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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까르마빠존자와 출푸사원의 추억
라싸 서북쪽,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있는 출푸사원은 까르마파의 총 본산이다. 비록 지금 (당시,1999년)은 전성기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까르마빠 린뽀체 법주자리가 추대되어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중흥의 기운이 돌고 있기 때문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길을 나섰다.
맑고 풍부한 물이 흐르는 출푸계곡을 거슬러 올라 법당 앞의 넓은 마당에 섰을 때는 이미 음영 짙은 땅거미가 빠르게 기어가고 있었고, 검고 웅장한 본전인 5층짜리 두강라캉 안에서 거행하는 저녁 예불 소리가 가람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온갖 악기 소리와 조화되어 흘러 나오는 라마승들의 아주 낮은 저음의 만트라 소리는 나그네로 하여금 원초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어떤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중략)
그날 밤 비몽사몽간에 영혼의 위대한 스승 까귀종파의 제2대 조사인 밀라래빠를 만나 까르마파의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 종파의 불교사적 위치는 무엇보다 ‘뚤꾸’, 즉 전생제(轉生制=活佛制)의 이론과 제도를 확립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의 하나인 까귀종파가 밀라래빠의 제자 감포빠에 의해 만개되어 분파되기 시작할 때, 먼저 팍모두파가 두각을 나타내어 원나라를 등에 업은 괴뢰정권 싸갸종파를 뒤집고 ‘13종(宗)’으로 전국을 구분, 정교 양쪽에서 설역의 대부분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나서 후기에 까르마종파도 두숨켄빠에 의해서 다포종파에서 갈라져 나온다.
1180년, 두숨켄빠- 바로 제1대 까르마빠 린뽀체로 추존된 인물이다- 는 그의 고향에다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 이 사원을 중심으로 수행을 하다가 열반에 즈음하여 그의 환생을 예언한다. 그의 안배대로, 신비스러운 증거를 따라 그의 영혼을 가진 전생자가 발견되어 제2대 법주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약속대로 그는 몸만 바꿔서 다시 그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곧 ‘전생제도(轉生)’의 시작이었고 ‘리빙 붓다(Living Buddha)’의 효시였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부처와 거의 동등한 십지(十地)에 도달한 보살은 이 세상에서 자유로이 화신을 보여 준다고 한다. 그 보살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일체지자(一切知者)’이기 때문에 미혹의 세계에 구애되는 일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을 위하여 열반의 경지를 갈망하는 일도 없고 오로지 모든 중생들의 행복과 해탈을 위하여 봉사하며 중생들이 구원될 때까지 임의로 윤회의 세계에서 전생을 거듭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법주(法主)를 그러한 화신의 보살로 간주하고 이 보살은 반드시 전생을 한다고 믿기에, 앞의 법주가 죽은 날로부터 계산하여 바르도(Bardo) 기간 중에 수태되었다고 보이는 신생아를 수소문한다. 그들 가운데에서 전생자를 지정하는데, 네충 사제의 신탁, 해몽, 생전의 언동, 신생아의 언어와 행동, 전생자의 소유물의 감별 등 철저한 검증을 거처 선출한다.
일단 뽑힌 대상자는 전대의 법주를 모신 적이 있는 학덕이 뛰어난 사람들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 전생자에게 소질이 있는 경우, 그 헌신적인 교육의 효과는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티베트 문화를 담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 가운데에서 출현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성공은 교단의 경영자로 하여금 보다 효과적으로 교단을 운용하도록 이끌었다. 교단을 한 씨족에게만 맡기지 않고, 교단이 발전하는 데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시주(施主)들 가운데에서 전생자가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이렇게 하여 까르마종파는 종파적 의식이 강하면서도 정치적인 행동력이 있는 단체로 변화했으며, 마침내는 까귀종파 일반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비밀스런 밀교의 전통대로 전생과 후생 사이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승제도는 면면이 이어 내려와 현재 17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 영혼을 가지고 여러 생을 몸만 바꾸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논란은 시작되었다.
출푸사원은 제2대 까르마빠에 이르러 원나라의 후원으로 크게 중건되었으나 1410년의 대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다시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원으로 5대에 의해 지금의 상태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까르마-까귀종파의 총본산 출푸사원(1997년 당시)
출푸사원의 괘불대
출푸사원에 있는 제1대 까르마빠 두숨켄빠의 소상(1997년 당시)
출푸사원 앞의 계곡(1997년 당시)
제17대 까르마빠 존자가 머물던(13세 당시) 출푸사원 건너편의 암자 앞에서의 승려들(1997년 당시)/ 이들중 몇사람이나 2000년 망명길에 올랐을까?
