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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죽음 건너편/고후 5:1-10
출 처| 이응효목사
우리 형제 가운데 한 분이 지난 주간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파옵니다.
인간의 죽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헛된 죽음이 있습니다.
남미 페루의 우아노코지방에서 지난 9월14일 술마시기 대회를 열어 1등한 사람에게 우리돈 6만3000원을 걸었습니다. 술은 최소40도에서 70도 까지 가는 남미산 브랜디로 하여 50대 남자가 13잔을 마시고 1등을 하였고, 상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도착하여 돈을 꺼내다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었고, 그 대회에서 술을 마신 사람들 중 5명이 고꾸라져 병원에 실려가 중태에 빠졌습니다.
한달 전 필란드에서 누가 사우나에서 오래 견디나 시합을 하였는데 무려120도의 고온실에 들어갔다가 한 남자가 뛰어 나왔지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고 다른 몇 사람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죽음은 무모한 죽음이요 헛된 죽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정한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박중독자는 230만 명이고 술중독자는 2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5천만 명 인구 가운데 약9%정도입니다.
보름 전 도박중독에 빠진 남편이 말리는 부인을 죽이고 고등학생 아들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가족들을 돌아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르게 살자고 타이르는 부인과 자식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니 그 가족들의 죽음은 실로 비정한 죽음입니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습니다.
당진의 어느 제철소에서 근무하던 29살 젊은이가 1600도의 뜨거운 쇳물이 끓고 있는 용광로에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젊은이는 결혼 한 달을 앞둔 젊은이였습니다. 그 죽음은 주위를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기막힌 죽음 원통한 죽음도 있습니다.
지난 달 신정동의 한 놀이터에서 세상 원망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진 한 전과자가 근처 옥탑 방에서 단란한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옥탑방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망치와 칼로 남편을 살해하고 부인에게 중상을 입힌 후 달아났습니다.
갑작스런 죽음도 있습니다.
지난 달 2일 태풍 곤파스가 불어오던 날 아침 분당 구미동 아파트 앞에서 부인 출근을 배웅하고 돌아서던 젊은 남편 37살 손모씨가 강풍에 부러진 삼나무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전사한 죽음/ 사고로 죽은 비참한 죽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죽음 등 죽음의 종류는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아마도 질병으로 죽는 죽음이 제일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암에 걸리는 사람의 수는 보고 된 숫자만 하여도 16만2천명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볼로 로스> 라는 분은 스위스 취리히의과대학출신의 정신과 의사고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움직인 100명 중 1명입니다. 이분은 세계적인 죽음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책만 20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분은 죽음직전에 있던 말기환자 500여명을 관찰하여 연구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책이 <죽음과 죽어감>이란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사람이 죽음에 대한 선고를 받으면 5단계로 반응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1)죽음을 부정하는 고립 단계입니다--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 난 못 죽어/ 이건 말도 안되 / 오진일거야 라고 부정합니다.
2)분노의 단계입니다.--하필이면 왜 나인가/ 나보다 더 나쁜 놈들 많은데/ 이건 불공평해/ 이럴 수가 없어 라고 분노합니다.
3)협상의 단계입니다.-- 좋아 인정하지만 더 이상 악화되게는 말아 줘/ 좀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줘 제발. / 병원을 옮겨볼까/ 외국으로 나가 치료를 받아볼까 여러 가지로 죽음을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4)우울 단계입니다.--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말수가 적어지고/ 몹시 우울해집니다.
5)수용 단계입니다.--자신을 정리하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더 가지려고 하고/ 못다한 사랑에 대한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은 혼자 가야하는 길입니다. 죽음은 가장 무섭고 절망적인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져다줍니다.
죽음이 오면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고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의사가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면... 아~끝났구나 절망하게 됩니다.
임종 때 가족들이 울고 슬픔에 젖어 있으면 그렇지 않아도 두렵고 무서운 과정을 지나가는 당사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오직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교회 가족들일 것입니다. 곁에서 찬송을 불러주고/ 보혈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고/ 천국에 소망을 주는 말씀을 주고/ 기도하여 주고/ 주님의 그 사랑을 속삭여 줄 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교회가 필요하고 순모임 가족들이 필요합니다.
1. 죽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서2:16절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공도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다 죽습니다. 노인도 죽지만, 어린 아이도 죽고, 심지어는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늙어서도 젊게 보이려고 주름을 펴고, 보톡스 주사를 맞고 열심히 노력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볼테르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아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나에게 6개월만 더 살 수 있도록 해주시오. 6개월의 시간만 주면 내 재산의 반을 주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원도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1초라도 목숨을 연장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내가 조금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 전 재산을 주겠다.” 그러나 죽음을 돈이나 권력으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가운데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지요?
