기
문집의 음악사료」 등도 번역했다. 조선조 후기 한문학 및 예술 풍속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조선후기 여성 생활의 규범화-탈규범화
관계에 대한 연구」의 저자인 류정월은 서강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헌 소화의 구성과 의미 작용에 대한 기호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로
있으며 한국여성문화학회에서 편집부에 속해 있기도 하다.
3. 남성의 시선에 비친
여성: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 기록한 아내의 일생」
일반적인
문헌에서 여성의 삶을 찾기는 힘들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행장(行狀)에 주목한다. 행장이란
죽은 사람의 일생을 묘사한 글로, 벼슬이나 고향, 행적과
치적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로 문하생이나
친구나 수하의 관속들에 의해 작성되는 행장 역시 대부분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다. 여성이 행장에 기록되는 것은 신분이 높았던 극소수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조선 후기(17세기)가 되어서야 발견된다. 논문에서는 26편의 행장에 기록된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물론 여기 기록된 여성들은 평민이 아닌 사대부가의 아내들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논문에서는 26편의 행장을 분석하여 통계를 제공한다.
남편과 아내는 모두 15세 전후에 결혼하고 늦어도 20세를 넘기진 않았다. 결혼 기간에서는 꽤
차이가 있는데 23일에서 69년까지로 다양했고, 평균적으로는 25년이었다. 특이점은
남편과 아내의 평균 수명으로, 66.5세인 남편은 40.9세인
아내와 비교할 때 월등히 오래 살았다. 물론 40.9세 역시
평민에 비하면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양부족이나 의술의 한계로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비율이 전체의 40%에 달했기 때문에, 사대부가의 여성들은 평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대부가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수명 차이는 두드러지는데, 이는
여성이 출산, 영양실조, 과로
같은 불리한 조건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사별 후 남성은 대부분 재취(재혼)를
하게 되는데, 이는 자녀의 양육과 혼사, 제사, 부모 봉양, 살림, 후사
등의 문제를 혼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와 달리 조선시대엔
남녀의 역할 구분이 명확했다. 여성이 있어야만 집안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가 농경사회, 대가족
사회, 신분 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유교윤리와 봉건 신분 질서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엔
자녀가 많은 것을 덕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은 다산이 이루어진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실제로 26편의 행장에서 자녀를 낳지 못한
가정은 7곳에 달했고, 자녀가 성인이 되지 못한 채 죽는
경우도 많았다.
행장은 남편이 기록한
아내의 일상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아내로서의 다양한 덕목이 나오는데,
성향과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26편에 모두 등장하는 공통적 항목이 네 가지 있었다. 첫째는 아내의 품성과
시집오기 전 사랑받으며 자랐다는 것, 둘째는 검소한 생활 태도를 가졌다는 것, 셋째는 시부모를 잘 섬겼다는 것, 넷째는 내조를 잘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남성들은 이러한 모습의 여성을 칭송했다. 다만, 남성들에게 그런 아내의 모습은 일종의 이상이지, 그 모습을 당연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행장은 대체로 아내에게 빚진 마음을 고백하는 분위기를 나타낸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혼 남성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부담은 경제적 책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거 급제 문제’가 당시 남성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행장에는
과거 시험 준비와 관련해서 진로에 대해 들은 조언이 기록되어 있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아내의 말을
잊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기록한 것이다. 이는 시대상과도 관련된다. 당시 선비 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은 학문뿐이었다. 노동은 백성의
몫이니 선비는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교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니 과거에 급제해야만 돈벌이를
할 수 있다. 애초부터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선비는 소수이므로, 결국 선비의 아내들은 모든 노동과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렇게 집안 살림을 맡으면서, 그것이
남편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도록 남편을 더욱 공경하기까지 해야 했다. 그래서 남성들은 이러한 아내의
공로에 감사하며 행장을 기록했다.
