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굶주림에 아사하는 제주 백성을 구했다-현주수정.hwp
그녀는 굶주림에 아사하는 제주 백성을 구했다.
“조선의 거상 제주가 낳은 의녀반수 김만덕”
김만덕은 새로운 천년 2천년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본보기가 되는 여성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우리는 보통 김만덕을 말할 때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용어로 구사하고 있고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김만덕 할망이라고 존경스럽게 말한다. 할망하면 퉁명스럽게 들리겠지만 만덕할망에 붙여 말할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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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반수 김만덕 영정
조선 후기 여성으로써 1739년에 아버지 김응열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나 181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어려서(12세) 괴질로 인하여 부모님을 여이고 두 오빠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어 읍내에 기녀의 양녀로 보내지게 되면서 어린나이에 기녀가 뭔지도 모르게 어깨너머로 기녀들 생활을 배우게 되었다. 18세 되던 해 기적에 등재되었고 23세에 기적에 삭제되어 평민으로 돌아왔다. 만덕은 기녀 집에서 나와 건입포에 주막을 차려 승승장구 최고의 거상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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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반수 김만덕의인 묘
1794년 갑인년은 조선 최대의 흉년이 든 해여서 오늘날까지도 흉년이 들면 갑인년 흉년을 떠올린다. 후일 화자 되는 이야기 한마디. “갑인년 흉년에도 먹다 남은 것이 물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조선은 1790년 들면서 괴질이 나돌고 가뭄이 들어 전국에 백성들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고 제주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척박한 제주 땅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이 1794년에는 하루 자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다. 만덕은 자비를 몽땅 털어 500석을 사들여 도민들에게 나눠주고 밥도 하고 죽도 쒀서 나라님도 못한 큰일을 해냈다. 이 소식을 들은 목사는 조정에 보고하고 만덕은 소원이 있어 한양 땅을 밟아서 궁궐로 들어가 임금(정조)을 뵈었고 금강산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제주는 출륙금지령(1629~1823)으로 누구도 본토로 나갈 수 없던 시대였다. 1797년 만덕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에 매진하다 1812년 숭고한 정신과 은혜로운 빛을 세상에 남기며 고으니모루(으니루)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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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연세를 세우다.
1840년 제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이 이야기를 익히 잘 알고 있었고 1844년 양손 김종주를 불러 “은광연세 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 줬고(추사 56세) 그 편액은 김종주의 후손 김균이 보관하고 있다가 2010년에 사단법인 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하여 현재는 김만덕기념관에 보관 및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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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비와 망주석 / 김만덕 비 / 비문해설판
양지바른 사라봉 기슭으로 음택지를 옮기다.
1812년 의녀반수 김만덕 묘지는 ‘고으니모루(으니루)’였다. 고으니모루(으니루)는 현 사라봉 입구 모 자동차정비공장이 있는 곳이다.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나온 폐차 된 물건을 만덕할망 산소위에 버려지고 있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제주의 선각자들이 모여 이장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976년 지금에 사라봉 남쪽 기슭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 때 그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현재 살아 계시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사라봉 공원 묘탑 하부 1m 높이에 화장된 시신의 모셔 있기에 ‘묘탑’이라 부르고 있으며 탑의 공식명칭은 "의녀반수 김만덕의인 묘"이고, 높이는 20m 이다.
건립경위 및 내용
1812년(순조 12년) 10월 22일 김만덕 할머니께서 74세의 나이로 돌아가시자 고으니모루(으니루)에 장사하고 11월 21일 비를 세웠다. 할머니 묘소 앞에 자동차 정비공장이 들어섬에 따라 홍정표, 정태무, 김봉옥, 장시영 선생님 등이 1971년 「김만덕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김만덕 할머니 묘의 이장을 추진하던 중 1976년 5월 「총력안보제주도협의회」가 도민성금으로 사라봉공원내 모충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게 되자 성역화 사업에 포함하여 모충사로 김만덕할머니의 묘를 이장 하게 된다.
묘탑 앞에 작은 기념관을 지어 2015년 5월까지 운영하다가 현제 건입동에 새롭게 단장한 기념관이 개관되어 많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건물 옆에는 은광연세가 현무암석에 음각되어 세워 있고 비석이랑 망주석도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 속에 달마다 날마다 김만덕기념관에 탐방객이 넘치기를 바라며, 제주시 관문역인 국제부두 시작하는 입구에 김만덕기념관과 김만덕 객주가 있으니 우리도 의녀반수 김만덕의 숭고한 업적을 본받아 은혜로운 빛을 온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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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경까지 사용하던 김만덕기념관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