시킴의 룸텍사원 전경(2002년 당시)
룸텍사원 법주자리에는 17대 까르마빠 린포체 대신 그의 사진만이 앉아 있었다.( 2002년 당시)
까르마빠 존자께서 직접 애지중지하면서 길렀다는 출푸사원의 세파트(1997년 당시)/
/존자께서는 이 개를 아직 기억하고 게실까???
출푸의 아침은 여러 대의 ‘둥첸 소리로 시작되었다. 길이가 수 미터나 되는 이 금관악기는 대개 쌍으로 조를 이루어 부는데, 이 소리는 지붕 위에서 들려왔지만 주위의 설산들에 의해 메아리쳐 되돌아와 마치 ‘저음의 천둥소리’ 같았다. 이런 신비로움은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 했다. 그래, 그것은 개경계진언(開境界眞言) 그 자체였다.
영혼의 재충전으로 가뿐해진 몸과 마음으로 맞는 새 아침은 찬란했다. 큰 법당인, 두강라캉에 모셔져 있는 밀라래빠를 위시한 역대 까르마빠 조사들을 참배하고 나서는 이 사원의 주지이며 전 세계 까르마파의 정신적 귀의처인 제17대 우겐린뽀체를 만나기 위해 본사에서 다시 시냇물을 건너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거처로 갔다.
그곳에서 수십 명의 순례객들과 여러 명의 외국인들과 줄에 섞여 나는 그를 다시 알현(?)하였다. 그는 13세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너무 커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미 준수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는지는 모르나 하여간 “코리아 운운” 때문인지 반갑게 맞아 주면서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축복의 만트라를 읊어 주고는 손에 붉은 실을 걸어주었다.
우리는 이미 구면이었다. 첫 번째 인연은 1993년, 해동의 나그네가 설역의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침 그는 7세의 나이로 라싸의 조캉사원에서 수계식(授戒式)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까르마종파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감흥 없이 단지 흥미로운 볼거리로만 여겼던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부터 베이징의 중앙미술대학에서 목판화 연수를 하며 틈틈이 티베트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 갔고, 1997년 티베트 대학의 초청으로 라싸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만다라 공부를 하며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 그를 만났다. 우연한 자리였는데, 그 당시 나는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리빙 붓다’라는 다큐영화를 본 후라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여러 명의 측근들과 경호원들로 보이는 사람들 속에 묻혀 있었지만 나는 티베트 대학의 외국인 작가라는 특권(?)으로 그에게 말 몇 마디는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 전시회 카탈로그와 88올림픽 기념 메달을 주었고 그는 나에게 행운을 상징하는 빨간 실타래와 예식용의 흰 수건을 걸어 주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축구를 잘하는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측근 중 한 사람과 연락처를 주고받았기에, 내친 김에 며칠 뒤 출푸사원을 어렵게 방문했지만 중도에서 그의 외출이란 통지와 함께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1999년의 해후가 어렴풋하게나마 세 번째 인연인 셈이다. 인연이란 이런 것일까?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이 지구별에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여러 번 만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정말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리 중생들은 태어날 때부터 지정된 시간․공간에 의해 혈연․지연․학연 등등으로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이 고리를 공유한 이들과는 익숙한 관계가 설정되어 편하게 정을 주고받을 수가 있지만, 닫힌 마음을 가진 보통 인간의 경우에는 모르는 이들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기를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특별한 만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 속에서 우연한 첫 만남이지만 어떤 이들에게서는 왠지 어디서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감정을 느낄 때도 있다. 이생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이런 인연, 언젠가는 꼭 만나야만 하는 그런 필연적인 만남을 한두 번씩은 경험하게 된다. 흔히 우리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어쩌면 전생에서 익숙했던 이들과 ‘이승에서 재회’하는 것이 아닐까?
제17대 까르마빠 우겐팅레 도르제!
그와의 인연은 그냥 우연일까, 필연일까? 하는 화두를 들고 뒤돌아 나오는 해동의 나그네 뒤에서 선명한 쌍무지개가 배웅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귓가에 “우리는 만날 때 헤어질 것을 생각하며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다.”는 만해(卍海)의 시구절이 절로 맴돌았다.