이처럼 행장 26편에 기록된 것은 모두
유교 가부장제를 실현하는 양반 부부의 모습이었다. 논문은 이런 조선시대 부부의 모습과 현재 우리 사회의
부부상이 본질적으로 다른지에 대해 의문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부의 기본 구도는 여전히 유교 가부장제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4. 감춰진 실제 여성: 「조선후기 여성 생활의 규범화-탈규범화 관계에 대한 연구」
앞의
논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조선후기는 유교 질서가 삶과 밀착되면서 제도적으로 큰 영향을 발휘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 역시 조선후기다. 신분제를
동요시킨 양란은 성별 위계에도 유사한 영향을 미쳤고, 상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은 여성들에게도 경제 활동
참여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 논문에서는 ‘세속(세상)의 부녀자’라는 표현이 들어간 텍스트들을 포괄적으로 분석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표현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유교 규범을
지키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앞선 행장에서 여성의 긍정적인 면을 칭송했다면, 여기서는 여성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한 셈이다. 물론 이 글들은 모두 남성이 쓴 글이다.
대표적인 것이 제문과
묘지명이고, 경우에 따라 행장에서도 여성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난다.
여기서
제시되는 그들의 문제는 공통적으로 세 개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시기, 질투, 자만과
같은 성격의 문제고, 둘째는 말을 꾸며내는 등의 언행 문제이며, 셋째는
빚을 지고 가산을 탕진하는 경제 문제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표현들이 정형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제 여성의 삶을 관찰하여 작성했다기보다는 장르적 관습을
재현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세속의 부녀자’에 대한 비판은
그렇지 않은 여성을 칭송하기 위한 일종의 허구이자 수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규훈서는 여성과 관련된 규범을 구체화하기
위해 기록된 글로서, 실제 사례를 제시한다. 규범을 말하려면
잘못된 모습을 지적해야 하기에, 잘못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했다. 가령, 송시열은 『계녀서』에서 시부모를 친부모보다 잘 모셔야 한다고
말하며,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 부정적 사례를 언급한다. 그것은
그가 현실에서 목격한 사례들이었다. 규범을 설명하기 위해 부정적 사례를 제시하는 방식은 조선 후기 규훈서의
특징이다. 규범을 지키지 않는 여성이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만, 후기로 갈수록 규범이 복잡해지고 늘어났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러한
비판이 나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소수의 여성이 규범을 따르며 칭송되고, 다수의 세속 여성은 규범을 따르지 않아 비판받거나 교육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세속의 여성들은 언행, 종교, 가사
노동, 경제 등 광범위한 일상의 영역에서 규범을 위반했다. 이러한
일탈이 대규모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유교 이데올로기에 제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조선후기의 문화는 소수가 추구하는 바른 가치관이 아니라,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다수의 행동과 사상을 통해 구성되었을 것이다. 세속의
여성들은 가치적으로는 주변부에 있지만, 수적으로는 문화의 중심이었다.
다수의 여성이 유교 이데올로기를 외면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세속의 여성을 따르게 된 것은 일종의 모방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군중심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다수의 사람은 그 자체로 모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편, 이러한 변화를 경제적 차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분명 경제력의 확산과 여성들의 탈규범화는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대다수의 여성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 못했지만, 부유한 상태로 자유롭게 사는 소수의 여성을 동경했을
수 있다. 그렇게 선망이 된 새로운 여성상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이한 점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진 비판 중 성적 영역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선 후기 여성들이 성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가치를 따랐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조선 후기 여성에게는 두 가지 상이한 모습이 드러난다.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영역의 규범을 어기고, 지켜야 한다고 믿는 영역의 규범은 지켰다. 그만큼 조선 후기는 역동적 변화와 일관되지 않은 가치가 공존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두
개의 논문을 통해 조선 후기 여성의 삶에 관해 살펴봤다. 전통 질서에 순종하길 원하는 남성들의 모습,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여성들의 모습 그리고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의 모습.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며 변화를 맞이했던 것 같다. 그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 아닐까? 최근 미투운동을 통해 이제야 비로소 여성들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현재와 다른 조선의 삶을 보며 어떻게 변화가 시작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귀결이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두 개의 논문 모두
양반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여성 자체에 대한 기록이 적고, 그나마도 양반 여성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여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이지양,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 기록한
아내의 일생」, 『인간·환경·미래』 Vol7, 2011, pp.31-57
류정월, 「조선후기 여성 생활의 규범화-탈규범화 관계에 대한 연구」, 『여성문학 연구』Vol28, 2012, pp.331-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