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종비 정순왕후의 恨과 눈물을 찾아서>
K-풍수 정기 모임은 8기 신인모집과 겸해서 풍수지리 문화역사 답사를 합니다. 서울에서 BMW타고 가는 곳이랍니다.
이번에 찾아갈 곳은 단종임금의 비인 정순왕후의 한과 처절한 삶이 스며있는 동촌을 찾아갑니다. 땅 팔자와 사람팔자가 있듯이 이 땅을 스쳐간 사람의 흔적이 켜켜이 쌓이고 역사가 되어 풍수사의 발길을 이 곳으로 오게 만듭니다.
일시 : 2018.7.19(목) 오후3시
장소 : 동묘역 10번출구
준비물 : 모자,선글,편안한 신발, 생수
진행 : 지도교수 오비 최이락
한양의 손방(巽方)과 곤방(坤方)은 죽음으로 갈라놓는 시구문과 사형장이 있었고, 진방(震方)은 생 이별을 하는 곳인 영도교(永渡橋)가 있다.
조선 6대 임금 단종(1441~1457)은 비운의 주인공이다. 열 한 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고 다시 강원 영월로 유배됐다가 열 여섯 나이에 죽임을 당한다. 그런 그에게는 한 살 많은 부인이 있었다. 정순왕후 송씨(1440~1521). 남편을 떠나 보낸 뒤 도성 밖에서 여생을 보낸 그의 삶은 외롭고 쓸쓸했다.
이번에 답사할곳은 비운의 정순왕후의 한숨과 비애가 묻어있는 동촌을 찾아간다. 하절기 평일임를 감안하여 동묘역 10번 출구에 모여서 버스를 타고 쌍용아파트에서 하차 하면서 답사가 시작된다. 첫번째로 비우당을 찾아간다. 비우당과 정순왕후와는 연관성이 1도없다. 그러나 서울에서 김서방 찾듯이 물어물어 찾아가야하니 처음 이곳을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답사할때 느끼는 것이지만 문화재나 역사에 관심없는사람이 너무많다.
동네사람들에게 자주동샘이나 비우당 위치를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비우당은 푯말이라도 있으니 그곳을 물어야한다. 자주동샘은 학생은 물론 심지어 택배기사도 모른다.
열 네 살 때 단종비가 된 정순왕후는 요즘 국회의원 임기보다 짧은 3년만에 지아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다시 서인(庶人)이 됐을 때 관비로 전락되는 풍파를 맞게된다.
한때 그 앞에서 머리조차 바로 들지 못했던 사람,사육신 거사에서 변절한 인간 신숙주는 관비가 된 왕비를 자기집 종으로 달라고 몰염치를 부렸다. 세조는 인간적으로 차마 그것만은 허락치 않아 신분은 관비로 살았으나 누구에게 예속하지 않도록 했다.이로서 신숙주는 만고에 불충한 죄업으로 숙주나물이 되어 우리의 밥상에 오른다.
이번에 답사코스에서 첫번째로 들릴곳이 자주동샘이다.정순왕후가 먹고 살 생계수단으로 염색을 하여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때 항상 찾던 작업장이 이곳이다.역사는 기전체나 편년체가 있지만 답사는 그런것이 없다.
가까운 곳 부터,쉬운 곳부터 챙기다보니 첫번째 답사처가 되었다. 정순왕후 전 생애를 기승전결로 보면 승(承)해당하는 이어지는 중간부문이다.
7월 혹서가 문제가 되어 비겁하게도 마을버스 신세를 지고 낙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면서 짜집기 답사를 하게된 이유다.
정순왕후 송씨가 물을 긷고 빨래를 했다는 자주동샘.초가집 비우당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고 지금은 울타리로 접근을 막아놓았다. 바위에는 읽기도 민망하게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으나,
정순왕후를 생각해서 점잖게 자주동샘이라고 말하는 교양인의 센스가 필요하다
자주동샘 앞 초가는 실학자 이수광이 살던 비우당이 있다 이수광은 임진왜란 전후의 인물이라 정순왕후와는 관계가 없다.이곳만 떼어놓고 볼때는 비우당도 의미있는 곳이다.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의 이 비우당(庇雨堂)에서 이수광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썼다. 이수광의 호가 지봉(芝峯)이다. 이 근처의 크고 작은 도로명이 지봉로로 되어있으니 나름대로 존재감이 있다.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세종 당시 3대 청백리 중 한 사람인 유관이 지어 살던 초가삼간으로,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됐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이수광이 다시 짓고 비우당으로 이름을 정했다. 하지만 비우당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며 서울시의 무식한 공무원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순왕후 유적지 앞을 턱하니 가로막아 조망권을 차단해 놓느냐 말이다. 이런걸 보면 선한 사마리안인 오비도 화가 난다.
그 초가 뒤편에 목을 빼서 보면 정순왕후의 유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물을 구하고 빨래를 한 곳이 바로 자주동샘이다. 정순왕후는 시녀들과 함께 샘 주변에 있던 지치라는 풀로 옷감을 보랏빛으로 물들여 동묘에 있던 여인시장에 내다 팔았다.