3개월 시한부, 1년 시한부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생각할수록 우울하고 인생이 절벽을 만난 것처럼 아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다 시한부 인생입니다. 조만간에 반드시 죽을 사형수들입니다.
2. 죽음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9:27절)
앞서 말한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죽은 후 육체이탈 사례 이만 가지를 연구하여 죽음 이후의 삶이 실재한다고 밝혔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선택한 결과에 따라 영원한 즐거움에 동참을 하든지 영원한 고통에 동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의 모습에 많이 관심을 갖습니다. 호상이다. 아니면 사고사다. 객사다. 애사다. 여러 가지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죽은 후 영원한 즐거움에 참예하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반대로 건강하게 장수하고, 많은 자손을 두고, 수많은 조문객들의 관심을 받는 장례를 치루었지만 죽은 다음에 영원한 고통에 떨어진다면 영원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그 이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은 우리에게 영원한 갈림길을 만듭니다. 그 갈림길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이 땅에서 내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죽음 후에 들어가는 한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1:8,9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 합니다. 설교자도 좋은 소식만 말하고 싶고, 나쁜 소식은 가급적이면 피해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것만 말하고, 천국만 말하고, 축복만 말한다면 그것은 반쪽의 진리를 숨겨두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은 천국처럼 확실합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1)육체적인 고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이 타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불꽃 속에서 영원히 뜨거운 고통을 느끼는 곳이 지옥이라고 하셨고, 불로 소금 튀듯 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말씀하셨고, 너무나 고통이 심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2)감정적인 고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자신이 진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과거에 대하여 영원토록 가슴아파하며 슬퍼하는 곳입니다.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없기에 더욱 슬퍼하며 후회하며 이를 갑니다.
(3)영원한 고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가 미치지 않는 곳이기에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서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비추시고 비도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고통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호의를 거절한 결과가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을까? 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지옥으로 내려 가셨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시는지를 증명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피 뭍은 십자가의 사랑과 호의를 거절하고 육체의 정욕과 마귀와 세상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가지고 올 수도 있습니다.
2)죽음 후에 들어가는 다른 한 곳은 천국입니다.
계시록21:3-4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은 영원한 예배와 영원한 사귐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고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기뻤던 예배의 순간들과 가장 깊었던 사랑의 순간들과 즐거움과 감동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사도바울은 14년 전 그곳에 다녀왔는데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몸을 떠나 그곳에 가서 사는 것이 그의 소원이라고 하였고 육신의 흙집이 무너지면 완전한 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육체적으로 우리 모두는 완전한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신체적 장애나 늙은 모습이나 질병이나 육신의 고달픔이 없습니다.
② 감정적으로는 불안이나 고민이나 염려나 슬픔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더 이상 마음의 상처가 없습니다.
③ 관계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영원하고 완전한 가족을 경험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사랑과 섬김과 나눔과 즐거움, 유머를 즐기고, 기쁨의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④ 영적으로는 막연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완전한 지식을 가질 것입니다.
주님이 입으신 그 몸을 입고 주님의 성품을 가지고 주님처럼 변화된 상태로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을 한단어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완전'이라는 단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 감정,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천국과 지옥이 죽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 땅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3.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국에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은퇴할 준비를 합니다. 연금도 들고, 보험도 들고, 내가 은퇴한 이후에 10년, 20년을 살기 위해서 일평생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의 영원을 준비하는 것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초청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에 구원자로, 주인으로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을 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쌓여있는 인생이 아니라, 부활과 승리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로 그 생명과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요14:6절)
구원 얻을 이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행4:12절) 이 사실을 전하십시오.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죽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장례 예식 순서지 뒷면에는 암으로 70세에 돌아가신 사모님이 짙은 빨간 색의 옷을 입으시고 두 손으로는 부활을 상징하는 흰 꽃을 아름답게 피운 난 화분을 바쳐 들고서 환한 미소를 크게 짓고 계셨습니다. 마치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사진 아래에 장례식장을 찾아준 조객들을 향하여 남기신 고인의 인사의 말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사모입니다. 저의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면 때론 후회스럽고 때론 슬프고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저의 무릎을 일으키시고 제 삶속에서 주님의 선을 이루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쁨을 누리다가 이제 먼저 주님 품으로 갑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매님들과 이 세상에서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요, 조금은 슬퍼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지만 모두 저를 위해 또한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즐거운 영원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축하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경주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경주가 다 끝났을 때 그 때 예수님과 같이 축하하러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충성된 삶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 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장례식입니다.
성도여러분 삶의 연장이 죽음이며 죽음은 더 나은 삶,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 아무것도 준비하고 오지 아니하였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예비하신 것처럼 삶 저편에도 주님께서 영원토록 살 집을 예비하셨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토록 사모하는 영원한 곳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죽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죽음 건너편에 영원한 세계를 확신하고 이 사실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