부처가 아닌 중생이 자유자재로 화신(化身)하여 스스로의 원력대로 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이 전통적 화두는 근래에 한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 불붙게 되는데, 바로 제17대 까르마빠의 인정에 대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다. 붉은 중국이 설역고원 강쩬을 점령하고 1959년 라싸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당시 티베트의 법왕인 제14대 달라이라마와 수만의 티베트인들은 자유의 땅 인도로 망명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속에는 제16대 까르마파의 법주, 걀와린뽀체도 끼어 있었다. 그는 나투라 고개를 넘어 인도에 도착하자 달라이 라마와 헤어져 인도의 첫 동네인 시킴 강톡이 올려다 보이는 언덕에 룸텍사원을 세우고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그는 해외 포교에 주력하는데, 그 결과 구미에서 티베트 불교 신드롬이 일게 되어 수많은 사원이 세워지고 수백 만 명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으며 티베트 불교식의 수행법이 붐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달라이 라마와 쌍두마차가 되어 포교 일선에서 활약하던 그는 1981년 시카고에서 열반에 들게 되며, 이때 그는 종파의 전통대로 후일을 안배를 하였다 한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가고 1992년이 되자, 룸텍사원의 네 명 섭정들의 위탁을 받은 대표단은 신비스런 현상을 쫓아 동부 티베트에서 아보가보 라는 아명을 가진 6세짜리 아이를 찾아내어 출푸사원으로 데리고 온다. 여러 가지 초과학적 검증을 거친 후 아이는 바로 16대 까르마빠의 영혼을 가진 ‘뚤꾸’, 즉 전생자로 판명된다. 그 아이는 다음 해에 달라이 라마와 중국 당국의 인정 아래 조캉에서 수계식을 하고 출푸사원에서 우겐팅레 도르제란 이름으로 제17대 법주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 까르마파 4대 호법라마들의 내부적인 갈등요인으로 인해 또 다른 후보자가 나타나 서로 정통임을 내세우는 이른바 ‘까르마종파 커넥션(Karmapa connection)’이 생겨 세계의 지탄과 이목을 끌게 되지만 하여간 이 이상스러워 보이는 사건은 전 세계 매스컴의 커다란 관심거리가 되었고, 또한 ‘리빙 붓다’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온 세상에 널리 상영되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의 후일담은 또 다시 이어진다. 2000년 정초 내가 홍천강의 우거에서 졸저 『티베트역사산책』의 탈고를 눈앞에 두고 꽁꽁 언 홍천강을 바라보며 새 천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즈음, 반갑고도 놀라운 외신이 연이어 들어왔다. 그가 몇 명의 측근만 거느린 채 중국 당국의 감시망을 뚫고 한겨울의 히말라야 산맥, 즉 나투라고개를 걸어 넘어와 인도에 도착해 망명을 요청하였다는 것이었다.
중국으로써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셈이었다. 그를 키워서 달라이라마를 견제하고자 목적으로 공을 들였는데, 한 어린이에게 멋지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중국은 그의 망명 저지를 위해 인도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는 한편, 겔룩파 서열 3위의 비중 있는 자리로서 1997년 이후 공석 중이던 레팅사원의 제7대 린뽀체 자리에 2살짜리 쏘남푼꼭이란 아이를 성급하게 추대함으로써 이 사건에 대한 국내외의 이목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구미 제국은 즉각 국무부 차관을 위시한 사절단을 인도로 보내 망명 수락을 독촉했다. 이런 국제적으로 미묘한 상황 아래서 마치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은 인도의 결정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 망명이 허락되면 그는 인도 동북부 시킴 지방에 있는 까르마파의 해외 본산 룸텍사원에 거주하면서 전생에 그가 못다 이룬 일을 할 것이라고도 하는 보도도 이어졌다.
그는 전생에 한 번(1959년) 그리고 41년 뒤인 이생에 또 한 번 히말라야를 걸어서 넘는 자유의 길을 선택한 셈이 된다. 설사 그가 ‘살아 있는 부처’라고 할지라도, 과연 이번 역시 그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을 것인가?
얼음이 녹는 봄이 되면(2000년) 나는 또 다시 해동의 나그네가 되어 이번에는 룸텍사원으로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는 두 번씩이나 걸어서 넘어왔던 대 설산 히말라야 너머에 있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조국의 하늘과 어릴 적 추억이 어려 있는 출푸사원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겠지만, 아마도 그는 이미 준수한 청년이 되어 있을 것이지만,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는 조국의 앞날과 그를 살아 있는 부처라 믿고 기다리는 선량한 민중들을 위해 고뇌 속에 간절히 기원하고 있으리라.
최근 『타임』지(2001년 4월 27일자)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달라이라마께서 티베트로 돌아갈 때 나도 티베트로 돌아갈 것이다.”
<「수미산순례기」29회, 『佛光』(2000년 3월호)와 졸저 『티베트의 역사산책』(2003년, 정신세계사) 에서 발췌하다.>
첫댓글 너무 너무 잘 봤습니다.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
음
역시~
역사적이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어주시니 고맙습니다. 까규묀람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_()()()_
까규빠의 묀람축제라면 어디에서? 다람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