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이기에 가볍게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책은 폐기물로 버려진 토지를 어떤 여성이 구매 후 신비로운 화원으로 만들었다는 프롤로그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나인은 어느 날 자신의 손끝에 손가락 하나마다 새싹이 돋아난 걸 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미래와 현재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려 하지만 넘어가죠.
그러다 승택이라는 아이가 나타나 자신들은 같은 부류이며 식물이라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이모라는 호칭 대신 유지라는 이름에 딴 지모에게 말을 농담처럼 전하지만 사실이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그렇게 식물이 된 것을 넘어 말까지 듣게 된 그녀에게 금옥이라는 나무의 영혼을 이어 받은 100년 전 죽은 아이가 2년 전 자신이 다니는 학교 재학생 원우가 친구 도현에 의해 살해 당했음을 알리며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가독성이 좋진 않았습니다. <천 개의 파랑>과 비교하자면요. 저번 주에 영화를 많이 봐서 책 볼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빨려 들어가는 느낌까진 없었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하달까요? 평범한 사람인데 사실 다른 행성에서 왔고 새싹에서 태어났으며, 밤에 숲속으로 들어가 누워있으면 자신의 양분으로 식물들을 자라게 해준다.
심지어 말까지 거는 데 재학 중인 학교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을 말해준다는 게 1부 안에서의 설명이거든요. 한 번에 몰입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상상력은 뛰어난 데 전작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건가 싶었죠.
오랜만에 다시 책을 들어 읽어보니 어느 순간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나인이 원우의 아빠 원승이 잊지 못하고 전단지를 붙이는 모습과 원우가 고립된 이유가 외계인이 있다고 주장하면서인데 사실 지모가 시연한 영양분을 받는 푸른빛의 잎들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죠.
여러 이유를 붙이지만 나인과 작가님은 확실한 전제를 깔아둡니다.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선함을 가장 풍부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의미는 <천 개의 파랑>에서 보여준 것 그 이상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인뿐 아니라 지모, 미래, 승택의 시선을 더하죠.
여기에 미래의 엄마가 경찰이라는 설정과 울보에서 훌쩍 커버린 현재, 원우와 도현 생각까지도 들어가 이입하는 내용이 훌륭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기대도 좋을 법한 치밀한 서사였죠. 지역에 명망 높은 도현 부모님이 사건을 덮었다는 사실까지 식물에게 들으며 이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같이 고민하게 하는데요.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탐험가 시점처럼 도현 안에 약하게나마 자리 잡고 있던 죄책감을 꺼내는 것으로 식물과 능력을 쓴다는 고백은 사뭇 인상적입니다. 점점 서로를 향한 믿음이 꺼져가는 시대에서 작품은 가장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아름답게 표현해냅니다. 더 감명 깊고 부끄러운 건 그 때문이죠.
포기한 뒤 다시 읽을 때까진 시간이 걸렸지만 다 읽는 데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님 특유의 아련함을 띄우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성장임을 의미하는 엔딩은 아직도 책 곁에 머물게 합니다. 도현의 부모님이나 돈만 보고 같이 다니던 친구들 같은 부수적인 인물에 대입할 가치도 내놓지 않는 의지도 작품성을 빛내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