자두동샘 옆에는 단종의 넋을 달래는 원찰을 짓고있다.원각사라는 곳인데 무슨 복지원 같은 구조다.이 또한 졸속이 예견된다.
자주동샘과 작별하고 지금부터 걸어서 가야한다. 내리막길이라서 편안하가는 하지만 답사에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청승맞아 보인다
명신초등학교를 지나 꾸불꾸불 경사로를 내려가면 절이 하나 나온다. 두번째 답사처인 삼각산 청룡사다.한양의 내사산중 낙산이 좌청룡이니 풍수지리를 쬐금만 알아도 낙산자락에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있다.
청룡사는 인근의 보문사와 더불어 비구니 사찰이다.이곳 옆에 정순왕후가 불교에 귀의하여 지아비의 명복을 빌고 본인은 한많은 삶을 살아간 정업원 터가 있다.
청룡사 안에는 우화루가있다.
비가 꽃처럼 내린다는 이 건물은 단종이 영월로 귀양가기 전날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었으니 왕후는 이곳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우화루 옆에는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정업원(淨業院) 터가 나온다. 세조는 포악하게 권력을 찬탈한 다음 자비를 베푸는 시늉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왕후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그것을 거부하고 이곳 정업원으로 들어와 시녀 세 명과 함께 죽을 때까지 살았다. 원래 정업원은 양반 출신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절을 말한다. 출생의 콤플렉스가 남달랐던 조선 21대 임금 영조는 1771년 이곳을 찾아 왕후의 사연을 듣고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웠다. 영조의 친필이다.
비각 현판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峰後巖於千萬年)
앞산 뒷바위 무궁하리라
청룡사를 나와 다시 왔던길을 올라 건너 산 봉우리를 올라가면 야트막한 봉우리가 하나있다
영조가 정업원에 들른 김에 이곳을 마저 올랐다가 지어준 봉우리 이름이 바로 동망봉(東望峰)이다. 지아비가 숨진 영월을 향해 정순왕후가 매일 동쪽을 보며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조는 동망봉이라는 이름을 바위에도 새기게 했는데 이 일대가 일제시대에 채석장으로 사용되면서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지금은 체육공원이 되어 어르신들이 몸을 풀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가 남편이 죽은 영월을 향해 매일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곳에 최근에 정자를 지어 동망정이라고 한다. 동망봉이 았는 산은 일제시대에 채석장이 되어 산허리가 잘려너가고 졀벽에 노출되어있다.절개지는 음택에든 양택이든 흉지다.그래서 창신동 일대는 못사는 사람들이 많다.
동망봉에서 동네를 내려오면 외국인 템플스테이로 유명한 묘각사가 나오고 인근에 노태우정권때 민주화를 외치다 백골단에 의해 사망한 강경대 기념관이 있다
이제 대로를 건너 동관묘 쪽으로 간다.
찻길을 건너면 동관왕묘가 나온다. 중국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지금은 공사중이라 그냥 패스. 동관왕묘보다 더 유명한 것은 풍물거리시장이다.
일종의 벼룩시장으로 옷, 신발, 가방, 골동품, 가전제품, 생활용품, 음반, 작은 기계 등 없는 것이 없다. 오죽하면 처녀 불알빼고 다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이다.
1만원짜리 한 장들고 가면 몇가지 물건을 살수 있다.이곳 물가는 베트남쯤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 벼룩시장에서 청계천으로 가는 길에 여인시장이 있었다. 부녀자들이 주로 채소를 사고 팔던 시장으로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시장의 여인네들이, 노비로 전락해 어렵게 살고 있던 정순왕후를 위하여
이 시장을 열었다고 한다.
여인시장 터를 지나 청계천에 도착하면 영도교(永渡橋) 라는 다리가 나온다. 청계천 7가와 8가 중간쯤에 있는 이 다리는 정순왕후가 단종을 영월로 보낼 때 마지막 이별을 한 곳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했다고 해서 영 이별다리 또는 영영 건넌다리라고 했다. 성종 때 다리를 보수하면서 영도교가 됐다. 지금 영도교는 넓은 찻길로 변해 있어서 겉으로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찾아볼 수 없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조선버전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현장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불륜보다 짜안한 곳이다.이곳에서 생이별의 감정을 느껴보기 바란다
정순왕후 스토리는 영도교에서 끝나고
이제는 뒷풀이 식당으로 간다
그냥가면 길이 더뎌 보이니 악서셔리 코스로
근대화가 박수근화백의 집터를 보고 가즈아.
지금은 식당으로 변해있지만 이곳에서 가난한 화가가 쪼그리고 앉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어느듯 관람자도 화가가 된다.
자고로 답사에서 맛집이 빠지면 말짱 꽝이다
오비는 몇 번 해봐서 잘 안다.
이곳에 가성비 좋은 괜찮은 맛집이 있을까?
이곳이 어딘가, 동묘의 풍물시장이 아니던가?




